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지금은 여행중/7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차우셰스쿠의 그늘,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1

프리 김앤리 2013. 6. 25. 15:00

 

<몇 권의 책 그리고 차우셰스쿠>

...

하지만 1980년대 들어와 차우셰스쿠 정권은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경제성과 실효성이 떨어진 대규모 건설 및 프로젝트를 단행하면서

국민들을 강제 동원하기 시작하는 데, 인민 궁전 건설, 다뉴브 강 수로 공사와 지하철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 공사들을 들 수 있다.

무리한 투자에 이어 급진적 공업 노선 정책으로 인한 국가 부채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였고,

무엇보다도 서방 국가들로부터 무계획적으로 받아들인 대외채무의 급증은 1980년대 루마니아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1980년대 동안 차우셰스쿠는 대외 부채를 줄이기 위해 농산물을 비롯해 공업 생산품의 대량 수출을 지시하였고

이것은 전기와 가스의 부족을 비롯해 루마니아에서 심각한 식량난을 수반하게 되었다.

수출 확대를 통해, 부채 감소등 비록 외형적인 성장은 보였지만

실제 1980년대 동안 루마니아인들의 일상적인 경제 사정과 질은 가파를 속도로 낮아져 갔으며,

이에 따른 민줄들의 불만들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차우셰스쿠는 이러한 불만들을 강력한 통치와 더불어 비밀 경찰 및 보위 부대의 탄압으로 억압하려 하였다.

...                                                                                           김철민 지음  『역사와 인물로 동유럽 들여다보기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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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이 저물어 가던 무렵... 부쿠레슈티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자유화 이후 프라하나 부다페스트로 몇번이나 여행을 했지만, 부쿠래슈타눈 초행이었다.

그 옛날 '동구의 파리'라고 불리던 풍취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황폐한 시가지 모습에 덧붙여 오가는 사람들의 공허한 표정,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이 차분하지 못한 눈동자에 충격을 받았다.

그 눈동자에서는 독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은 데 대한 기쁨이나 희망 같은 것을 읽을 수가 없었다.

시가지도 사람들도 아직 차우셰스쿠 충격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프랑스 숭배자이던 차우셰스쿠는 구시가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쫓아내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한 후

파리 시가지의 복사판을 만들려 했다. 그 토목공사에는 시민들을 헐벗게 한 댓가로 대량 수출해 번 동능 쳐들였다.

그렇게 닦은 그 대로의 이름은 당연히 '샹젤리제'.

그러나 완성도 보지 못한 채 스러진 차우셰스쿠의 운명과 함께, 세기의 토목 사업도 좌절되고 말았다.

그것은 이미 6년 전일텐데, 시가지는 아직도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도니 순간이 그대로 냉동 보존된 채 였다.

무너진 건물더미는 아직도 치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고, 당장이라도 넘어질 듯한 오래도니 건물이며

거대한 철근 콘크리트 건물군이 짓다 만 채로 내동댕이 쳐져 있었다.

...                                                                                           요네하라 마리 지음 『프라하의 소녀시대』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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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차우셰스쿠를 처형한 것이 아니라

대문을 활짝 연 다음 국외로 도망가기 위해 그를 죽인 것이다.

수십만 명의 루마니아 인들이 유럽의 다른 나라로 물밀 듯이 스며들었다.

자기들의 조국에서는 민주주의나 번영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민을 간 것이다.

...                                                                                     에드워드 베르 지음 『차우셰스쿠, 악마의 손에 키스를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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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의 방문으로부터도 12년이 더 지난 루마니아의 샹젤리제는 차우셰스쿠의 어처구니 없는 만행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아주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대로와 그 사이를 이루는 인공 호수를 중심으로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룬다는 이 거리는

활력도 숨쉬는 느낌도 없는 죽은 거리였다. ... 

편집증이라 해도 좋을 집착과 광기가 느껴지는 거리, 이 거리의 절정은 끄트머리에 우두커니 자리한 인민궁전이었다.

(차우셰스쿠 사후, 의회 궁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인민궁전은 보지 않으려고 아무리 피해봐야 어쩔 수 없이 보게되는

거대하고 역겨운 건물이었다.

차우셰스쿠 시절, "이 곳 대연회홀에서 연회가 열리면 그 조명 때문에 부쿠레슈티 시의 절반이 정정이 되어버렸다"는

미국 펜타곤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크다는, '차우셰스쿠의 집'이었다.

그는 이 궁전을 1984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터를 잡기 위해 부쿠레슈티의 육분의 일을 밀어버렸다.

...                                                                                      이정흠 지음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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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셰스쿠가 만든 궁전이고, 결국 그를 무너뜨린 궁전이기에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아까부터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차우셰스쿠에 대한 빈정거림이 역력하다.

그리고 여러나라에서 온 (물론 루마니아 사람들도 있었다) 관광객들도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픽픽대며 웃고 있었다.

차우셰스쿠는 완전 '조롱거리'였다.

마음놓고 조롱하고 얼마든지 희롱해도 되는 죽은 독재자였다.

차우셰스쿠는 마음껏 놀려도 무리가 없겠지만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의 절절한 심정과 그 때 독재를 무너뜨린 준엄한 심판까지

차우셰스쿠에 묻혀 함께 조롱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                                                                                             김승란 지음 『지구와 연애하는 법 1 』에서

 

 

차우셰스쿠가 짓고 차우셰스쿠를 무너뜨린 인민 궁정과 일명 샹젤리제 거리.

지금은 동맹거리라고 불리운다.

거리의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고급 주택가에는 당 간부들이나 고위 관료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전세계에서 미국의 펜타곤 다음으로 크다는 화려한 궁전.

 

그 길의 끝에는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와 같이 개선문이 서 있다.

 

이렇게.....                                                                                                                 <2013년 7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여행준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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