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지금은 여행중 /11월 크로아티아

사라예보 에세이 '살아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프리 김앤리 2014. 10. 16. 15:46

<투어야여행사 단체 배낭 11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준비 1>

 

 

 

 

 

꼭 5년 만에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를 다시 간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정말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

그 뒤 크로아티아를 몇 번 더 갈때마다 아쉬웠던 곳, 사라예보.

슬픔과 감동이 함께 있던 도시, 사라예보.

이번 11월 나는 그곳으로 다시 간다.

 

그때처럼 꼭 11월,

그때처럼 비가 퍼부을란지....

그때처럼 추울란지..

그때처럼 슬프면서도 또 아름다울란지...

 

사  · 라  · 예  · 보!

 

 

 

 

 

내 책, 『지구와 연애하는 법』에서 사라예보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지구와 연애하는 법』

  김승란, 이호철 지음

  2012년 7월 출판

 

 

 

 

 

 

 

    <살아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 보스니아 사라예보

 

1992년 4월부터 1995년 10월까지 3년 7개월 동안 유고 연방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 군대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완전 포위한 채 도로를 막고 물과 전기, 음식, 난방시설 등 모든 것을 차단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사라예보에 폭탄을 퍼부었다. 1991년 10월에 있은 유고연방으로부터의 보스니아 독립 선언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보스니아의 독립 선언은 보스니아 내의 무슬림 세력(보스니악)과 크로아티아 계가 힘을 합쳤던 결과이다.

1992년 2월과 3월에 독립 찬반투표가 이루어졌지만 보스니아 내의 또 다른 세력인 세르비아계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 군대는 사라예보 시내로 폭탄을 퍼부었고 소위 인종 청소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 내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계에도 시련은 닥쳐왔다. 보스니악과 크로아티아계는 그들을 도시 밖으로 추방했다.

어제까지 이웃으로 함께 살던 이들이 보스니악(무슬림), 크로아티아계(기독교), 세르비아계(정교회)로 나눠져서

서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죽고 죽이는 일상이 진행되었다.

3년 반 동안 외부로부터 차단된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나갔고 폭격에 생명을 잃었다.

일만 이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5만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 보스니아 내전에 대하여-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는 SA 호스텔에 묵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의 반응이 가장 좋았던 곳이라 무작정 찾아간 곳이다.

다행히 우리가 하루 밤 머물 수 있는 침대는 남아있었다. SA 호스텔은 가족이 운영하는 민박집 같은 곳이다.

성수기도 아닌 이 계절에 옥탑방 처럼 생긴 호스텔의 3층 거실에는 세계 곳곳에서 온 여행자들로 가득 찼다.

 

밤늦도록 여행자들과 가족들이 함게 사라예보 이야기를 하던 중에 주인 아저씨가 자기 집에도 폭탄이 떨어졌다며 그때 집으로 떨어진 폭탄 조각을 보여준다.

아무일 없었냐고, 아저씨 율리아 아줌마 그리고 지금은 건장한 청년이 된 아들 아리안까지 가족들이 다치지는 않았냐고 조심스레 물어본다.

그 때는 지하에 대피하고 있어서 아무 일 없었단다. 그 이후로는 쭉 지하에서 살았냐는 질문에 주인 아저씨의 눈빛이 흐려진다.

 

  "이해할 수 있겠어요? 3년 7개월이란 세월이 얼마나 긴 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처음 얼마동안은 지하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살았단다.

그러던 어느날 그냥 2층 방으로 올라와 버렸다.

바로 어제 저녁 우리가 잔 그 방이라고 일러준다.

자기 가족은 다 무사했지만 일가친척들 중에 남자라고는 아저씨와 아들 단 두명만이

이 전쟁에서 살아 남았다.

아저씨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한스럽게 때린다.

 

  "살아있는 거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그냥 올라와 버렸습니다.

   어디에서 살고 있으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참혹하게 변하는 아저씨의 얼굴과 가슴을 때리는 아저씨의 손길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 때 아리안은 아주 어렸는데 먹이는 거리고는 풀(율리아 아줌마의 표현에 의하면 flowers였다)을 뜯어다 만든 풀죽 밖에 없었다고 한다.

말을 하는 율리아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다.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전쟁 기간 동안 보스니아가 어떻게 포위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무장한 군대와 탱크와 총이 사방에서 사라예보를 겨누고 있었다. 포스터를 가리키며 아저씨가 말한다.

 

  "우리는 지난 시절 이렇게 살았어요. 여기서 이렇게 살아 남았습니다. "

 

고맙습니다.

살아 남아줘서 고맙습니다. 그 혹독한 세월을 살아 남아 이렇게 우리를 다시 맞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사라예보는 한때 '유럽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작은 도시 안에 기독교, 이슬람교, 정교회, 그리고 유대교까지 각각의 전당을 짓고 각자의 자기 믿음을 충실히 지키던 조화로운 곳이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심에 이슬람 사원, 기독교 교회, 유대교 예배당, 정교회 성당의 네개 종교 건물이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나면서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으로 변해 버렸다.

다른 종교가 서로를 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전쟁이 서로를 적으로 만들었다. 

누가 권력의 중심을 잡느냐는 암투에서 서로 다른 종교과 다른 민족을 이용했을 뿐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나의 종교가 무엇인가'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는 사람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적으로 몰아세웠다.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광기 앞에서 이성을 잃은 것이다.

 

사라예보의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는 곳곳에서 내전의 상처를 발견했다.

총탄 자국이 무수히 남아있는 건물과 내전동안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이 자나가는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저격하였다는 저격수의 길(Sniper's Alley)과

당시 죽어간 사람들의 공동 묘지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길바닥에 처연하게 피어 있다는 '사라예보의 장미'를 찾아다녔다.

 

 

'사라예보의 장미'란 도심 바닥 곳곳에 칠해 놓은 붉은 페인트다.

포위기간 동안 사라예보에 퍼부어진 포탄에 맞아 사람들의 피가

콘크리트 바닥에 붉은 장미 꽃잎처럼 흩날렸다고 해서

그 흔적을 붉은 페인트로 칠해놓고 그렇게 부른다.

 

콘크리트 바닥에 마치 붉은 꽃이 피어 있는 것 같다고 했는데

비가 오는 사라예보의 거리 바닥에서 붉은 장미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날은 찾지 못하고 저녁때 호스텔 가족들에게 어디로 가면

'사라예보의 장미'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 왜 못 찾았죠? 사라예보의 온 거리에 붉은 장미가 피어 있는데..."

 

피어있다........... 온 거리에........... 붉은 장미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지금 사라예보에서 찾고 다니는 게 도대체 뭘까?

어디에서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었는지, 그 다리는 어디에 있는지,

포탄의 흔적과 총알 자국이 선명한 건물은 어디에 있는지,

저격수의 거리라는 게 사라예보의 장미라는 게 도채체 어떻게 생겼다는 것인지

아직도 서로 할퀴고 싸우고 있는 건 어디 없는지를 찾아다니고 있는 우리가 보였다.

살아 남아줘서 고맙다는 증거를 찾아야 하는 의무라도 있는 양 모진 세월의 흔적을 찾고 있는 우리가 보였다.

어쩌면 이 곳 사람들은 기억하기도 싫고 잊어버리고 살고 싶은 데,

잠깐 여행 나온 우리들이 '역사' 운운하며 때로는 알량한 동점심까지 보이면서 그들의 상처를 헤집고 후벼파고 다니는 게 아닌 지 부끄러웠다.

 

그러고보니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로 오는 길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도도히 흐르는 네레트바 강과 험준한 산의 비경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사라예보 바차르시야 거리를 걸으면서 베트남믜 매력적인 도시 호이안에 와 있다는 생각도 했고,

중국의 소담한 마을 양수오에 와 있는게 아닐가 하는 착각도 했다.

지붕 낮은 기와집들과 줄지어 늘어서 있는 조그마한 가게들, 앙증맞은 돌길과 이슬람 음식의 묘한 향기,

갈가에 만들어진 소박한 카페에서 마시는 진한 터키식 커피..

평화로웠다. 마음이 편한했다.

 

  ' 아!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구나.

    전쟁 이전에도 그리고 전쟁 이후에도 이렇게 아담한 집과 소박한 거리에서 정겹게 살고 있었구나.

    이 거리를 따라 이슬람 사원도 있고 교회도 있고 정교회 건물도 있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존중하며 이렇게 살아왔구나.'

 

사라예보를 유유히 흐르고 있는 밀랴츠카 강으로 다시 나갔다.

 

낡은 고전의 뻔한 레포토리에서는 늘 이렇게 말하곤 한다.

흐르는 저 강물은 이 도시의 역사를 모두 다 기억한다고.

사라예보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으로 일차대전이 시작되었고,

20세기의 끝자락에는 도심 전체에 포탄이 퍼부어지는 내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사라예보의 저 강물은 똑똑히 다 기억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 흐르고 있는 사라예보의 이 강은 할퀴고 물어 뜯던 아픈 상처의

기억보다는 서로가 어울려 함께 살아왔던 지난 평화의 시대를

더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이 오히려 진짜 뻔한 레퍼토리가 아닐까.

 

지금 이 도시의 사람들은 지난 아픔은 다 보듬고 새로운 공존의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음을 보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살아있어 주셔서, 이렇게 살고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다시 한번 오고 싶은 곳입니다. 사라예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