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지금은 여행중 /11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라예보 Top 9'

프리 김앤리 2014. 10. 17. 11:00

<투어야여행사 단체 배낭 11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준비 4>

 

1. Baščaršija(바슈카르지아)

   사라예보의 올드 타운,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중심거리다.

    Baščaršija(바슈카르지아)는 마켓이라는 뜻.

   상점, 까페, 식당 등 16세기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Sarači Street,  Kazandžiluk Street, Gazi Husrev Bey's Street 어느 거리 할 것 없이 모두 매력적인 곳이다.

    바슈카르지아의 중심은 비둘기 광장이라 불리는 세빌리 광장.

   여기에 있는 샘터에서 물을 마시면 다시 사라예보로 돌아온다는 전설이 있다.  

 

   

 

 

2. 라틴 브릿지 & 역사 박물관  

   세계 제 1차 대전의 시발점이 된 한 발의 총성이 울린 곳.

   1914년 이 다리에서 세르비아계의 청년이 쏜 총에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고 1차 대전이 시작되었다.

   라틴 브릿지 옆에는 그 날의 상황을 자세하게 기술해놓은 박물관이 있다.

 

 

3~6. 네 개의 종교

  사라예보는 유럽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네 개의 종교 (기독교, 이슬람, 정교회, 유대교)가 한데 어울려 각자의 믿음을 지키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곳이었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나의 종교가 무엇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믿음을 지켜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전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민족간 갈등과 종교간 갈등을 노골화 시켰다.

  평화를 되찾은 지금, 사라예보의 작은 거리 안에는 네 개 종교의 사원이 서로 마주보며 그리고 나란히 함께 서 있다.  

 

  *** 사라예보를 '유럽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까닭

       - 전 세계에서 네 개의 종교 예배당을 한꺼번에 품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과 사라예보 뿐.

 

 

 

 

 

7. 생명의 터널 & 터널 박물관

  유고 연방으로 부터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직후, 연방의 중심세력이었던 세르비아 군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포위했다.

  1992년 4월의 일이다.

  사라예보를 포위한 군대는 도로를 차단하고 전화, 전기, 난방 등의 공급원을 모두 끊어버리고 심지어 음식과 물의 공급도 차단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사라예보 시내를 폭격했다.

  사라예보 시민들은 폭격이 쏟아지는 시내에서 굶주림과 추위, 두려움에 떨었다. 이 폭격으로 1만 2천명 이상이 죽어나갔고 5만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포위가 시작된 이듬해, 보스니아 군인들과 자원 봉사자들이 힘을 합해 사라예보의 이웃 도시 부트미르와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1월부터 시작해 6개월 후인 7월, 800m 길이에 1.5m 넓이의 터널이 마침내 열렸다. 이 터널을 통하여 사라예보 시민들에게 음식이 전달되고 생필품이 전달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이 터널을 '생명의 터널'이요, '희망의 터널'이었다. 

 

 

 

8. 저격수의 거리 (Sniper's Alley)

 사라예보를 포위한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외부와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봉쇄작전 뿐만 아니라 사라예보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무차별 사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명목은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악들의 완전 소탕이었다.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은 인근 고층 빌딩이나 산악지대에 숨어 지나가는 시민들을 조준 사격했다.

 3년여 내전 동안 이곳에서 자행된 저격으로 1030명이 다쳤고, 225명이 숨졌으며 이 중 60명이 어린이란 통계도 있다.

 ‘저격수 주의’란 경고문이 곳곳에 붙어있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거리렸다. 

 폭격이 쏟아지고 정 조준 사격이 자행되는 거리였지만 사라예보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물을 구하기 위해... 살기 위해 다녀야 했던 거리였다.

 스나이퍼 거리에 있던 홀리데이 인 호텔은 당시 서방 세계의 기자들이 상주하면서 사라예보의 상황을 외부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물론 홀리데이 인 반경 500m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 기록했을 뿐 다른 곳은 외면했다는,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

 

  관련 기사 : 폭탄이 쏟아진 사라예보에서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연주를 했던 한 첼리스트의 실화

                  절망의 전장에서 인간다움을 지킨다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http://blog.daum.net/freeleeandkim/1374

 

 

9. 사라예보의 장미

   내전 당시 사라예보에 퍼부어진 포탄으로 인해 길 바닥은 움푹 패어지고 포탄을 맞은 사람들의 피가 사방으로 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라예보 사람들은 당시 포탄이 떨어졌던 자리를 붉게 칠해놓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장미꽃이 피어있는 모습 같다고

   '사라예보의 장미'라고 부른다. 사라예보 거리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참고: 사라예보 여행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