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265 (12월 20일) '호섭이' 때문에 용서한다, 요르단 암만에서

프리 김앤리 2009. 12. 26. 01:04

 

요르단이란 나라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 요르단 ’

뭔가 마술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부드러운 이름에

페르시안 양탄자가 날으는 듯한 느낌이 나기도 하고

말 탄 아라비아 왕자가 어디선가 나타날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 나라.


‘이집트 사람들’ 이라고 하면 퍼뜩 삐끼, 속임수, 거짓말 같은 단어가 떠오르는 데 반해

요르단 사람들 하면 어딘지 모르게 신사적이고 귀족적일 것 같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요르단에서 먼저 들른 곳이 ‘와디럼’ 과 ‘페트라’와 같은

어떠한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모자랄 것 같았던 대단한 자연이라서

어쩌면 요르단 사람들도 그동안 내가 갖고 있던 환상이 맞아 떨어질 것이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페트라에서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으로 들어오면서 그 ‘환상’이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귀족’은 무슨... ‘신사적’은 무슨...

아라비아 왕자도 없었고, 페르시안 양탄자도 없었다.


음식 맛이 좋았던 페트라의 숙소, 발렌타인 인에서 돈만 밝히는 것 같았던 주인의 표정이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건 뭐, 숙박업소의 주인이야 원래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하여튼 대중교통을 타기가 참으로 어려운 요르단에서 -출발, 도착시간도 모른다 그러고 어디서 떠나는 지

알아내기도 굉장히 힘들었다 - 우리는 발렌타인 인 문 앞까지 와서 암만까지 데려다준다는 미니버스를 타기로 했다.

우리 숙소에서 11명의 여행자들이 그 버스를 탔는데 버스 가격은 일인당 5JD였다.

중간 중간에 현지인들이 타면서 2~3JD정도를 내는 걸 봤지만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숙소 문 앞까지 데리러도 와주었고, 또 그 정도 더 내는 거야 뭐, 애교로 봐 줄 수 있었다.

살짝, 아주 살짝 속상하기는 했지만...

 

달린다, 달린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페트라에서 암만까지의 3시간 거리를 달린다.

차창 밖으로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그냥 팍팍한 모래산, 바위산 밖에 없다.

나무도 없다, 나무를 심어보려는 노력도 안 보이는 것 같다.

이란에서는 그 넓은 사막에 물을 끌어와 나무만 많이 심어놨더니만...

이란의 도시는 나무가 어찌나 많은지 한 여름에도 도심 안에 나무 그늘만 많더만...


길 하나는 정말 잘 닦아 놓았다.

먼 옛날 대상무역을 하던 시절. 남부 아카바에서 암만을 거쳐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도 지나고 그 위로로도

계속되는 이 길이 아라비아 상인들이 다니던 이른바 왕의 도로(King's Road)였단다.

일자로 시원하게 잘 뚫려 있다.


잘 달리던 미니버스가 도로가에 잠시 정차를 한다.

버스기사가 내리고 현지인들이 내리더니 차도 한잔하고 담배도 한 대 핀다.

미니버스 안은 통로까지 우리 11명 여행자들의 배낭을 차곡차곡 쌓아놓아서 우리들은 꼼짝 못하고

버스 안에서만 기다리고 있다.

화장실도 없는 이런 곳을 휴게소라고 세워주면 무엇을 어떡하라는 말이지?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보이는 게 이제 암만에 들어온 것 같다.

버스가 선다.

어? 터미널은 아닌 것 같은데?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이. 운전기사 양반, 통로에 쌓아두었던 우리 배낭들을 밖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버스를 세운 바로 뒤로는 택시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다운타운으로 갈 꺼라고 버스 안에서 뻗대어 보지만 대책은 없다.

차비는 버스를 타자마자 이미 다 지불한 상태고. 우리 가방은 벌써 버스 밖으로 내려져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택시기사까지 올라타 한 몫 거든다.

이 버스는 암만 시내로 안가고 이제 다른 곳으로 간단다.

말도 안된다. 다른 현지인들은 아무도 안 내리고 가만 앉아 있는데...

그럼 이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먼 곳으로 가는데 차비는 우리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야?

분명히 암만 시내에 있는 지정 버스터미널로 갈 건데, 여행자 11명만 이 곳에 쏠랑 내리게 한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 곁을 금방 달라붙는 택시 기사들.

“시내까지는 걸어서는 못 간다. 아주 멀다. 어느 호텔로 갈꺼냐? 거기까지 택시가 딱 모셔다 줄게...”

짜고 치는 고돌이라는 게 눈에 훤히 보이면서도 방법이 없으니 속는다.

페트라에서 암만까지 3시간을 타고 오는 버스비를 5JD를 냈는데

여기서 시내까지 가는데 택시비가 3JD란다.

도둑놈들. 짜고 치는 놈들.

세상 어디를 가나 이 놈의 택시기사들 때문에 기분 다 잡친다.

그래서 우리는 택시를 거의 안 타는데.

오늘은 딱 걸렸다.

‘신사적’이기는 무슨...

 

사진의 거리 오른 쪽 골목으로 쏙 들어가 있는 숙소였다.

이집트의 다합에서, 그리고 어제 페트라의 발렌타인 인에서 같이 보냈던 유타랑 같이 선택한 숙소였다.

일본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가는 곳이라 그랬다.

그래도 이름은 ‘호텔’이었는데...


최악이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여행하면서 만난 최악의 숙소였다.

우리나라 70년대 공중화장실 같은 분위기.

거실이라고 하나 있는 곳에는 뿜어대는 담배연기로 안은 퀘퀘한 냄새가 진동하고

365일 햇볕 한번 안 드는 것 같은 방안, 그리고 때에 절어 있는 이불.

얼마나 끔찍했으면 숙소 내부 사진은 찍지도 않았나 보다. 지금 찾아보니 한 장도 없다.


바로 돌아 나왔어야 하는데, 우리가 왜 그랬지?

가이드 북이 없어서 다른 숙소를 찾을 자신이 없어서 그랬나?

아테네에서 만났던 일본애, 그리고 다합에서 만났던 일본애를 다시 만난 기쁨에 잠깐 정신이 없었나?

아무 생각없이 체크인을 하고 숙박비로 이틀치 분을 이미 지불하고 난 뒤 느꼈던 그 낭패감.


‘먹는 거냐’ ‘자는 거냐’  둘 중에 어느 것을 우선으로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동안 우리는 주저없이  ‘먹는 것’을 선택했다.

‘자는 것’이야 눈만 감으면 다 똑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을 나와서는 이 확신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여행이 길어지면서 ‘먹는 것’은 언제나 아쉬움이 남더라는 것이다.

도무지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아쉬움.

아무리 잘 먹은 것 같아도 항상 배가 고프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고,

뭔가 맵싸하고 알싸한 한국 맛이 빠진 식탁은 어떻게 해도 완벽하게 다 채우지 못하는 허전함이 남더라는 것이다.


그에 반해 더럽다거나, 주인이 개떡 같은 숙소를 만나면 진짜 기분이 팍 상해버린다.

숙소의 경우, 어떻게 해도 아쉬움이 남는 ‘먹는 것’과는 달리

조금만 돈을 더 준다거나. 다른 곳을 찾아내는 수고를 조금만 더 해본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더라는 경험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의 선택’이 며칠 밤을 끔찍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다 채우지 못하는 ‘먹는 것’과

어찌 잘 해보면 여행의 기분을 한층 업 시킬수 있는 ‘자는 것’에 대한 가치기준이 달라졌다고 할까?


암만의 숙소가 딱 그랬다.

체크인을 하고 돈을 지불하고 난 순간부터 기분이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저 방에서 과연 오늘밤을 편안하게 잘 수 있을까?

게다가 춥기까지 하다. 당연히 방안에 히터는 없단다.

오히려 낮 동안엔 건물 밖이 더 따뜻하다.


바다 속에 들어가 벌렁 드러눕기만 해도 뜬다는 사해를 가려니까,

대중 교통은 없고 택시 대절해서 가란다, 25JD내고.

4만 2~3천원 하는 돈이다. 50분만 하면 간다는데.

아니 왜 대중교통이 없단 말이야.

책에는 뻔히 나와 있구만.

뭐 대중교통으로 가려면 어디 어디서 갈아타야 하고, 그것도 마지막에는 다시 택시를 타야하고...

어쩌구 저쩌구...

그러면 벽에 붙어 있는 일인당 7.5JD하는 것 신청하겠다니까,

그건 뭐 4명 이상이 되어야 한다나?

리셉션에 앉아 있는 주인이라는 사람이 옷도 무슨 츄리닝 비슷한 때 꼬질꼬질하게 입고서

머리는 사흘은 안 감은 것 같이 푸석푸석.

대중교통으로 가는 법은 절대 안 가르쳐 주고 자기 돈 벌 생각만 한다.


우리가 이 집에 왜 들어왔을까?

순간적으로 잠시 샐쭉했나, 아까는?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일본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자기들도 그냥 택시 타고 갔다 왔단다.

그런데 어제는 날씨가 너무 추워서 사해에 몸을 담궈 보지도 못했다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면 둥둥 뜬다는 단지 그 하나의 매력 때문에 사해를 가려고 하는데

몸도 담궈 보지 못한다면 왜 가야하지?

모든 게 다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거실 한쪽 구석에 아까부터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뚱보는

요르단에서 사해를 뭐 할라고 가나? 이스라엘 쪽 사해가 훨씬 더 좋은 데.

요르단 쪽 사해는 입장료만 해도 15JD(2만5천원)가 넘는다...

물론 돈을 안 받는 곳도 있는데 그 곳은 샤워를 할 수가 없다...

그렇게 짠 바다에 있다가 샤워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해봐라, 날씨도 추운데...

10JD 받는 해변은 따뜻한 물 샤워는 안되고 찬물 샤워만 된다... 이스라엘로 가서 가라...

뭔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우리 속을 막 뒤집는다.


이 날 우리는 시리아 다마스커스 가는 대절택시 타는 곳을 찾아놓고

(이것도 버스보다는 택시가 더 편하다는 결론이었다. 하여튼 요르단에서는 한번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했다.)

밥 먹고, 잠시 암만 중심가 돌아다니다가 몇 번을 다시 숙소엘 들락날락 하면서

끔찍하고도 더러운 내부를 새삼 확인해야 했고,

그 때마다 택시로 사해를 가라는 주인의 권유를 받으면서 기분을 잡치고 있었다.

푸에르토리코 뚱보는 계속 싱퉁하니 투덜대면서 호텔주인의 영업?을 방해하고 있다.

아마 뚱보도 뭔가 주인에게 못마땅한 것이 있는지 ...

호텔주인과는 다른 정보를 여행자들에게 끊임없이 준다..

 

페트라 숙소에 붙어 있는 이 호텔의 광고문에서는 인터넷이 공짜라고 했는데, 그 것 역시 거짓말이었다.

유선으로 하는 인터넷은 한 시간에 1JD를 내야하고 무선 인터넷은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써야 한다.

도둑 인터넷이니 속도도 형편없고 연결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이래 저래 마음에 안 드는 곳이었다.

 

시작부터 몇 번의 거짓말에 속상해서 그런지 암만 시내 풍경도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다.

다른 때 같았으면 비좁은 산꼭대기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암만 시내의 집들을 보면서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겹게 느껴질텐데 그런 정겨움마저도 안 떠오른다.

아직도 왕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통괄하는 나라라는 글을 읽고,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아직도 왕이 통치하는가 싶기도 하고 더구나 후세인 전 왕의 장남인 압둘라 2세가

왕권을 세습 받았다는 글에서는 아직도 권력을 세습하는 나라가 있나 싶어서 더 마음에 안 든다.

2대에 걸쳐서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요르단 왕은 국민들이 이렇게 살고 있는 걸 알고는 있나 싶기도 하고...

 

더러운 이불이 혹시라도 내 입을 건드릴까봐 밤새 뒤척이면서 또 추위에 떨면서 하루밤을 보내고

다음날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암만 시내로 나섰다.

여행지에서 속상해봐야 우리만 손해다, 기분을 전환시키자...


암만 시내 한 가운데 있는 로마식 원형극장을 찾았다.

암만은 10개의 언덕위에 세워져 있는 도시인데 원형극장은 암만의 동쪽 언덕을 통째로 깍아 만든 것이다.

6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란다.

 

 

암만은 그 역사가 BC 3천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도시라는데,

그 옛날 이렇게 큰 극장이 필요했을까?

먼 옛날 사람들은 이 원형극장을 오려면 각자 말을 타고 왔을까?

지금과 같이 복원을 끝낸 뒤,

1960년대 이후에는 이 원형극장은 대중공연이나 스포츠 행사 개최지로 이용되고 있단다.

원형극장의 계단에 앉아 멀리 암만 시내를 바라보니 조금씩 마음이 풀린다.

다시 먼 옛날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생각하며...

 

 

 

 

박물관을 찾았다.

고대 요르단 사람들이 살아가던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고대 의상인데도 지금 사람들이 입고 있는 모습이랑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시장에 나가보면 지금도 이것과 꼭 같은 의상들을 많이 팔고 있다.

물론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현대 복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시장에서 이런 류의 옷을

많이 팔고 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 한복처럼 꼭 특별한 날에만 입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전히 자신들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것 같아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박물관에는 그리이스 로마식 모자이크 벽면도 많이 모아두었다.

암만은 구약성경의 신명기에 처음 등장한다는 데,

이집트 제국의 통치도 받았고 이후 나바트 왕국, 로마제국에 의해 점령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에서 보던 양식과 비슷한 모자이크 벽면을 볼 수 있는가 보다.

원형극장 입구에 로마시대의 아크로폴리스 유적도 있다.

 

암만 시내 한 가운데 있는 후세인 모스크.

요르단 인구의 대다수는 무슬림들이다.

아주 극소수의 기독교인들도 있단다.

그래서 그런지 요르단 시내에서는 간간히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들을 볼 수 있다.

 

시장에서 만난 모래 예술가(?)

주둥이 좁은 저 조그만 유리병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모래를 차곡차곡 쌓아 갖은 그림을 그려낸다.

사막을 거닐고 있는 낙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연인들의 모습.

만들고 있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데도 금세 섬세하게 만들어지는 그림이 신기하기만 하다.


 

암만 성채(Amman Citadel)로 올랐다.

4~5천년전 성벽으로 둘러싼 성채란다.

850m 높이의 언덕에 세워진 것으로 암만 중심부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암만 성채로 오르면 암만 시내 전체가 사방으로 다 내려다 보인다.

저 아래 로마식 원형극장도 보이고, 바로 옆에 작은 극장 오데온 건물도 보인다.

맞은 편 언덕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집들도 다 보이고...


 

성채의 중심에는 헤라클레스 신전터가 있다.

이제는 몇 개의 기둥으로만 남아...

로마시대 헤롯왕이 헤라클레스를 위하여 봉헌한 신전이란다.

여기만 딱 보고 있으면 이곳이 로마인지 아테네인지 분간하기가 힘들다.


 

암만 성채에 있는 또 다른 큰 건물.

헤라클레스 신전 옆에 있다.

예배당 건물이다.

요르단은 동로마 제국 시대하에 있어서 교회 건물도 비잔틴 양식이란다.

사실 그냥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들어갔다 나왔다.  

 

 

성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길.

굽이굽이 집들이 있다.

언덕위에 세운 집들이다 보니 아랫 모양은 바위산의 모양을 그대로 다 담고 있다.

비뚤어지면 비뚤어진 대로...

자연을 그대로 담고 있는 집...

마음이 조금 더 풀린다.


 

암만에 대한 속상한 감정들이 이때부터 슬 풀리기 시작했다.

역시 어느 곳에서나 만나는 밝은 아이들.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애들이 낯선 동양인에게 미소를 보낸다.

한편으로는 쑥스러워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대한다.

같은 학년이라는 데 뽀송뽀송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아이도 있지만

중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른 아저씨들처럼 수염이 가득한 전형적인 중동 사람처럼 보이는 애들도 있다.

ㅋㅋ...


 

요르단에 가면 먹을 게 하나도 없다던 한국친구들도 있었는데...

암만 시내의 뒷골목에서 현지인들이 소복이 앉아있는 노천 식당을 발견했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난,

위에 듬뿍 담아주는 올리브 기름을 덜어낸다면 마치 우리나라 청국장 같기도 한 뻑뻑한 콩소스,

아주 맛나게 부친 계란 후라이.

그리고 오이피클과 양파 토마토, 생고추.

쌈장에 생고추를 찍어먹듯이 생고추를 콩소스에 콱! 찍어먹으니 마치 고향에 온 것 같다.

양옆, 맞은 편에 앉아있는 요르단 사람들이 보내주는 따뜻한 미소까지 곁들이니

속상해 있던 우리 마음이 한꺼번에 다 풀어진다.

다 먹고 계산을 하는데 1JD밖에 안한다.

돈이 적게 나와서라기 보다, 현지인들과 똑같은 가격을 받고 거짓말을 안하는 것 같아 훨씬 기분이 좋다.


 

이 식당의 종업원.

두 번째 갔더니만 우리를 알아보고 더 친절하다.

생고추를 콩소스에 퍽퍽 찍어 우걱우걱 베어먹으니 알아서 더 갖다주기도 한다.

아름답고도 친절한 미소를 보내며...

양옆으로 맞은 편으로 앉아있는 다른 손님들도 역시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면서...


그래!!! 

용서한다. 

암만의 거리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마치 우리나라 예전 어느 드라마에서 나왔던  ‘호섭’이 머리를 한 암만의 뒷골목 식당 종업원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만나서....

현지인들이 보내주는 그냥 따스한 눈길을 기억하면서..

속상했던 암만의 모든 것을 용서(?) 한다.


***요르단에는 버스 시간표도 가격표도 없다.

한마디로 ‘그때 그때 달라요’다.

아라비아 대상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방식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건을 가득 싣고 다니면서 사려는 사람이 많으면 가격이 올라가고, 없으면 내려가는 식으로.

버스 역시 떠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 차면 떠나는 식으로

오랫동안 아라비아 상인으로 살아온 옛 선조들의 삶의 방식, 그대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

맞는지는 모른다.


*** 결국 우리는 ‘사해’를 포기했다.

암만 숙소의 주인이 미워서.

대중교통으로 가는 방법을 찾으려면 찾을 수 있었겠지만, 돈만 밝히는 숙소 주인의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

‘사해’에 갈 마음이 싹 사라져버렸다.

이스라엘에서 넘어온 애들이 이스라엘 쪽 사해가 훨씬 깨끗하고 찾아가는 방법도 더 편하다고 해서...

언제일지 모르는 ‘이스라엘에서의 사해’를 기약하며 요르단에서의 ‘사해’는 마음에서 접어버렸다. 

이렇게 또 하나 남겨두면 다시 중동을 찾아올지 모른다는 미련을 남겨두고... 시리아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