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299(1월 23일) 지나온 여행을 생각하게 하는 곳, 에페소에서

프리 김앤리 2010. 1. 24. 08:07

잘 나가던 치과를 때려치우고 자전거로 세상을 돌고 있는 후배가  있다.

중국에서 시작하여 라오스로 베트남으로...

벌써 몇 개월째 튼튼한 두 다리가 굴리는 자전거 바퀴로 성큼성큼 세상으로 나서고 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박물관이나 유적, 이런 건 보고 있어도 별로 감동을 받지 못해서

자신은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러 떠난다고 했다.

그래서 이 친구는 중국의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의 집에 머물기도 하고,

라오스에서는 수많은 스님들과 만나기도 한다.

자전거를 몰고 가다 몇 백m씩 쫓아오는 아이들의 사진을 찍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동네 청년들과 또 아저씨들과 술 한잔씩을 기울이기도 한다.

베트남에서는 그 곳의 아이들에게 우리나라 인권단체에서 보내주는 장학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 곳 학교를 방문해서 아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주기도 한다.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아직도 베트남인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넘어갔는지...

아무리 많이 걷는 우리라 하더라도 우리는 버스도 타고, 기차도 타지만

두 바퀴의 자전거로 나아가는 세상은 아주 더디게... 천천히...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고 있을 것이다.  

 

여행을 하면서  한 번씩 너무 피곤해 다 귀찮다는 생각이 들 때면

우리는 그 후배를 떠올린다.

허벅지에 쥐가 날만큼 자전거페달을 스스로 밟아야만 한발 짝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그의 피곤한 자전거 여행을 떠올리면서 위안을 삼기도 한다.


다만 우리의 고민이 있다면 이 친구가 세상을 두루 돌아보고

그 따뜻한 마음으로 다시 한국의 치과 선생님으로 돌아와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인도 여행에서 잠깐 만났을 때, 나중에는  ‘인도 북부 라다크로 가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고 싶다’라는

이야기가 제발 현실화되지 말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나라로 돌아와

우리의 한없는 신뢰를 여전히 받는 존경스러운 치과 의사선생님으로 돌아와 줬으면 좋겠다.


에페소로 들어와서 왜 문득, 이 친구가 생각이 났을까?

아마 ‘지겨운 유적’  ‘감동을 받지 못하는 유적’이라는 말 때문 일거다.

사실 나도 비슷하다.

만만찮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는데,

정작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돌조각, 돌기둥 몇 개 덜렁 남아있는 황량한 폐허이기 일쑤고,

몇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수많은 시대가 겹쳐져 출연하면서 이게 이 시대인가

저게 그 시대인가 늘 헷갈리기도 하는 수많은 유적들...

보고 나서 돌아서 나오면 다시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듯한 공험감.

그 곳에선 늘 상상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 거리를 걸었던 사람들을... 그 집터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다시 짜깁기를 해야했다. 그들의 얽히고 얽힌 역사를...

처음엔 엄청나게 헷갈리고 짜증도 나던 것이 여행이 길어지면서

각각의 유적들에 대한, 그들 역사에 대한 지식의 파편들이 하나둘씩 연결이 되고 이해가 더 깊어지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에페소만 해도 그렇다.

터키의 서부해안에 있는 에페소 유적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BC 6천년경 부터라고 한다.

우리가 여행했던 시리아의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것과 비슷한 시기이다.

이후 에페소는 청동기 시대를 거치고  BC 1100년경에는 힛타이트족들이 살아왔던 무대이기도 하다.

이건 또 터키의 앙카라에서 우리가 찾고자 했던 철기시대를 이끈 힛타이트 족과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했다.

그 무렵 그리스 사람들이 지금의 에페소보다는 조금 떨어진 아르테미스 신전 근처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와 터키 민족이 지금은 서로 다른 나라로 있지만 예전에는 같은 곳에서

같은 문화를 가지고 살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BC 5~6세기에는 페르시아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행하면서 그토록 감동했던 이란 쉬라즈의 페르세폴리스의 유적과 연관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키루스 대왕, 다리우스 대왕의 서방 원정이 이곳까지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에페소 지역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의 힘이 약해진다.

마케도니아! 우리는 그 곳도 여행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터키의 이 지역을 지나 이란의 페르세폴리스까지 진출해서

그리스를 침략한 보복으로 그 장대한 유적을 다 불태웠다는 이야기이고.

알렉산더의 사후 그의 장군이었던 리시마쿠스(Lysimachus)가

지금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에페소 유적을 처음 건설한 사람이다.

 

여기서 물론 끝나지 않는다.

아직도 에페소의 역사는 여전히 기원전에 머물러 있다.

AD로 넘어가면서는 예수의 사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제자 요한이

이 곳까지 와서 말년을 보냈다고 해서 이 곳에는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할 수 있고, 요한의 무덤을 만날 수 있다.

바울이 설교를 했던 곳도 만날 수 있고, 초대 교회의 모습들도 이 곳에서 만난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거치면서 우리가 보았던 수많은 성서와 관련된 조각 지식들을 이 곳에서 짜깁기 할 수 있었다.

 

또 다시 세월은 흘러 이제 에페소는 동쪽으로 진출한 로마의 땅. 로마 시대의 유적들을 만난다.

에페소의 많은 유적들이 이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여행했던 로마시대의 다른 유적들과 겹쳐서 정리가 되고,

시리아 요르단등에서도 볼 수 있었던 비슷한 모습의 원형극장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루마니아 불가리에서 보았던 동로마 제국시대의 그리스 정교회의 성당과도 연결 시킬 수 있었다.

 

다시 천년 가까이의 세월을 흘려보내면 이 곳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시대가 된다.

세계사에서 드물게 보이는 동쪽에서의 서쪽으로 진출을 시도한 오스만투르크 제국.

이쯤에서는 유럽 땅인 보스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에서 보였던 이슬람 양식의 건축물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보았던 이슬람 양식도

이렇게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인류의 역사를 더듬어가다 보면 이해하게 되는 것 처럼...


단편적이고 알량했던 인류의 역사에 대한 조각 지식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잡아가고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정리되는 것이

일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도 우리가 지겨운 유적을 포기하지 못하고 여전히 찾는 이유인 것이다.

 

 


<에페소의 유적을 찾아서>

에페소(Ephesus) 유적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셀축(Selcuk)이라는 도시를 찾아가야 한다.

셀축에 숙소를 잡고 3Km 떨어진 에페소까지 가는 길을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또 걷는 것이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다른 사람들은 투어로 가기도 하고, 돌무쉬를 타고 가기도 했지만

3Km를 걸으면서 천천히 더듬어보자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한 잎의 나뭇잎도 남아있지 않은 앙상한 가지만 보이는 황량하고도 추운 길이었다.

 

 

거금 40리라(3만 2천원 정도)의 입장료를 내고 에페소 유적지로 들어선다.

여기는 사철 푸른 소나무 숲이다.

 

 

성모 마리아의 교회를 가는 길가에 놓여 있던 석관들.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로 만들어진 관들은 여전히 튼튼하기만 하다.

그래도 저 정도의 관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당시에는 부유층이었겠지...

 

 

성모 마리아의 교회.(The Church of the Virgin Mary).

북쪽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 쪽 길을 따라 제법 들어가야 한다.

원래는 박물관으로 지어졌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난 후 AD 4세기에 교회 건물로 다시 지어진 것이다.

아무도 없이 우리 둘만 앉아 있었는데 터키 고등학생들 한 무리가 들어온다.

그들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

 

 

다시 길을 돌아나와 고대 극장으로서는 가장 크다는 대극장(The Great Theater)로 걸어 들어간다.

 

 

대극장은 최초 헬레니즘 시대(리시마쿠스 시대)에 지어졌고 이후 AD 1~2 세기경 로마시대에 들어서

재건축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그러니까 로마시대 건축물이다.

모두 2만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란다.

 

현재에도 이 곳은 여전히 여러 가지 공연 장소로 쓰이고 있다는데

야외임에도 불구하고 가운데 무대에서의 노래 소리는 사방으로 퍼져버리지 않고 증폭되면서 잘 울려퍼진다.

우리랑 같은 숙소에서 묵고 있던 미국 여행자들이 포함된 투어 그룹이 무대 중간에서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함께 박수도 쳐보고 노래도 불러본다.

덕분에 우리는 객석에 앉아 이들의 노래 소리가 어떻게 잘 울려 퍼지는지를 감상할 수 있었다.

 

 

대극장의 꼭대기 객석에 앉아서...

성모 마리아의 교회에서부터 대극장까지 이어진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에게해로 바로 이어지는 항구까지 가는 거리다.

잘 다듬어진 대리석 바닥과 거대한 기둥들...

원형극장의 객석에 앉을 때마다 이제는 저절로 상상하는 버릇이 생겼다.

이 곳에서 웃고, 울며 감동했을 아주 먼 옛날의 피부색 다른 선조들?... 그들이 내려다 봤을 똑같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대극장을 나와 마블거리에 들어서기 전에 오른 쪽을 보면 거대한 터가 나온다.

이름하여 Commercial Agora.

아고라라고 하면 흔히들 우리는 정치적인 토론 장소를 떠올리게 되지만

리시마쿠스는 상업 광장으로 이 곳을 지었다.

 에페소 역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고대 마을로 황금시대에는 이 곳에 20만이라는 거대한 인구가 살았다니

 ‘시장’의 기능을 갖는 공동의 장소가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신에게 봉헌된 각종 신전도 있었다. 여러 다른 여행지에서도 발견했듯이

고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간에 신의 공간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마블거리(Marble Street)를 걷는다.

대극장에서 셀시우스 도서관까지 이어지는 거리다.

 

 

마블거리를 걷다보면 인류 최초의 광고라고 전해지는 특이한 대리석 판을 만난다.

여성의 얼굴과 왼발, 그리고 점점이 찍혀있는 사람의 심장 표시.

고대시대의 ‘유곽’을 선전하는 그림이란다.

 

그 광고에서 발을 그려놓은 이유를 어떤 책에서는 이 발보다 큰 사람만이 유곽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라며

당시에도 ‘청소년 금지구역’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또 어떤 책에서는 현재의 이 표시에서 왼쪽 앞에 유곽이 있었다는 표시로 단순히 방향 표시라고 설명해놓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이런 업종이 있었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광고다.

 

남편은 짓궂게도 자기 발을 옆에 갖다 대본다.

“여기 표시되어 있는 발보다는 내 발이 더 크제?”

 

 

에페소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셀시우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

AD 117년 로마의 아시아 총독 셀시우스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이 건물은 도서관이자 셀시우스의 묘인 것이다.

도서관은 안쪽과 밖으로 이중벽으로 되어 있는데

1m의 좁은 갭(Gap) 사이에 12,000개의 두루마리책자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셀시우스 도서관이 아름다운 이유는 빛나는 대리석 기둥과

대리석 기둥들 사이에 조각해놓은 네 개의 아름다운 여성 동상 때문이다.

4개의 동상은 각각 Wisdom, Goodness, Knowledge, Thought를 의미한다.

도서관과 참 맞아 떨어지는 상징이다.

 

 

아고라 쪽에서 바라본 도서관.

 

 

이제 언덕길을 따라 남쪽 문으로 올라간다.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들이 나온다.

당시 에페소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상당한 부유층이었단다.

하늘을 덮던 지붕도 다 날아가버리고 그저 폐허처럼 남아있지만 천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보더라도

에페소에 있던 당시의 집들이 얼마나 화려한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진은 남자 공동 화장실.

지금의 변기 모양과 어쩜 이렇게 닮았는지...

약간은 의심이 되는 구석도 없잖아 있지만...

하여튼 고대 로마의 화장실이라는 게 어떠한 칸막이나 문도 없는 얼마전까지의 중국 공중화장실하고

많이 닮았는다는 점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어쩌면 실크로드를 통해 로마와 고대 중국이 화장실 문화를 서로 주고 받았나?

 

 

하드리아누스의 신전(Temple of Hadrianus).

로마 유적이 있는 곳이라면 정말 이 하드리아누스왕은 많이 등장한다.

 

 

하드리아누스의 문, 그의 신전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비슷하게 화려한 문양들.

 

 

에페소의 또 다른 거리 큐레테스(Curetes Way)의 길에서...

검은 색, 녹색, 흰색의 다른 대리석, 오닉스가 깔려 있는 반짝 반짝 빛나는 거리.

당시의 에페소가 얼마나 화려했는지를 보여주는 거리다.

 

 

큐레테스의 거리를 아래로 내려다 보며...

저 멀리 셀시우스 도서관도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집터들이 보인다.

바로 오른쪽 아래에는 트라잔의 샘(Fountain of Trajan) 건축물도 보이고.

 

 

헤라클레스의 문도 지난다.

...

우리는 지금 에페소의 유적 사이를 걷고 있다.

BC 6천년경으로 거슬로 올라가 청동기 시대를 지나고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지나고

알렉산더 대왕을 만나며... 로마 제국 시대를 거치고... 다시 오스만 투르크 시대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이건 로마시대의 유적이겠지?

 

 

이건 어느 시대의 것일까?

물론 여기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로마시대의 것이겠지만..

이 곳에 동굴을 파고 사람들이 살았던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일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쉬지 않고 유적들 사이를 헤맨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인류의 역사에 대한 조각 지식들을 서로 연결해가며...

 

 


<7인의 동굴과 요한의 무덤...>

 

에페소를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7인의 동굴’을 찾아갔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AD 3세기에 기독교의 박해를 피해 도망온 7명의 기독교인들이

에페소의 유적이 있는 피온 산(Mt Pion)까지 와서 동굴 속에서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깬 7명의 기독교인이 음식을 구하려고 마을로 내려갔는데 자기가 알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다 죽고

음식값으로 자신들이 낸 돈은 아주 옛날 돈이 더라나?

알고 보니 이들이 다시 깨어난 건 200년이 지나서라나?

이들이 죽고 난 후,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잠들었던 곳에 묻어주고

‘기적’이 일어난 동굴을 성지로 정했단다.

그 이후 다른 수도사들도 이 곳에 동굴을 파고 수도생활을 하여 지금은 아주 많은 동굴이 남아있다고...

 

 

셀축에는 기독교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소가 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의 무덤이 바로 이 곳에 있다.

 

 

우리가 여기를 찾아갔을 때는 문을 닫아버려

밖에서 볼 수 밖에 없었다.

하기야... 뭐... 우리가 기독교인들도 아니고...

꼭 봐야 하는 건 아니지만...

(예전에 나 혼자 왔었을때는 여기를 들어갔었다)

이번에는 남편 혼자라도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하루는 늦게 가서 못들어가고 또 하루는 비가 와서 못가고, 다음날도 또 늦어서 못가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

지금은 흔적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아르테미스 신전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컸다고 알려진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기둥 너머로 ‘요한의 무덤’도 보이고, 셀축의 성채도 보인다.

 

 

잎하나 없는 복숭아 과수원너머로 보이는 셀축의 성채

아이슬륵 언덕(Ayasuluk Hill) 위에 높이 세워져 있다.

 

 

이 성채는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모양이다.

우리도 그저 가까이서 한번 보려고 갔는데, 왠 청년 한명이 자기를 따라 오란다.

그러면서 철조망을 뚫어놓은 개구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멋지다. 

이 친구 아니었으면 안으로는 못 들어오는 건데...

철조망이 둘러 쳐져 있었으니 들어오지도 못했을거지만

들어왔다해도 어디가 어느 길인지 몰라 헤맸을텐데...

졸지에 현지인의 안내를 받으며 아무 두려움 없이 성벽을 따라 걷는다.

 

 

성벽을 따라 걸으니 셀축 전체가 다 보인다.

바로 아래가 요한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아래가 아르테미스 신전이고.

한 눈에 확!!! 다 들어온다.

이런 행운이...

 

 

아주 견고한 성채다.

왜 관광객들에게 개방을 하지 않을까?

조금만 정비해 놓으면 충분히 볼거리가 될텐데...

다 무너진 돌덩어리만 있어도 벽을 둘러쳐놓고 비싼 입장료를 받는 터키가 이 곳은 왜 그냥 내버려 두었을까?

뭐... 우리는 구경을 잘 하고 있기는 하다만은...

성채 안에 있는 모스크에도 데려다 준다.

한쪽 구석에 철문으로 닫아 놓은 것을 열어 사람 한명도 지나가기 힘든 아주 좁은 계단을 올라가

모스크 꼭대기까지도 올라가게 하고, 또 한참을 걸어 터키식 목욕탕이 있는 건물까지 다 구경시켜 준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성채 아래로 광활하게 펼쳐진 터키의 비옥한 땅까지 덕분에 다 구경한다.

정말 고맙다.

개구멍을 지나고, 성벽을 따라 걷고, 모스크 꼭대기 까지 올라가고,

풀밭을 지나서 터키식 목욕탕이 있는 오래된 건물까지 구경시켜주고...

사방으로 셀축 시내를 다 감상하도록 해주니...

‘이방인에 대한 단순한 친절일까?’ 아니면 ‘뭔가를 바라는 걸까?’

...

다시 개구멍으로 나오니

이 친구 손가락 두 개를 부비며 ‘Money' 라고 한다.

순간 약간 속이 상하기는 했지만 당연한 요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요구하는 돈도 정말 아주 푼돈밖에 안되는 ... 달랑 3리라.

2리라로 깍았다. 아무 말없이 선뜻 받아든다.

2천원도 안되는 돈을 받아 쥐고 발걸음도 가볍게 마을로 내려간다.

.... 내려와서 후회한다. 그냥 달라는 대로 다 줄걸...

미안하고 고맙다.

 


<성모 마리아의 집>

 

셀축에는 크리스찬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성지가 또 하나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여생을 보낸 곳.

성모 마리아의 집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모 마리아의 집은 셀축 시내에서는 10km 이상 떨어진 거리다.

셀축에서 에페소 북쪽 입구까지 걸어가는데 3Km,

에페소 유적내에서도 북쪽 출입구부터 남쪽 출입구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한다.

에페소 남쪽 입구에서부터 도로를 따라 산을 넘어 6Km는 더 가야 성모마리아의 집이 나온다.


숙소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투어를 신청해서 그 곳을 갔다.

에페소 유적을 투어로 가지 않았다면 주로 남쪽 출입구에서 택시를 타고 가야하는 제법 먼 거리다.


이 곳을 어떻게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숙소의 주인이

튼튼한 우리 두 다리를 가리키며 그냥 걸어가 보란다.

가다가 지나가는 차가 있으면 히치를 해도 된다고...

투어를 주선해주는 숙소의 주인이 ‘히치’를 하라는데 용기 백배하여

아침부터 에페소까지 걸어와서 유적내에서도 한참을 걸은 우리, 겁도 없이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모르고 가면 모를까?

6Km 고갯길,

왕복으로는 12km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걷기 시작하는 이 무모함...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찬바람 부는 거리를 걸으면서 남편은 콧노래를 부른다.

“이 길이 말이야... 바로 ‘마리아와 요한의 길’이란 말이야.

 2천년 전에 마리아와 요한이 이 길을 걸어서 갔지 않았겠어?

 지금 우리도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야...“


또 속아서 걸어간다.

아이구... 다른 사람들은 다 편하게 가는 것 같구만...

택시를 타면 30리라면 된다는데...

 

 

한겨울인데도 등에 땀이 바짝 났다.

매섭게 때리는 겨울 바람에 코가 얼어붙는 것 같은데도

걸어가는 고갯길이 얼마나 힘들고 멀던지... 땀이 다 난다.

3Km는 걸었을까?

성수기가 아닌 비수기의 한 겨울이라 마리아의 집에 가는 차도 별로 없다.

히치는 무슨... 차가 있어야 히치를 해도 하지....

남편, 

 “이 길이 마리아의 길이라니까?  마리아와 요한도 이 길을 걸어서 올라갔을 거 아냐...

   그 때를 생각하면서 걸으라니까???“


절반 이상을 걸어 올라가다가 지나가는 자가용을 한 대 붙들었다.

후!!!! 타란다.


마리아의 집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정갈하다.

 

마리아의 집에 대한 한글 설명.

셀축은 한국사람들이 많이 찾아서인지 에페소에도 마리아의 집에도 한글 설명이 다 있다.

 

 

교인도 아니면서 성모 마리아님 옆에 서 본다.

성모마리아님이 기독교인도 아닌 우리를 두팔 벌리고 환영하며 서있다.

어서 오라고...

둘째 언니도 생각나고... 사랑하는 내 조카, 마리아도 떠오른다.

사랑하는...

 

 

우리를 태워줬던 아저씨들과 함께, 마리아의 집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영어는 전혀 안 통했던 터키 아저씨 들이었다.

우리를 태워주고서 입장료까지 내줬었다.

고마우신 분들.

 

 

성모 마리아의 집.

내부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아주 소박한 내부였다.

촛불을 밝혀 둔 소박한 제대와 조그만 마리아 상.

몇 분 교황님이 방문하신 흔적만이 있을 뿐이다.

성당엘 아주 열심히 다니는 둘째 언니와 사랑하는 조카 마리아가 내내 떠올랐다.

이제 사랑하는 마리아는 이 분과 함께 있겠지...

 

 

마리아의 집의 ‘성수’

아픈 사람들에게는 기적의 물이다.

우리도 한 통 가득 받아왔다.

 

 

성수를 받는 곳 바로 옆에는 사람들의 소원을 비는 벽이 있다.

터키 사람들은 이 곳에 옷자락을 찢어 매달거나 소원을 비는 글을 쓴 종이를 매단다.

우리도 매듭 하나를 만든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건강을 빌면서...

 

 

정갈하고 소박하고 아주 자그마한 성모 마리아의 집.

마리아의 상이 있는 아주 조그만 내실(성당) 하나와 성수대, 조용한 길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입구에 있는 아주 조그만 가게 하나.

가게에는 조그만 병에 ‘성수’를 담아 판매한다.

 

 

마음이 차분해 지는 느낌이다.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우리이지만

성스러운 장소엘 갔다 오고 나면 늘 받는 느낌이다.

겉치장이 아주 화려하다거나 엄청난 규모로 사람을 압도하는 그런 교회나 모스크, 사찰이 아니라

아주 소박한 곳에서 사람들의 믿음을 이끄는 곳이면 더더욱 그렇다.


차분해진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마리아의 길’을 걸어 내려갔다.

아무리 멀어도 이제는 ‘히치’도 하지 말자고...

그냥 이 느낌 그대로를 가지고 내려가자고...

천천히... 생각하면서...

 

 

올라올 때는 아주 힘들었지만

내려가는 ‘마리아의 길’은 기분이 상쾌하다.

셀축, 에페소... 굽이굽이 온 세상이 다 보인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걷는 이 길... 참 좋다.

 

 

내려오는 길은 다시 6Km.

거의 다 내려왔나 보다.

아까 올라갈 때 보았던 성모 마리아님의 상이 보인다.

여기서 우리 숙소가 있는 셀축까지는 또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그냥 뚜벅뚜벅 걸었다.

성모 마리아님과 내가 사랑하는 마리아를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