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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딸이어서 행복했습니다

프리 김앤리 2015. 4. 20. 18:06

 

 

** 유쾌한 울 아버지
    우리 집은 오래된 단독주택이었다.
    사시사철 마당에 꽃이 피고 연못엔 고기가 놀던 그런 집이었다.
    연못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모두 무슨 저택 정도를 상상하시겠지만 터무니없다.
    부지런한 부모님이 계셔 좁은 공간에 직접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고 화단을 잘 가꾼 결과였다.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 구식이었으며 마당 한 귀퉁이엔 자식들 먹여살리는 장독이 가득한 일반적인 풍경, 딱 그만큼이었다.
    오래된 우리 집에는 다락도 있어 쥐새끼들이 다락과 천정 사이를 드나들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집이었다.

    한밤중에 달그락거리는 쥐소리는 여간 성가신게 아니었다.
    자고 있는데 혹시 천정에서 쥐가 툭 떨어지는 게 아닐까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울 아버지는 이 상황을 게임처럼 만드셨다.
   초저녁에 주무시고 남들보다 먼저  이른 새벽에 깨시는 아버지는 며칠간의 면밀한 조사끝에 쥐가 다니는 길목을 파악하고
   그 길목에 쥐를 안심시키는 먹이를 놓아 이 놈의 동향을 살폈다.  매일 아침, 간밤에 쥐와 벌인 게임 결과를 우리한테 알려주었다.
   "오늘도 이 놈이 내 먹이를 덥썩 물어갔다"거나 "바보같은 놈들, 저 죽는 줄 모르고 살콤살콤 잘도 먹었다"는 둥
   아버지의 작전대로 쥐가 놀고 있어서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이야기하셨다.
   그러기를 한참. 때론 멸치로 때론 감자 범벅으로 쥐를 농락하던 아버지가 드디어 D- day를 선포하셨다.
   매일 드나들던 길목에 쥐덫을 놓고 그 위에 먹이를 두고서는 쥐의 최후를 기다리는 거였다.
   물론 D- day 며칠 전부터는 쥐덫 위에 먹이를 올려놓고서도 덫이 닫히지 않도록 해 쥐를 안심시키는 주도면밀한 작전도 허투루하지 않았다.
   드디어 D- day의 아침.  아들 하나, 딸 다섯의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와 쥐가 벌이던 두뇌싸움(아버지는 늘 이렇게 표현하셨다)의 결과를 궁금해했다.
   그 아침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던 쥐덫과 호쾌한 웃음!!!
   "봐라!! 요 녀석이 내 꾀에 딱 걸려들었지???"

   그 이후로 오래된 우리 집 천정에서 나는 쥐소리는 공포가 아니라, 아버지와 쥐가 벌이는 '두뇌싸움'의 흥미진진한 게임장이었다.
   "천정위에 쥐소리가 들리더라"는 말을 어서 빨리 아버지께 알려드리고 싶었고
   "그래? 그렇단 말이지!!!" 라며 만면에 미소를 띄우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앞으로 펼쳐질 게임을 기다리게 되었다.
  


** 맥가이버 울 아버지

   현관을 나가 뒷마당에 돌아나 있는 화장실은 무서웠다. 변기는 있었지만 그래도 푸세식!
   늦은 저녁이면 언니나 동생을 꼬시지 않고 혼자서 화장실을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볼일을 보고 있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이 가버렸을까봐 끊임없이 확인했고

   밖에 있는 사람은 '여기 있노라' 확인시키며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재잘재잘 계속 떠들어야 했다.

   어느 날, 화장실에서 이상한 버튼 하나를 발견했다. 볼일을 보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 손만 뻗으면 딱 누를 수 있는 위치.
   "딸깍"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왔다. 라디오였다.
   소리를 내는 라디오 본체는 화장실 한쪽 귀퉁이에 숨어 있었다.
   걍~ 라디오를 갖다 놓은 게 아니라 on-off 버튼과 본체를 분리 시켜놓는 아이디어!
   그 뒤로 우리집에 친구들이라도 놀러올면 나는 늘 화장실로 데리고 가 그 버튼을 자랑했다.
   "재밌지? 재밌지? 울 아버지, 진짜 웃기제!!!"

 

   아버지의 버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루의 어느 한 귀퉁이에 박혀있던 버튼도 라디오 on- off용 이었다.
   방금 켜진 라디오가 마루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찾아보라며 쩔쩔매는 우릴 보고 즐거워하시던 아버지.
   커튼 뒤에 숨어있던 라디오는 온전한 것이 아니라 고물상에서 막 건져온 올 누드 부품.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마루를 넘어 들어온 햇살과 함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딸들끼리 옹기종기 자고 있는 방에 새벽마다 들어와
   '혹시 연탄가스를 마셨을까' 한명 한명 후레쉬를 비춰보며 '배가 볼록볼록, 숨쉬고 있는지 확인했다'는 울 아버지.
   밤이면 "니가 불꺼라, 니가 불꺼라" 티격대던 딸들을 위해 어느날 아버지는 또 하나의 버튼을 달아놓으셨다.
   누으면 발이 닿는 딱 그 위치에 스위치를 달아 '딸깍' 건드리기만 하면 전등불이 꺼질수 있도록...
   "이제는 이불속에서 일어나지 말고 발끝으로 불 끄고 자라~~"
   물론 그 버튼은 누운 채 뻗은 손으로 줄을 당겨서 불을 끌 수 있는 몇번의 실험 뒤에 다시 만든 더 멋진 작품이었다.
   딸들은 이제 밤마다 싸우지 않고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내던 맥가이버 아버지의 작품을 발끝으로 까딱하기만 하면 됐다. 
   편안한 밤이었다. 

 

 

** 치밀했던 울 아버지

  내가 초등학교 몇 학년 쯤이었을 때다.
  어느 날, 아버지가 우리 모두를 불러앉혔다.
  하나 있는 아들은 아직 학교도 안 들어갔을 때다.  큰 종이에 그려진 표를 하나 내놓으셨다.
  가로줄에는 년도를 세로줄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쓰여져 있었다.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칸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 그리고 자식들의 칸에는 초 중 고 대 1,2,3...  이런 것들이 쓰여 있었다.
  몇개의 년도에는 붉은 줄이 길게 쳐져 있었다.
  아마 큰 언니가 대학교 3학년이 되는 해,  둘째언니가 대학 1학년, 셋째언니가 고2, 내가 중 1, 동생들 둘이 초등학생쯤 되는 때 이거나
  남동생 강지가 대학을 가는 해이거나 혹은 아버지가 직장에서 정년을 맞는 해이거나, 그런 경우는 붉은 펜으로 강조가 되어 있었다.
  "이 때는 우리 집에서 돈이 제일 많이 들어가는 해다. 내가 젤 열심히 일해야 한다."
  "위에 딸들은 어찌 내 힘으로 대학까지 보낼 수 있을지 모르나, 아래 두 녀석은 내가 나이가 들어 학교 공부를 다 책임지지 못할 수도 있다.
   큰 아~ 니(큰 언니)가 강지, 대학을 책임지고, 둘째 니(작은 언니)가 현아 대학을 책임지라. "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가면 느거 좋고, 혹시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못가면 돈 안들어서 내 좋고..." 라며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아버지의 인생 설계에는 우리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대학엘 들어가는 딸, 아들이었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당시로서는 서기 2000년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아마 1999년 쯤으로 그 표는 끝났던 것 같다. 
  어린 내게는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까마득한 미래를 말씀하신 거였고, 우리 형제들은 아니 적어도 나는 미래라는 걸 가장 심도있게 고민했던 시간이었다.
 
  살면서 나는 종종 아버지의 그 표를 떠올린다.
  자식을 여섯이나 부려놓은 아버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무거워하기보다는 현실적인 방도를 찾으려 했던 치밀함, 그리고 자식들에게 던져 준 '미래'라는 시간. 

 


** 술과 낚시를 사랑했던 울 아버지

   퇴근길 아버지의 손에는 늘 뭔가가 들려있었다.
   그 때 한참 유행하던 투게더 아이스크림이기도 했고, 새우깡 몇 봉지이기도 했고 혹은 빠다빵(버터빵) 이기도 했다.
   버스 정류소에서 집까지 오는 십여분 되는 길, 아버지는 그 길에 있는 가게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조롱조롱 기다리고 있는 자식들에게 줄 먹을거리를 사오셨다.
   술 한잔 걸친 채, 얼굴은 늘 붉으스레... 약간의 비틀거림...
   집으로 들어서는 아버지보다 손이 더 반가웠던 건, 손에 들려있던 아이스크림과 과자와 빵 때문이었다.
   때로는 날짜가 지나 먹지 못할 빵을 사오거나 이미 한쪽이 뭉그러져 도무지 다른 사람에게는 팔 수 없는 과일을 사들고 와서 엄마에게 쿠사리를 먹기도 했지만
   (빵집 아줌마나 과일가게 아줌마가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를 속이고 팔아넘긴 못된 빵이며 못된 과일들.. ㅋㅋ)
   술 한잔 걸친 아버지의 퇴근 길이 빈 손이셨던 적은 거의 없었다.
   돌아가시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매일 한병씩 소주를 드시던 호기있던 울 아버지.
   외식이든 집밥이든 아무리 거나한 상차림에도 술이 없으면 "뭐, 빠진 거 없냐?"며 은근 보채던 울 아버지...
   ( 아버지가 일흔을 넘기고 나서는 딸이며 아들, 어느 누구도 아버지의 술을 말리지 않았다.
    건강을 생각해야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술을 계속 드실 수 있는 것도 큰 복이라는 게 자식들의 생각이었다.
    그 덕에 아버지는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시고 돌아가신 마지막 3주일을 빼고,  평생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다시던 시원 블루를 하루에 한병씩은 드셨다.
    그래서 참 고맙다.)

 

   바다를 사랑했던 울 아버지. 낚시를 사랑했던 울 아버지.
   토요일, 일요일 조선 천지 섬으로, 바닷가로 돌아다니시며 고기를 낚아서 회를 치고 술한잔을 걸치고...
   때로 큰 고기를 잡으시면 손수 먹을 갈아 뜬 엉성한 고기 탁본이 우리집 응접실의 한 벽을 가득 채우기도 했다.  
   낚시를 갔다 온 아버지는 엄마의 짜증에 아랑곳하지 않고 낚시도구와 고기들을 아무렇게나 널부러놓고 개운하게 목욕을 한 뒤에는 꼭 풍금에 앉으셨다.
   (그게 나중에는 피아노가 됐지만... 아버지는 풍금이 훨씬 더 어울렸다. 멋있었다. )
  
   그리고 노래 한 자락~~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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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6월 24일 생.  김 진자 만자, 울 아버지!
소풍 나온 이 세상! 멋지게 사시다가 2015년 4월 11일 향년 88세로 귀천하셨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딸이어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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