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지금은 여행중 /또 여행을 준비하며

고추와 방앗잎

프리 김앤리 2010. 5. 20. 19:00

가만 생각하면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다.

우선 항공권도 발권해야 하고, 미국 캐나다의 각종 패스도 사둬야 한다.

미국 캐나다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행가서 혹시 말썽을 부릴지도 모르니 칫과치료도 말끔히 해야 한다.

잇몸이 부실해졌다며 맨 안쪽에 있는 아랫이빨이 약간 흔들거리는 것 같은데

남의 속도 모르는 의사선생님은 며칠 더 기다려보고 정 안되면 그냥 빼잔다.

언젠가 윗쪽에 새로난 사랑니를 빼고 피가 멈추지 않아 엄청 고생했는데

채 3주일도 남지 않은 지금 이빨 하나를 덜커덩 뽑아야 된다는 생각이 날 두렵게 만든다. 

병원에 가서 몇개월 동안 먹어야 하는 약도 받아두어야 한다.

 

눈이 더 나빠졌는지 도수가 맞지 않은 안경도 새로 맞추어야 할 것 같고

7~8년을 신고 다니던 트레킹화가 앞 뒤 사방으로 다 떨어져 지난번 여행에서 돌아오자 마자 미련없이 버렸는데

그것 처럼 편안하고 튼튼한 트레킹화도 하나 장만해야 한다.

어여 빨리 장만을 해서 좀 신고 다녀야 내 발에 익을텐데...

싼 숙소를 찾아다니는 우리로서는 지난번처럼 오리털 침낭 하나로만 버티기에 다가올 가을의 추위가 너무 두려워

침낭도 하나 더 사야 하고,

7~8년 이상 동안 세상 구석구석을 나와 함께 여행하던 끌낭을 교체할 시기도 드디어 다가왔다.

어디가서 그 놈처럼 튼튼하고 싼 배낭을 구할 수 있을런지.

 

가장 아끼는 후배가 나서있는 선거 사무실에 가서 자원봉사도 해야 하는데...

주말에는 봉하에도 가야 할 것같고, 부산대에서 있을 추모공연도 가야할 것 같고...

한참동안이나 비워둬야 할 사무실에서의 일 정리도 산더미 같다.

 

또 6개월 정도는 주인없이 버림받을 우리 집 살림살이도 정리해야 한다.

한여름 습기찬 바닷바람이 우리 옷장을 습격할지도 모르니  옷도 다시 개벼서 차곡차곡 정리하고

곰팡이 슬지 마라고, 습기 차지 마라고 팡이제로다 물먹는 하마다 겹겹이 재워줘야 한다.

음식 정리도 해야 하고...

새로 이사간 집의 각종 공과금을 자동이체 신청도 해 두어야 하고...

... 도 해야 하고 ...

... 도 해야 하고 ...

작년 1년간의 여행을 준비하면서

정작 여행 그자체보다 더 힘들었던 준비기간의 기억이 내 머리를 할퀸다.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들기까지 했던 준비과정이 있어야만

다시 우리에게 배낭 여행이라는 큰 선물이 다가올 것인가?

 

...도 해야 하고...

...도 해야 하고...

 

그런데 작년에는 갖고 있지 않았던 전혀 엉뚱한 고민이 하나 있다.

우리의 '조그만 텃밭'이다.

새로 이사 온 아파트 베란다에 조그만 텃밭이 하나 있어

장난삼아 심어놓은 고추와 방아와 깻잎, 상추, 쑥갓이 오월 햇살을 받아 뽀록뽀록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평생 처음 해 본 자체 농사다.

ㅋㅎㅎ

쓸데 없는 짓 하지 마라고, 우리 품에 고추, 깻잎이 가당키나 하냐고 기를 쓰고 반대하는 나를 제쳐두고

장모와 사위가 마음맞춰 시장에서 고추, 상추... 모종들을 사와 심어놓더니만

이 녀석들이 정말 신기하게도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조금씩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거다.

나 귀찮게 만들면 다 뽑아버릴꺼라고 큰 소리 칠때는 언제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이면 슬그머니 베란다로 나가

'오늘은 요녀석들이 얼마나 자랐나'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만 줄 뿐인데 그저 비치는 햇살 하나로 이렇코롬 생명이 자라수 있다니...

어디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올 가을에  애기 손가락만한 고추가 조롱조롱 달리는 걸 볼 수 있겠구나라는 아쉬움도 가지고

삼겹살 구워가지고 퍼뜩 베란다로 나가 쓰윽 상추를 뜯어다 씻어서 먹을 수 있겠다는 상상도 해보고...

 

그런데 다 말짱 황이다.

가을은 커녕 이제 보름정도만 지나면 저 녀석들을 우째해야 되는지...

한여름 햇살에 , 그리고 짠 바닷바람이 아파트 창문사이를 파고 들어와

그냥 제 명을 다하고야 말 것인지...

 

여행을 떠나기 전 별게 다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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