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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교 사건과 시안사건

프리 김앤리 2009. 2. 18. 02:24

 

* 노구교 사건 ( 위키백과 )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사건, 盧溝橋事件, 중국에서는 7.7 사변이라고 부른다)은 1937년 7월 7일에 베이징(당시에는 베이핑(北平)이라고 불렀음) 서남쪽 방향 루거우차오(노구교, 盧溝橋)에서 일어난 발포 사건으로 일본군의 자작극이다.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과 중국 국민당 정부는 전쟁 상태로 돌입, 그 후 전선을 확대하게 되었다.


배경

1931년 일본은 중국 북동부지역인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세웠고 다음해에는 열하(热河省)를 점령하였다. 이 처럼 일본의 침략이 동북지방에 가속화되자 중국 내에서 점차 항일 운동이 확산되었으나 장제스는 먼저 공산당을 분쇄하여 통일을 이루고 난 뒤에 일본에 대항하자고 주장하며 대 공산군 토벌작전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나 중국내, 특히 동북지방에서 반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되고 1936년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키자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의 종식에 합의하고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이 다리는 전략적으로 베이징과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으로 사건발발 당시 일본군은 서쪽을, 국민당군은 동쪽을 관할하고 있었다.


사건의 전개

당시 이 부근에 주둔한 군대는 국민혁명군 쑹저위안의 29군이었고,  일본군은 카니치로 타시로가 지휘하는 중국주둔군이었다. 양 군은 서로 다리를 놓고 대치하고 잇었다.

1937년 7월 7일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중국군에게 중국 주둔지역으로 일본군을 보내 수색하겠다고 요청하였고 중국군은 거절하였다. 일본군은 전투태세에 들어가 다음날인 8일 새벽 중국군 진지에 포격을 시작하고 불시에 공격하여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양측이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11일 새벽 일단 현지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군은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국민당은 베이징 내의 모든 반일단체를 일소하고 반일활동을 중지할 것.

국민당은 7월 7일 사건의 모든 책임을 질 것.

쑹저위안 등 29군의 고위 장교들은 반드시 사과할 것.


이같은 조건을 내걸고 현지에서 협상이 벌어지는 동안 일본 본국의 제1차 고노에 내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침략을 가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이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 사용’이라고 단정하고 중국에 전면적인 파병을 발표했다.

일본군과 협상은 결렬되고 곧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였고 중국군은 연패했다.


결과

중국군은 기계화 병력인 일본군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베이징은 8월 29일에, 다음날은 톈진이 함락되었다. 이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의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 되었고 중국내 반일감정은 더욱 거세졌다. 국민당은 공산군과의 내전을 종식하고 함께 대(對)일본 항전에 들어갔다.



* 시안사건 (서안사변, 출처 : 브래태니커 )


중국 국민정부의 대원수 장제스[蔣介石]가 자신의 부하 장쉐량[張學良]에 의해 시안에서 연금된 사건(1936. 12. 12~25).

장쉐량은 중국 북서지방의 시안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군(東北軍 : 만주군)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장제스가 중국 북부를 침략한 일본군에 대항해 항일전을 전력으로 수행하지 않고 반공(反共) 내전을 지속할 방침을 세우자, 이에 반대하여 장제스를 연금했다. 장제스가 석방되고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지면서 이 사건은 끝났다.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는 새로운 반공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장쉐량의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장쉐량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는 자신들의 고향 만주땅을 수복하려는 일념에서 장쉐량의 부대는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중지, 항일을 위한 거국적인 통일전선 수립, 국민정부의 개각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장쉐량 부대의 요구조건에 전적으로 동조했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대표로 협상과정에 참여했다. 1936년 12월 25일 장제스는 이 제안에 대해 구두(口頭)로 승락한 후 석방되었다.


장제스는 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하기는 했지만, 장쉐량을 체포하여 항일전 기간 내내 연금상태에 두었다. 장쉐량은 1949년 타이완으로 끌려간 뒤에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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