사는 이야기 /사는 이야기

여행의 내공

프리 김앤리 2013. 10. 2. 15:07

 

여행은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이자 '낯선 것들과의 만남'이다.

 

그런데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의 책 「존재와 시간」에서 이런 말을 했단다.

  

   (우리는) 가까이 '손 안에 있는' 존재자를 '배려함'에서 사용 불가능 한 것으로,

   (다시 말해) 특정한 용도로 사용하기에는 부적절 한 것으로 만나게 될 수 있다.

   이 경우 작업 도구는 파손된 것으로 판명되고 재료는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난다.

   도구는 여기에서도 어쨋거나 손안에 있기는 하다.

   ......

   이런 '사용 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마침내 우리 '눈에 띄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알쏭달쏭, 애매모호, 때로는 허무맹랑하게까지 보이는 철학 책이라고 해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자는 것인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의 뛰어난 철학자 강신주 선생님이 그의 책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하이데거의 저 문장을 아주 쉽게 풀이해 주셨다.

 

글 속의 '손 안에 있는' 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고

그 반대 문장인 '손 안에 없다'(여기서는 '사용 불가능성'이라고 표현되어 있다)라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즉, '낯섬'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 '배려함'이라는 것은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어떤 것과 관계한다'는 것을 뜻한다면

'눈에 띔'은 '친숙했던 어떤 것과의 관계가 좌절되어 이제 그것을 의식하게 된다'를 의미한다.

그런 해석으로 하이데거의 책 구절을 좀 쉽게 풀어서 보자면 이렇다.

 

  "사람들은 늘 익숙했던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지만

   손안에 있지 않던, 친숙하지 않던 낯선 것과 대면하면 의식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늘상 같은 일이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굳이 의식(생각)이라는 것이 발동할 필요가 없지만

우리들에게 친숙함이 사라지고 낯섬이 찾아오는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생각이 깨어나 활동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상 매 순간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며

'생각은 오직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과 조우할 때'만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행이 그러하다.

익숙한 것을 버리고 낯선 것과 만나는 일이 여행이라면

여행은 곧 '생각의 시작'인 셈이다.

또한 무수한 생각과의 만남인 셈이다.

여행을 떠나면 일상과 똑같은 24시간을 보냈음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유도

한 시도 쉬지 않고 그 무수한 생각의 바다속에서 헤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와 일상과는 다른 공간에 놓였을지라도

함께 떠나온 사람들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처럼 편안했다면,

그래서 서로에게 아주 깊은 정서적 안정감을 주었다면

여행이 '생각의 시작'이 아니라 그저 휴식일 수도 있다.  

 

이번 루마니아 여행이 그랬다.

함께 한 인원이 일곱밖에 되지 않은 이유도 있고,

누구는 서로 일면식이 있었지만 누구들은 서로 완전히 처음이었지만

각자들이 가진 여행의 내공에다 삶의 내공까지 겹쳐진 완벽한 조화에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들.

두려움과 긴장, 그리고 설렘의 연속인 여행도 좋지만 이런 여행도 참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여행을 끝내고 한달이 넘어서 정리하지 못한 변명 쯤 되겠다.

뭔 한 일이 있고, 뭔 본 것이 있어야지... 뭔 느낀 게 있어야지 루마니아니 불가리아니 뭔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겠는가?

한 식구같이 그저 같이 밥을 먹고 그저 하루종일 같이 지냈던 그런...

 

 <루마니아 시기쇼아라의 어느 골목... 우리가 한 건 그저 이 동네 골목에서 어슬렁어슬렁 한 것 밖에 없는 듯한 기억...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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