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지금은 여행중 /4월 스페인 포르투갈

마드리드(?) 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프리 김앤리 2018. 3. 14. 16:18





재미있는 이야기라 최미선 지음 『사랑한다면 스페인』에서 옮겨옵니다.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마드리드는 고도 600m가 훌쩍 넘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다. 애초 톨레도였던 수도가 1561년 마드리드로 넘어온 건 국토 한복판에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변방에 지나지 않던 마드리드가 스페인의 수도를 넘어 유럽의 심장으로 떠오르게 된 건 엄청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텔리페 2세(1529~1598) 덕분이다. 


 펠리페 2세가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아버지 카를로스 1세게에 물려받은 땅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포르투갈 왕족인 어머니로 인해 훗날 포르투갈 왕위까지 이어받자 스페인은 물론 유럽 대부분을 넘어 조상이 개척한 아메리카 신대륙의 상당 부분까지 그의 소유가 되었다. 필리핀이라는 국명도 당시 그곳을 지배하던 펠리페 2세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 그대로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이었다. 땅덩어리만 거대한 뿐 아니라 신대륙에서 건너오는 금은 보화를 포함해 모여드는재물도 엄청났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물려받은 제국이 너무나도 방대했기에 펠리페 2세는 통치 기간 대부분을 끊임없이 밀려오는 서류더미에 파묻혀 살아야 했다. 그래도 그는 땀 한방울 흘려보지 않고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빈둥빈둥 놀며 사치를 부리는 '졸부 자식' 스타일은 아니었다.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긴 이유도 업무를 효율적로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마드리드는 민원을 올려 보내는 어느 지역도 거리상 섭섭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때론 부지런함이 민폐가 되는 경우가 있다. 펠리페 2세가 그랬다. 지독한 일벌레였던 그의 별명은 '신중왕'이다. 성실하고 부지런하기는 했지만 적잖이 미련했다. 굵직굵직한 국정 현안이야 왕이 처리하는 게 당연하지만 자질구레한 민원까지 날밤 새워가며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통에 눈이 벌겋게 충혈되기 일쑤였다. 업무 과다 탓도 있지만 너무나 심사 숙고하는 성격 탓에 결재 시기를 놓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사실 '신중왕'이란 별명도 결정을 내려한 시점메 미적거리는 우유부단함을 비꼰 것이기도 하다. 


 밤샘한다고 시험 잘 보는게 아니듯 보고 또 봐도 문서의 햇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왕은 고심끝에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다. 문서의 요지만 정리하는 팀, 그걸 검토하는 팀, '긴급 현안'을 우선 보고하는 팀, 그 현안에 순서를 매기는 팀... 비슷한 업무를 세분화해 팀으로 꾸리다 보니 그 복잡한 시스템이 오히려 더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시스템에 발목이 잡혀 처리 시간은 더더욱 느려졌고 조직 간에 암투까지 벌어졌다. 1556년에 왕이 된 후 42년동안 사생활도 반납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치세 말년에 지병으로 고생하던 왕의 감독이 허술해지자 공무원들의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면서 제국의 곳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에서 솔솔 빠져나가는 재물도 만만치 않았지만 펠리페 2세가 엄청난 재산을 다 까먹고 네번이나 국가 파산을 선언한 가장 큰 원인은 종교전쟁에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봉자였던 그는 가톨릭 이외의 종교를 용납하지 않았기에 치세 기간 내내 전쟁 속에 살았다. 특히 신교도 국가이자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가 무시무시한 종교재판과 막대한 세금 징수에 항거하며 1568년부터 펼친 독립전쟁은 펠리페 2세 사후까지 무려 80년에 걸쳐 이어졌다. 그 와중에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 베네치아를 공격하자 교황이 선포한 '그들만의 성전'에 참여해 이슬람교도들을 몰아내기도 했다. 이른바 그 이름도 유명한 '레판토 해전(1571년)'이다. 그 여세를 몰아 펠리페 2세는 유럽을 넘어 세상의 왕이 되련려는 야망을 품고 신대륙에서 굴러 들어오는 엄청난 재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무적함대를 창설했다. 오늘날 스페인 축구단을 무적함대라 일컫는것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그런 가운데 잉글랜드는 여러모로 펠리페 2세의 심기를 건드렸다.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 여왕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라는 펠리페 2세의 명령 같은 권고를 뚝심있게 무시했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네덜란드를 지지했다. 게다가 악명높은 잉글랜드 해적선들이 신대륙 물자를 실어오는 스페인 상선을 약탈하는 것에 항의하자 여왕은 오히려 보란 듯이 해적들에게 훈장을 내리며 펠리페 2세의 염장을 질렀다. 

 결국 펠리페 2세는 사사건건 심기를 건드리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폐위시킬 요량으로 1588년 어마무시한 규모의 무적함대를 영불 해협에 파견했다. 결정적 요인은 그녀가 자신의 왕위를 노린 스코틀랜드의 전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한데서 비롯되었다. 메리 스튜어트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가톨릭을 옹호하는 스페인 왕으로서 좋은 구실이 된 것이다. 


  당시 스페인의 막강 화력에 비하면 잉글랜드는 새발의 피 같은 존재였기에 싸움은 한방에 가볍게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유럽의 지배자임을 과시하려는 세력 앞에서 목숨 걸고 덤비는 펀치력도 만만치 않았다. 치고 빠지는 데 능숙한 잉글랜드의 해적선은 덩치만 큰  무적 함대를 상대로 매운 맛을 톡톡히 보여주었다. 더군다는 싸움터는 잉글랜드 앞바다다. 홈팀에겐 익숙한 좁은 해협의 기상 이변도 잉글랜드의 승리에 한 몫 단단히 했다. 무적 함대 중 절반 이상이 갑작스럽게 휘몰아치는 요상한 돌풍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믿었던 무적함대의 층격적인 패배 소식에 그야말로 어이가 없던 펠리페 2세는 이런 말을 남겼단다. "적고 싸우라고 보냈지, 누가 자연과 싸우라고 했냐고~~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에 물자를 쏟아부은 왕실 곳간은 결국 텅 비고 말았다. 재정을 메우기 위해 성직자나 귀족에게 돈을 빌리면서 고리의 국채를 발행했지만 든든한 돈줄이던 신대륙의 금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대출금 상환이 불가능해지자 국가 파산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은 그렇게 서서히 '해가 지는 국가'로 몰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