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지금은 여행중 /11월 크로아티아

[옮김] 사라예보의 한 발의 총성과 제 1차 세계대전

프리 김앤리 2014. 10. 16. 17:00

<투어야여행사 단체 배낭 11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준비 3>

 

 

총성이 울린 당일, 1914년 6월 28일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이야기되는 사라예보 사건은 당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 중대한 사건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여러 가지 설명하기 힘든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운명의 날인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 헝가리 이중 제국의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이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 시를 방문하였다.

방문의 목적은 전체 오스트리아군의 검열관을 겸임하고 있던 페르디난트가 이 지역에서 진행된 오스트리아군의 여름 훈련을 검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6월 28일은 세르비아 인들의 경축일이었다.

그것도 1389년에 슬라브족이 코소보에서 투르크족에게 패배하고 500년 이상 받아 온 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1913년 6월 28일, 슬라브 인들이 발칸 지역에서 투르크 인들을 몰아 낸 것을 최초로 기념하려고 한 바로 그 날,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사라예보를 방문한 것이다.

이미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침략에 대항하여 다양한 형태로 민족적 단결을 주장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검은 손'이라고 알려진 '통일 아니면 죽음'이라는 비밀 결사 단체가 세르비아의 정보부 장교들을 중심으로 1911년에 결성되었다.

이들은 세르비아의 통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따라서, 세르비아의 통일을 방해하는 오스트리아는 제1의 증오의 대상이었고,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이들의 암살 목표 1순위였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암살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고위 정부 관리나 군 지도부로 그들의 암살 대상을 확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한 것이다.

실제로 암살단의 최초 계획은 실패하였다.

사라예보 역에서 시청으로 이동하는 황태자 일행의 차량 행렬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황태자 부부가 탄 차량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문제는 행사를 마친 황태자가 부상자들을 문병하겠다고 하면서 발생하였다.

황태자 부부가 병원으로 향해 출발한 시각에 오전의 암살 시도에 가담하였으나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그 부근을 배회하고 있던 19세의 프린시프(1895~1918)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암살자의 권총에 맞은 황태자비는 현장에서 즉사하였고, 황태자는 병원으로 가던 도중 사망하였다.

황태자 부부의 부주의와 무능력한 경호 책임자의 과신이 빚어 낸 비극이었다.

 

사라예보 시청을 나서는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다. (네이버에서 옮김)

 

 

그 날 이후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

 

페르디난트 부부의 암살 사건은 오스트리아 정부 내에서 세르비아의 병합을 주장하던 강경파가 목소리를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공식적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다짐하였다.

....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분쟁은 단순히 두 국가 사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두 국가가 전쟁을 벌일 경우 범슬라브주의의 맹주로 자처하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며,

이것은 다시 양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국가들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 상황도 이와 같이 진행되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외교력을 동원하여 독일 정부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7월의 첫 주간을 소비하였다.

긴박한 외교전 끝에 독일의 오스트리아 지지가 분명해졌다.

7월 5일에 오스트리아 대사를 만난 빌헬름 2세는 독일 정부가 오스트리아 정부의 어떠한 조치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것임을 확언하였다.

다음날, 베를린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는 본국 정부에 독일 황제와 수상이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강경 조치에 전폭적인 지원을 할 것이라고

확신에 찬 보고를 할 수 있었다.

...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 포고하였다.

다음날 영국 외상 그레이경의 중재 노력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자, 30일에 슬라브 형제국을 돕기 위해 러시아가 전군 동원령을 발동하였다.

러시아의 동원령에 대해 독일이 다음날 러시아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선전 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8월 1일에 프랑스가 전군 동원령을 발동하자, 독일에서도 동원령이 내려졌다.

다음날 독일은 벨기에에 대해 독일군의 통과를 요구하고, 3일에 프랑스에 선전 포고하였다.

루마니아와 오스만 제국은 일단 중립을 선언하고, 형세를 관망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독일군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략하자, 8월 4일에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면서 유럽의 모든 열강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세르비아에서 한 민족주의 청년이 쏜 몇 발의 총탄이 전 유럽의 민족주의를 광기로 몰아넣은 것이다.

유럽의 6대 열강이 맺고 있던 삼국 협상과 삼국 동맹 체제에서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서로 동맹국을 돕기 위해 전쟁에 돌입하였다.

빌헬름 2세 즉위 이후, 프랑스 · 러시아 · 영국의 3대 강국에 의해 포위된 독일에서도 정치적 · 이념적 · 사회적 성격에 상관 없이 민족주의의 열기가 전국을 휩쓸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전쟁의 광기로 휩싸였고, 누구도 패배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청년들이 자진하여 입대하고 여론이 전쟁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자,

세계 노동자의 협력으로 전쟁을 막자고 주장하던 사회 민주당도 제국의 전쟁을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국가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의 일원으로서 계급 투쟁을 일시 중단하고,

정부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 의회에서 50억 마르크에 달하는 전쟁 예산을 승인하였다.

....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옮김>

 

제 1 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의 총성이 울렸던 라틴 브릿지. 

바로 앞에는 당시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