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지금은 여행중 /6월 코카서스

The best thing about the city is the people! 아르메니아 예레반

프리 김앤리 2016. 5. 9. 13:10

론니 플래닛의 한 구절

 'The best thing about the city is the people!'


너도바람님 블로그의 한 구절

  '코카서스 아르메니아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쌈빡하다. 게다가 신비롭고 잘생겼다.

  사실 아르메니아를 여행중일 때 친절하단 생각은 했지만 새록새록 아르메니아를 그리워하며 그곳 사람들에게 열광하게 될줄은 몰랐다.

  대부분의 코카서스 지방 여행자들에게 아르메니아는 하루 이틀쯤 머물며 <조지아>에 가기 위한 길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연 경관으로 치자면 카즈베기와 오말로, 다비드 가레자를 가진 조지아에 아르메니아가 비교 대상이 안된다.

  하지만 사람은 아르메니아다.'
  http://blog.ohmynews.com/nedobaram/180781



'선입견'은 여행자의 자유로운 사고를 마비시킨다.

권삼윤의 책 '두브로브니크는 그날도 눈부셨다'라는 제목때문에 눈부신 두브로브니크를 찾느라 참 많이 헤맸다.

 (해가 비치지 않아도, 비가 와서 대리석이 빛나지 않아도 두브로브니크는 눈부셨다.)

배낭여행자의 블랙홀이라는 방콕에서는 도대체 무엇이 이 곳을 블랙홀로 만드는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그 때 내 머리가 복잡했던 건 나의 헤맴때문이 아니라 혼돈과 무질서와 매연, 악악대는 사람들, 바로 방콕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

아름답고 장엄하고 친절하고 혹은 사기를 잘치고 정신이 없고 나른하더라, 볼게 하나도 없더라 등등.

먼저 다녀온 다른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는 그 곳을 상상하고 예단한다. 낯선 곳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선입견!  때로는 가장 큰 맹점이 될 수도 있다.

여행자 자신의 눈으로 낯선 곳을 바라보고 온전히 자신의 느낌으로 그 곳을 떠안아야되는데 자꾸 확인하고 검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의 낭패감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찾는 이유는??? 불안감이라고 해두자. 혹은 효율성이라고 해두자.

아무것도 모른 채 무턱대고 떠나자니 불안하고, 언제 다시 올수 있을까, 갈 때 가장 효율적으로 보면 좋지않을까 하는 생각.

선입견이 가장 큰 맹점인줄 알면서도 매번 저지르는 부지런함이다!!!


스스로 자제하지만 성공 확률 90%가 넘는 예단도 있다.

너도바람이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 건, 고작 두 번! 다 합쳐봐야 몇시간도 안된다.

그런데 여행에 관한 한 나는 절대적으로 그를 신뢰한다. 그의 느낌이 매번 나의 느낌이었으니...

코카서스 여행을 준비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서울까지 가서 그를 만나는 거였다.

대학로에서의 몇 시간. 과외공부하듯 하나하나 일러주는 그의 경로가 가슴에 와 박혔고 나의 여행을 덩달아 기뻐하는 그를 보며 즐거웠다.

조지아는 자연이 좋고, 아르메니아는 사람이 좋다는 그의 말! 믿는다.

게다가 론니플래닛까지 한 술 더 뜨니 완전 믿는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면 캬~~~ 그야말로 여행이다.

당신과 나의 여행이 달라야하듯이 말이다!!



예레반(Yerevan)

예레반이라는 말은  예레바츠(찾아내다)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홍수를 맞아 배를 타고 떠난 노아가 최초로 육지를 발견하고 '예레바츠(찾았다)' 라고 외친 땅, 그 때 노아의 방주가 걸린 산이

아라랏산이다. 다른 기원으로는 예레부니(승리)에서 왔다고도 한다.


예레반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하는 역사는 BC 782년까지 돌아간다.  

 실크로드 시절에는 유럽과 인도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지로 번성했던 곳.

 그러나 지리상의 위치로  1828년 러시아 합병 이전 까지는 오스만투르크와 페르시아 제국, 러시아 제국까지 끊임없는 침공과 지배를

 받아온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20년에 들어서 소련의 도시계획이 적용된 첫 도시로 지금과 같은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의 설계로 이루어진 현대도시 예레반은 중심지가 둥근 원형의 도시로 도시 어느 곳에서도 아르메니아인의

 영산인 아라랏산이 보이도록 만들어졌다.  



공화국광장(Republic Square, mashtots & Khandjianpoghots)

예레반의 중심.

광장 주변으로  국립미술관, 아르메니아 역사박물관과 정부청사, 국토관리부, 외부성, 아르메니아 중앙우체국등

화려한 석조건물들이 있다.  건물들은 모두 붉은 기운을 띄고 있는 응회암으로 지어져서 매우 아름다운데 예레반을 일명 '장미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 응회암 때문이다.

밤 9시부터는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으며 화려한 분수쇼가 벌어진다.


캐스캐이드 (Cascade, Kaskad)

예레반 도시 전체의 뷰와 멀리 아라랏산의 전망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곳.

1980년대 말 착공하여 디아스포라의 후손들이 성금을 내 2002년에 완공한 미술관이다.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된 내부에는 아르메니아의 역사와 문화를 알수 있는 각종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정원에서는 세계적인 대가들의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다.

캐스캐이드의 입구에는 예레반 도시를 설계한 알렉산더 타마니안의 동상이 보인다.

꼭대기에는 소련연발 가입 50주년 기념탑.


음수대 (Yerevan Drunking Fountain)

예베반 시내 곳곳에서 만나는 음수대,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물맛도 좋다고...

그런데 Giardia라는 박테리아를 포함하고 있는 물이라 평소에 이 물을 먹지 않는 사람은 마시지 않는게 좋단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추모공원(Tsitsernakaberd, Museum of the Armenian Genocide)


아르메니아 대학살

1. 사건 개요

1) 역사적 배경
 11세기 무렵 오스만 제국의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가 아나톨리아(Anatolia) 반도(현재 터키의 대부분의 영토)를 정복하면서 소수파인

 무슬림이 다수파인 기독교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2000년간 그리스 문명의 요람이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은 301년 세계 최초

 로 기독교를 국교(아르메니아 정교)로 지정하였다. 아나톨리아를 이슬람으로 강제 개종시킨 후에도 무슬림은 여전히 소수파로 남아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은 근본적인 국가조직의 불안정을 우려하였다.

2) 제1의 학살(1894년~1996년)
 1894년, 아나톨리아 반도에 거주하던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 간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여 아르메니아인 2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양국 간 충돌 사건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으며, 이에 대해 유럽 국가들은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강경 대응을

 비판하였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3국은 공동으로 오스만 제국에 아나톨리아 동부의 행정개혁안을 제시하였으며, 이를 이행할 것을 통보하였다.

 1896년에는 아르메니아인들로 구성된 혁명조직이 이스탄불(Istanbul)의 오스만 은행을 습격·점령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무슬림-아르메니아인

 간 충돌이 재연되었다.

3) 제2의 학살(1915년~1918년)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Genocide)’은 흔히 제2의 학살을 일컫는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통치자들의 압제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게릴라 활동으로 무슬림 촌락이 습격을 당하고 주민들이 살해당하였다. 아울러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자 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 군대에 가담하였다. 이에 1915년 4월부터 오스만 제국은 아르메니아 남자들을 학살하기 위해 18세~50세 남자들을 모두 강제 징집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군사훈련 및 공사현장에 동원된 후 집단 사살되거나 과중한 노동 및 질병, 기아 등으로 사망하였다. 한편 부녀자, 노약자, 어린이들은 모두 사막으로 강제 추방되어 대부분 굶어 죽거나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희생된 수는 아르메니아 측 정부의 주장에 따르면 150만~2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터키 측은 사망 인원은 아르메니아인 30여 만 명, 터키인 수천 명이라고 주장하였다.


2. 분쟁 원인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걸쳐 자행된 오스만 제국 내의 수많은 아르메니아인 사망을 놓고 아르메니아와 터키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고 있다.

아르메니아 측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현 터키 동부 산악지역에 거주하던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집단학살 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터키 측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현 터키 동부 산악지역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적국인 러시아 군대에 가담하여 오스만 제국에 무장·저항하였으며,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인명 소실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는 인종 집단학살과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3. 관련국 입장

1)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는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사망은 오스만 제국 군대에 의한 명백한 집단학살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터키령으로 소속된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역에 대해 영토권을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터키 정부의 공식 사과와 함께 희생자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또한 터키 정부가 각국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로비스트를 고용하여 전 세계적으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2000년과 2004년 미국 하원에 상정된 ‘아르메니아 대학살’ 결의안이 터키 정부가 고용한 로비스트에 의해

좌초된 것으로 알려졌다.

2) 터키

터키 측은 아르메니아인 사망은 전시 상황 및 이주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망자 수도 과장되었으며, 공식 사과를 비롯해 책임 유무 등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다루는 언론, 언론인, 문학가 등을 국가 모독죄로 기소하는 등 강경조치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이 터키의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 가입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터키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의식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원만한 해결을 위한 터키 정부의 노력을 촉구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르메니아와 터키 간 분쟁 (아르메니아 개황, 2012. 2., 외교부)

어머니상 (Mother Armenia, Mayr Hayastan)

1967년 스탈린 동상 철거후 세워진 23m 높이의 동상 .

긴 칼을 들고 터키와의 국경을 지켜보고 서 있다.

동상의 아래는 군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