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296 (1월20일) 목화의 성, 파묵칼레

프리 김앤리 2010. 1. 22. 08:33

파묵칼레는 '목화의 성'이란 뜻이다.

목화가 핀 것 마냥 산 전체가 하얗다는 뜻이다.

이름이 그렇다고 목화가 핀 것도 아니고, 물론 눈이 산 전체를 덮고 있어서도 아니다.

아주 오랜 세월, 다량의 석회분을 함유한 물이 솟아 넘쳐

암석 표면을 흘러 내려 쌓이고 굳고, 또 쌓이고 굳기를 반복, 수만겹의 계단과 거대한 구릉을 만들어

멀리서 보면 마치 목화가 핀  거대한 성처럼 보인다고 하여 이름을 그렇게 붙여 놓은 것이다.

 

버스를 타고오다 보면 내내 푸른 나무들이 가득한 초록의 산들 사이에

저멀리 불쑥 거대하게 솟아올라 반짝반짝 눈부신 흰 산이 나타나는 모습.

2002년 내 여행에서 파묵칼레는 마치 '신기루'처럼 내 눈앞에 펼쳐졌었다.

이번에도 내심 그런 기대를 하고 창밖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보기에도 초라한, 그저 쭈빗 솟아있는 희끄무리한 조그만 구릉같은 게 하나 나타난다.

'어? 저건가... 저게 파묵칼레였나?

 지난번엔 안 이랬던 것 같은데...'

 

문제는 날씨였다.

한 여름.  눈부신 태양아래 있던 파묵칼레는 눈을 들어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반짝이고 있었다.

햇빛을 받은 석회암 구릉은 마치 한겨울의 눈썰매장 같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겨울.

한낮인데도 도대체 해가 어느쪽에 떠있는지도 가늠하기 어려운 짙은 구름.

게다가 부슬부슬 비도 뿌린다.

푸른 나무들이 가득찬 주변의 산들도 구름속에서 흐리멍텅한 초록색을 나타내고 있었고

하얗게 빛나야 할 파묵칼레도

마치 눈이 내리고 난 뒤,

한겨울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쓴 듯, 희뿌연 색깔을 하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

'파묵칼레가 얼마나 눈부신 줄 아느냐?

 해가 질때 석회 구릉 하나하나에 담긴 물이 노을빛을 받아 얼마나 아름답게 변하는지 아느냐?'라며

예전 내 여행의 찬란한 기억을 잔뜩 늘어놓고 들어온 곳이건만...

 

뿌연 세상, 시커머죽죽한 구릉 하나만 쑥 솟아있을 뿐이다.

 

'제발 내일은 날씨가 맑아야 할텐데...'

괜시리 숙소 창밖만 자꾸 쳐다본다.

 

아!!! 제발... 태양아!!! 내일은 얼굴을 내밀어다오... 

 

눈을 뜨자마자 창밖을 내다본다.

그런데...

여전히 찌부둥하다.

해는 없다.

구름이 잔뜩 끼었다.

...

그래도 어제처럼 비가 오지 않는게 얼마나 다행이냐며,

위로 같잖은 위로를 하며 파묵칼레를 오른다.

 

그래도 여기가 온천은 온천인가벼.

구릉 사이로 흘러내리는 온천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입구부터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한다.

오염을 막기 위해서란다.

한겨울, 맨발로 이 산을 어떻게 올라가나 걱정했었는데

그래도 온천이라고 발이 시리지는 않다.

따뜻하다.  

 

세월이 만들어놓은 작은 탕(?) 하나하나에는 물이 가득 담겨있다.

바닥은 온통 녹아내린 석회다.

아주 부드러운 모래, 아니 밀가루를 밟고 서 있는 듯 하다.

감촉이 부드럽다.

게다가 따뜻하기까지 하고...

 

쩝!!!

그래, 용서한다(?).

어느 곳에 숨어있는지 알수 없는 한낮의 태양도 용서하고,

태양이 없어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도 않는 파묵칼레를 '따뜻한 물' 하나로 용서한다.

 

헐!!!

이런 건방진...

연장을 가지지 못하면 조그만 것 어떤 것 하나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인 주제에

억겁의 세월동안 한겹한겹 차곡차곡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낸 이 대자연을 감히 용서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다니...

 

꺄!!!

자세히 봐라.

잔잔하게 흘러내린 물이 만들어놓은 이 미세한 무늬들...

사막의 바람이 만들어놓은 물결의 모래,

몇만년 흘러내린 물이 석회암석에 만들어 놓은 자연의 아름다운 무늬.

 

사람이 이런 자연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겸손해지자고, 건방지지 말자고,

여행 내내 다짐했으면서 

또 잠시 해가 비치지 않은 찌부둥한 날씨 탓을 하며

묵묵히 세월을 만들어가고 있는 자연을 무덤덤하게, 아니 실망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내딛는다.

아까보다는 훨씬 파묵칼레가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목화가 피지 않았어도,

눈이 쌓여 있지 않아도,

혼자서 빛을 발하고 있는 파묵칼레.

 

코끝이 쨍하게 얼어붙는 것 같은 한겨울에도 따뜻한 물을 내려주는 이 곳.

아주 은은한 하늘 빛을 내고 있는 작은 호수(?).

감사합니다.  

 

예전에는 저 구릉 하나하나에 모두 다 물을 담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 곳으로 물길을 모아 내려

자연스럽게 만들어 놓은 층층의 석회붕만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곳은 그래도 아주 세차게 물이 흘러내렸던 곳인가 보다.

물결무늬가 아주 선명하다.

덕분에 맨발로 걸어도 전혀 미끄럽지 않다.

 

나무가 있는 저쪽이 서쪽인데,

저쪽으로 해가 지면 노을빛이 푸른 빛의 석회붕의 물 색깔을 붉에 물들이는데...

오늘은 이 곳에 물이 담겨 있다고 하더라도 그 오묘한 색깔을 보지는 못하겠다.

해가 지는지 마는지도 알 수 없게 시간이 흘러가버리는 오늘.

마음속으로만 상상한다.

 

석회붕 위쪽의 고대도시 히에라폴리스로 향한다. 

 

고대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나 이렇게 큰 바위덩어리들을 만난다.

언제 봐도 놀라운 돌 쌓는 기술들.

절묘하게 쌓아올린 아치문하며...

 

히에라폴리스는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이다.

AD 2세기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때 건설된 야외극장이다.

로마시대 원형극장이 대부분 그렇듯이 언덕의 경사진 면을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일만명은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지금처럼 책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TV나 대중매체도 당연히 없던 시절.

그 시대 사람들의 문화적 활동, 대중 선전매체는 바로 이러한 극장이었을 것이다.

로마는 물론, 요르단, 시리아, 터키등 로마제국이 점령하고 번성했던 모든 곳에는

이와같은 원형극장이 만들어져 있다.

 

보존상태가 그런대로 양호하다는 히에라폴리스의 원형극장에 앉아

아주 오래 전, 이 곳에서 웃고 울고 소리질렀을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전설처럼 여겨지는 수많은 일들이 실재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우리에게는 아주 가깝게 여겨지는 우리나라 80년대의 일들을

이조시대나 고려, 신라... 아니 더 먼 옛날 선사시대와 마찬가지로 

현실이 아니라 그저 먼 옛날의 '언제' 처럼 말해버리는 지금의 아이들을 보면서

"얘들아, 그게 아니야... 그건 현실이었어..."라고 말해봐야

뜬구름 잡는 이야기밖에 안됐었는데...

 

내게 있어서도 그리스 로마시대, 중세시대, 혹은 더 먼 옛날 BC 시대의 이야기가 그저 뜬구름 같았었는데

여행을 나와서는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게 바로 이런 순간이다.

 

아주 오래 전, 이 원형극장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는 순간,

그 사람들이 살았을 집터에 서성거려 보는 순간...

역사는 그 당시는 명백한 '현실'이었음을. 

 

히에라폴리스의 언덕 뒤로는 성필립보 순교 기념당도 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중 한명인 필립보가 이 곳에서 순교한 것을 기념하여 지어진 교회란다. 

 

석회붕의 언덕 바로 위에는 온천 풀장이 있다.

아침에 올라올 때는 위에 있는 온천에 몸을 한번 담궈볼까라고도 생각했었는데

한겨울이라 그런지 야외온천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달랑 우리 둘만 들어가려니 좀 그렇다.

포기한다.

 

이 온천이 흥미로운 것은 고대 도시의 중심 거리위에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천의 바닥에는 로마시대의 유적들이 그대로 나뒹굴고 있다.

고대 유적위에서 즐기는 야외 온천,

상상은 즐거웠으나, 실천은 못한다.

그냥 바라만 본다.

 

물이 제법 따뜻한지 김이 모락모락 난다.

바닥은 끓고 있는지 뽀글뽀글 방울도 솟아오르고.

 

올라갈 때의 시큰둥함은 벗어버린 지 오래다.

오래된 역사도 만나고, 그 역사속에서 살았을 사람들도 마음으로 만나고,

묵묵히 세월을 만들어 낸 자연도 마주하고 다시 내려간다.

 

골을 파서 한 곳으로 모아 내리는 물줄기에 발을 담근다.

족욕이 따로 없다.

 

조심조심 다시 걸어 내려오며... 

 

부드러운 석회분을 가진 천연 풀장을 보면서...

아주 엷은 옥빛 물을 보면서...

 

흰색, 회색, 옥색밖에 없는 세상에

빨간 색을 하나 보탠다.

 

제일 아래까지 내려왔다.

위에서 내려온 온천물을 모아 아래에는 오리들이 놀 수 있는 호수를 만들어 두었다.

인간들만이 즐기는 세상이 아니라

오리들도 함께 즐기는 세상...

 

** 한국에 있을때는 나에게 날씨가 그다지 중요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하늘이 주시는 태양과 비로 농사를 짓는 농부도 아니었고,

    거친 파도를 두려워해야 하는 바닷 사람도  아니었고,

    비 온다고 우산을 팔고, 햇살이 강하다고 선탠 로션을 팔고, 눈이 온다고 스노우타이어를 팔아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흐린 날에는 우산을 챙기거나, 운전을 할 때 좀 성가시겠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

    장마철에는 빨래가 잘 마르지 않을까봐 걱정하는 주부의 심정 정도라고 할까...

   

    그런데 여행을 나오니

    진짜로 '날씨가 반이다' 라는 생각을 갖는다 .

    비가 오면 어디 나다니기도 힘들고,

    날씨가 흐리면 기분이 꿀꿀해서 어디를 보아도 그리 상쾌한 것은 아니었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쨍하게 맑은 날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곳은 아름답게 보였고, 그 곳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정말 날씨가 여행에 주는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춰주지 않아서 약간은 실망으로 시작한 파묵칼레.

    그런데,

    파묵칼레 다음으로 도착한 셀축에서 만난 미국 할머니 여행자들의 이야기에

    우리의 파묵칼레 여행은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알았다.

    우리가 떠난 다음날 파묵칼레를 갔다는 이들은

    자기 평생 그렇게 많이 내리는 비는 처음 봤다면서 고개를 절레 절레 저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겉옷은 물론 신발에 속옷까지 몽땅 다 젖었다는 이야기,

    퍼붓는 비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

    신발 벗고 석회붕에 올라가봤냐, 그래도 작은 호수에 담겨 있는 물은 따뜻하지 않더냐는 우리의 질문에

    신발을 벗고 올라간 다는 것은 엄두도 못내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행의 절반이라는 날씨"에 우리는 그 나머지 절반이라도 제법 신나게 즐기고 왔다는 생각에 감사했다.

     더구나 이들은 미국의 더운 지역 아리조나, 텍사스 지방에서 와서

     너무 추워서 끔찍했었다는 이야기에

     '절반' 조차 빼앗겨 버린 이들에 비해

     우리가 가졌던 파묵칼레의 시간은 '절반의 행복'이 아니라

     '완전한 것'이었음에 더더욱 감사했다.

 

     이들의 파묵칼레도 그들 나름대로는 또 다른 '완전한  여행'이었으리라는 것도 역시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