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310 (2월3일) 여행의 마지막 도시 이스탄불을 떠나며

프리 김앤리 2010. 2. 1. 02:50

이스탄불.

한 도시 안에 아시아와 유럽 대륙이 함께 있는 곳,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이다.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이 삶의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는 우리에게

동양과 서양이 함께, 유럽과 아시아가 한 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스탄불은 이미 충분히 가치가 있는 도시다. 

 

하나의 광장에 기독교 교회(아야소피아)와 이슬람 모스크(술탄 아흐멧 1세 자미, 일명 블루모스크)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곳,

서로 다른 두개의 종교 건축물이 함께 이 도시의 대표적 상징물로 되어 있는 이스탄불은

전혀 공존할 수 없다는 듯이 서로 어르렁거리고 있는 21세기의 종교 갈등이 무의미하다고 가르쳐 주고 있는

살이있는 교육의 현장일 수도 있다.

 

룰론 이스탄불은 특수하게도 지리적 위치가 어쩌다 보니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있고,

아주 오래된 역사를 거쳐오다 보니 이슬람식 건물과 기독교 건물이 하나의 광장안에 마주보고 있는

단순한 외부적인 형태일 수도 있다.

 

실재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시안이기보다는 유럽인이기를 원하고 있고,

유럽연합(EU)에의 가입을 무척 바라고 있다.

또 인구의 98%가 이슬람교도이어서 기독교의 힘이 그다지 이 곳에서는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스탄불이 가지고 있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 아시아와 유럽의 교차점,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는 

'두 가지가 함께 있는 도시'라는 상징적 매력에 이끌려 이곳을 찾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유럽의 많은 민족들이 동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 곳을 점령하기를 시도했고,

또 동양에서는 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 지나야 하는 지역으로 또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 옛날에도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도시,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도시

이스탄불로 들어선다.

 

이스탄불의 구시가지 술탄 아흐멧 지구에 내렸다.

이슬람의 대표적 건축물 술탄아흐멧 1세 자미가 우리를 맞아들인다.

일명 블루모스크이다.

 

광장의 반대 쪽에는 아야소피아 성당이 우리를 반긴다.

이건 기독교 성당으로 만들어졌으나 모스크로 변했다가 현재는 박물관이다. 

 

한 자리에 서서 기독교와 이슬람을 함께 볼 수 있는 곳.

그것 자체로 충분히 감동적이다.

 

*** 이렇게 한 자리에서 두 종교를 나란히 볼 수 있는 곳이 이스탄불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도 우리는 보았었다.

     어찌 보면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는 서로 대적하고 있다는 느낌, 서로 경쟁하고 있다는 느낌

     한마디로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사라예보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는 느낌보다도

     도시 안에 같이 푹 파묻혀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사라예보는 우리 둘에게 아주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으며

     일정 때문에 바삐 떠난 것을 지금도 아쉬워 하고 있다.

     이스탄불 자체만 본다면 감동적인 것임에 틀림없지만

     사라예보에서의 뭔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듯한  잔잔한 감동이 여기에 없는 것 또한 이제는 숨길 수 없다.  ***

 

여하튼, 그래도 지금은 이스탄불에 집중해야겠지?

 

학창시절 세계사 시간에 자주 등장했던 이스탄불,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콘스탄티노플.

 

AD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의 수도를 이 곳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노플'이라고 이름지었다.

게르만의 침입으로 멸망한 서로마 제국과 달리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은

기독교의 세력을 떨쳐나가며 번성한다.

아야소피아 성당이 세워지고, 예레바탄 지하궁전, 도시에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세워진다.

AD 6세기에는 100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던 거대도시.

 

이후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메흐멧 1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도시의 이름은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이스탄불은 콘스탄티누스황제 시절부터 약 1000년간은 기독교의 도시로,

이후 500년 이상 동안은 이슬람의 도시로 성장해온 곳이다.

 

우리 숙소가 이스탄불의 구시가지인 술탄 아흐멧 지구에 있어서

광장의 아야소피아와 블루 모스크는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볼 수 있었다.

비가 흩뿌리는 새벽에도, 햇살이 쨍한 낮에도, 그리고 어스름 해가 지는 저녁 시간에도...

언제봐도 아름다운 아야소피아 성당.

 

 2층 회랑에서 본 아야소피아 성당 제단

내부는 공사중인데다 많은 관광객으로 정신이 없다.

제단 위에 작게 보이지만 커다란 모자이크 성화가 보이고,

제단 왼쪽의 정자모양은 술탄이 기도를 드리는 곳이다. 

 

아야소피아 성당은 비잔틴제국 초기 유스티니아누스황제에 의해 건립되었다.

로마의 베드로성당보다는 작지만 무려 천년이나 앞서서 만들어진 것이다.

일부 기둥은 여러 나라 곳곳에서 가져온 것으로, 심지어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고 한다.

아마 기독교가 국교로 되면서 이전의 로마신전은 별로 중요하게 대접받지 못했던 듯하다.

 

제단 정면 높은 곳에 만들어진 모자이크 성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2층 회랑에서의 기둥모습

기둥에는 초기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조각이 화려하고 선명하다.

  

신영복선생님의 책에서 읽은 글이 기억난다.

'아야소피아 성당에서는 이슬람의 관용정신을 만난다'.

무슬림인 오스만 투르크가 들어서면서, 아야소피아성당을 파괴하지 않고 외부엔 미나레를 만들어 모스크로 바꾸고,

내부의 모자이크 성화는 없애지 않고 흰 회반죽으로 그대로 덮고서 모스크를 만들었다는 곳.

흰색의 회반죽을 벗기니 금빛 성화가 그대로 나타난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붐비며 열심히 쳐다보며 사진을 찍는다.

그들도 우리처럼 금빛 모자이크 성화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회반죽으로 덮은 ...

이슬람의 관용정신을 함께 보는 듯하다.

 

비잔틴 제국시절 얼마나 꼼꼼하게 모자이크를 통해 예수님상을 만들었든지....

심판의 날의 예수님...

 

성당내 일층 한쪽 구석엔 소원을 비는 기둥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대리석 기둥에 구멍이 나있는데...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넣고 손바닥으로 기둥을 만지면서 한바퀴를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원의 기둥

지나가는 누구나 소원을 빌고...

사진을 찍고..

소원이 너무 많고 길어서 한참 기다렸다.

모두의 건강과 평안을 빌면서...

 

 하마터면 놓칠뻔한 모자이크 성화

성당내에서 아무리 찾아도 볼수가 없었다.

두바퀴를 돌았는데도 없었다.

포기하고 나오는데  출구의 뒷쪽 벽에 있다.

성모마리아와 아기예수에게 아야소피아 성당을 바치는 유스티니아누스황제(왼쪽)와

콘스탄티노플을 바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나타내는 모자이크.

 

오늘은 블루모스크에 들어간다.

14대 술탄인 아흐멧 1세(1603~1617) 시절 세워진 모스크이다.

오스만 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난 뒤 아야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술탄 아흐멧 1세에 들어서서는 아야소피아의 맞은 편에 더 웅장하고 더 아름다운 모스크를 짓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모스크 밖의 안뜰까지 포함해서 오스만 모스크로는 최대 규모이다.  

 

안으로 들어선다.

푸른 스테인글라스, 이즈닉 타일벽, 그리고 거대한 기도공간.

원래 이 모스크를 블루모스크라고 부른 이유가 내부 장식의 색깔때문에 그랬다는데

지금은 그다지 푸른색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붉은 카펫트의 색깔이 너무 강렬해 전체가 붉게 보이는 듯 하다.

혹시 푸른 스테인글라스를 통해 햇살이 강렬하게 비친다면 푸른 색으로 보였을까?

 

2002년도에 왔을 때에는 이 곳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가득 찼었는데

오늘은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날씨가 추워서 그렇는지...

부르사에서 느꼈던 것 처럼 이제 터키사람들의 신앙심이  약해진 것인지...

오랫동안 유럽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왔던 기독교 신앙이 약해진 것처럼...

 

블루모스크의 안뜰.

조그만 마을에 있는 조그만 모스크에서는 볼 수 없는 뜰이다.

이 거대한 뜰 덕분에 블루모스크는 오스만 최대의 모스크라고 불리고 있다. 

 

블루모스크를 나서면 3세기 초에 건설되었다는 경기장 터가 나온다.

히포드롬.

로마의 전차경기장처럼 여기도 말들이 끄는 전차경기가 벌어졌던 곳이다.

주변은 이미 광장으로 잘 다듬어져 있고, 도로까지 나 있어

이곳이 전차경기장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따진다면 폐허가 되었을지언정, 돌덩이들만 굴러 다닐지언정

다 헤진 터를 그대로 두는 것이 '유적'으로서의 가치는 더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다 정비해 놓으면

이 곳이 단지 한때 그랬다는 의미만 있을 뿐,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버린다.

 

제일 윗쪽에 있는 많이 낡은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룩소르에 있는 카르낙 신전에서 가져 온 것이란다.

또 이 기둥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서 가지고 온 것이고...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이 터키로부터 가져간 유물에 분노를 했던 게 바로 며칠전의 일인데,

터키의 심장부 이스탄불에서는 터키(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비잔틴제국 시절의 로마황제라고 표현해야 하겠지만)가

이집트왕조로 부터 또 그리스로 부터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만난다.

빼앗아 온것인지, 헌납받은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거대 석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더 큰 힘의 상징으로 여겼던 힘이 지배하던 시절을 되돌아 보는 것 같다.

 

술탄 아흐멧 트램 정류소.

이스탄불 구시가지를 가려면 이 곳에 내려야 한다.

트램에서 내리면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가 있는 광장으로 바로 나설 수 있다.

 

깨끗하다.

 

오늘은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을 따라 걸어본다.

 

AD 413년 비잔틴의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외곽으로 거대한 성벽을 지었다.

마르마라해가 있는 남쪽이나 동쪽, 골든 혼이 있는 북쪽은 바다가 있어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었지만

유럽지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 서쪽은 도시 방어를 위한 성벽이 필요했다.

당시 유럽 지역에서 맹성을 떨치고 있던 훈족(헝가리 중심)의 침입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테오도시우스는 높이 10m, 두께 5m, 95개의 탑이 있는 거대한 성벽을 콘스탄티노플 외곽을 따라 짓는다.

 

이중으로 된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천년 가까이 철벽의 역할을 해왔다지만...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해 곳곳이 무너져있다.

그러나  그 거대함은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난공불락의 이 성벽 덕분에 비잔틴 제국은 7~8세기의 페르시아 군이나 아랍군,

9세기의 불가리아 군의 공격을 다 막아낼 수 있었단다.

 

성벽밖의 옛날 해자에는 각종 야채를 기르는 밭이 ...

추운 겨울에 싱그럽게 느껴진다.

 

도시 서쪽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따라 남쪽 바다까지 쭉 걸어가다 보면 7개의 탑이 있는 예디큘레(Yedikule)를 만난다.

 

테오도시우스의 요새였던 예디큘레는 오스만 시대에 와서는 감옥으로 이용되었단다.

지금까지 쭉 이어져 오던 철벽의 성벽과 마찬가지로 예디큘레 요새도 거대하고 견고한 철옹성이다.

 

예디큘레의 성벽을 따라 오른다.

 

북쪽으로 나있는 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이 끝도 없이 이어져있다.

 

예디큘레에 오르면 마르마라해까지 이어지는 남쪽으로의 성벽도 한 눈에 다 들어온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에는 모두 95개의 탑이 있다고 했는데

현대인의 개념으로 치자면 95개의 거대한 빌딩을 지어놓은 거나 마찬가지다.

1500년 전에 지어진 95개의 거대한 빌딩.

중간중간에 솟아오른 거대한 탑들에게서 현대의 빌딩 숲을 연상한다.

 

15세기 오스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려고 할 때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잔존 세력은 이 거대한 성벽의 안쪽에만 일부 남아있을 뿐이었다.

조상들이 남겨준 이 견고한 성벽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렇지만...

역사는 오스만투르크에게 이 땅을 넘겨주고야 만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은 이스탄불의 서쪽지역이지만

마르마라해와 접해 있는 구시가지의 해변쪽, 톱카프 궁전 외곽에도 일부는 남아있다.

하루는 톱카프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따라 걸었다.

오른 쪽으로는 마르마라해를 바라보면서...

 

오늘은 그 바닷가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이어주는 갈라타 다리가 나온다.

아야소피아와 블루모스크가 있는 지역은 구시가지, 탁심광장이 있는 곳은 신시가지다.

둘 사이는 갈라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갈라타 다리위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자세히 보니 모두들 낚싯대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프러스 해협과

유럽지역을 다시 남북으로 가르는 골든혼이 만나는 바다,

고기가 많은 모양이다.

다리 위에 빈틈이 없이 낚시꾼들이 늘어서 있다.

멀리로는 슐레마니아 사원이 보이는 그림같은 경치 앞에서

터키 사람들은 멸치, 숭어, 정어리를, 그리고 베스같은 고기를 낚고 있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니 다리 위에서 내려뜨린 낚시대가 가득 보인다.

마주한 육지에는 예니 사원이 보이고....

낚시 바늘에 줄줄이 매달려 올라가는 손가락만한 정어리들이 보인다.

반짝반짝.

햇살이 강하게 비치지 않는데도 은빛 비늘의 정어리들이 반짝거린다.

하늘로 매달려 빛나게 올라가는 저 녀석들,

녀석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줄줄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 같다.

많이도 잡아올린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 언덕길을 올라가면 갈라타 타워가 나온다.

한 때는 포로수용소로, 또 한 때는 기상관측소로 사용되었다는 전망탑.

 

신시가지 탁심광장에서 갈라타 타워까지 이르는 이스티크랄(Istiklal) 거리.

보행자의 천국이다.

양쪽으로 상점들이 쭉 늘어서 있다.

얼마나 사람이 많던지...

 

이스티크랄 거리도 중앙에는 조그만 전차가 왔다 갔다 하지만

차가 주인인 다른 도로와는 다르게 여기는 걷는 사람이 왕이다.

 

다시 갈라타 다리를 걸어서 건너 구시가지 쪽으로 왔다.

어디선가 고등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오호라!!!

이것이 그 유명한 이스탄불의 고등어 케밥.

바다위에 배를 띄워놓고 흔들거리는 배 위에서 고등어를 굽고 있다.

지글지글... 기름진 냄새가 진동을 한다.

 

바케트 빵에 뼈를 발려 잘 구운 고등어 반쪽을 넣고 야채를 넣어주는 고등어케밥.

싸고도 맛있어 여행자들뿐만 아니라 터키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아~~~

오늘 아침 날씨는 예술이다.

이스탄불에 들어온 내내 비가 내리거나 날씨가 찌부둥했는데

오늘 아침은 햇살이 찬란하다.

호텔의 옥상에 있는 식당에 아침밥을 먹으로 올라갔는데

창문너머로 보스프러스해 너머로 떠오른 태양이 가득하다.

환상이다.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날은 보스프러스해로 배를 타러 나가야 한다.

며칠동안이나 기다려왔던 날이다.

보스프러스해로 떠나는 배를 타려면 갈라타 다리가 있는 에미노뉴 항까지 걸어와야 한다.

다리밑 식당엔 점심준비를 한다고 종업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갈라타 다리위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이 가득하다.

저 사람들은 직업도 없는지...

어제보다 더 많은 정어리들이 하늘로 끌려올라가고 있다.

햇살을 받아 더 반짝거리며...

처연하게 하늘로 승천하고 있다.

낚시줄을 타고...

 

신시가지 쪽도 오늘은 환하게 보인다.

갈라타 타워도 선명하고.

 

 

에미노뉴 항에서 보스프러스 거의 끝까지 가는 유람선 표를 끊었다.

맑은 날씨.

기분좋게 이스탄불의 에미노뉴 항을 떠난다.

 

떠나는 배 뒷편으로 이스탄불의 구시가지가 보인다.

예니사원과 슐레마니아사원.

이스탄불 사진이라고 하면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항구를 떠난 배는 오른쪽으로 돌마바흐체 궁전도 지나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보스프러스 대교도 지난다.

두 대륙을 잇는 두번째 다리, 파티대교가 보일 즈음

오른쪽으로는 루멜리 성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루멜리 성채는 보스프러스 해협의 유럽쪽에 있다.

1452년 메흐멧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지은 요새다.

마지막까지 골든혼 바다에 쇠사슬을 묶어놓고  테오도시우스 성벽안에서 저항하고  있던 비잔틴 세력은

루멜리 성에 터를 잡고 흑해쪽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으면서 지략을 펼친 메흐멧 2세의 공략에

결국 무너지고 만다.

골든혼쪽으로의 공략시도가 어려워 갈라타 지구에서 나무궤도를 깔아 군함을 육지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

군함에 말들을 싣고 말을 이용해서 어찌어찌 골든혼을 넘어가 구시가지를 점령했다는 이야기등은

이희수 교수가 쓴 이슬람에 관한 여러책들에서 읽은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주 기발했다는 생각은 했었는데...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읽어야 할 책이 또 하나 늘었다.  

 

우리는 유람선으로 거의 흑해가 보이는 지점인 루멜리 카바흐까지 갔다가

다시 육로로 돌아왔다.

갈라타 다리를 건너는 지점엔 여전히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어제처럼 고등어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저멀리 슐레마니아 사원도 찬란하고...

 

터키의 시장이라는 그랜드 바자르, 이집션 바자르에 간 날도 있다.

터키 기념품부터, 옷가지, 귀금속, 식료품까지 오만가지 물건들을 다 판다는 바자르.

 

그랜드 바자르의 원래 이름은 '지붕이 있는 시장'을 의미한단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부는 날씨에 바자르 구경은 마침 맞은 일이다.

 

바자르 안의 식당과 찻집코너.

시장안에서도 터키의 전통 분위기가 풍긴다.

터키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찻집... 그리고 터키식 기둥과 음악이 흘러나오고...

 

아야소피아 성당 뒷쪽을 돌아서 귤하네 공원을 지나 톱카프 궁전으로 돌아가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은 세개의 작은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대 오리엔트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 도자기 박물관이다.

그중 오리엔트박물관과 고고학 박물관은 유럽내에서도 유명하다.

입구에 들어서니 크고 작은 석관과 기둥들이 정면에 가득하다.

 

고대 오리엔트 박물관 답게 고대 바빌론 제국의 이슈타르 문의 색깔있는 타일

 

BC 1800년대의 바빌론 통치자의 상

너무나 오래된 세월치고는 너무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다.

3800년의 세월을 거쳐서 우리앞에 있다. 

 

이스탄불 시당국은 스스로 '유럽 문화의 수도'라고 불리길 원한다.

고대 바빌론시대의 조각앞에 선 우리...

경이롭고 고맙다.

 

BC15세기, 고대 앗시리아 시대?의 표준자로 사원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1/2 야드(YARD)는 팔의 길이

1 FOOT는 발의 길이

1 FINGER 등...

아마 옷감이나 밧줄을 사고 팔더라도 기준이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표준자를 만들어서 사원에서 보관하면서 기준을 제시한 듯하다.

 

야드나 피트 등 길이의 단위가 서양에서 나온 줄만 알았다.

아니었다.

고대 앗시리아에서 그들이 먼저 사용하고 있었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을 찾은 이유는 노트크기의 작은 점토판을 보기위해서 였다.

BC 13세기 히타이트와 이집트의 람세스2세가 전쟁을 벌이고 서로 평화협정을 맺은 점토판, 카데시 평화협정문이다.

3300년된 세계최초의 평화협정문이다.

협정문은 아카디아어(당시의 국제어라고 한다)로 씌여져 있다.

 

한참동안 카데시 협정문을 보고 있는데, 한무리의 한국인 단체관광객이 떠들썩하게 박물관을 들어와서 휘젓더니,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 한장씩 찍고서는 5분도 되지 않아서 나간다.

경비원이 우리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이라고 하니...

어색한 웃음을 띠며, 오히려 우리더러는 유물에 손을 대고 사진을 찍어도 좋단다.

바로 조금전 유물에 손을 올리고 사진 찍는 한국인을 막던 경비원이었다.

괜찮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한국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그들의 관심은 사진이었다.

카데시 협정문에도 관심이 없었고, 3000년 된 유물앞에서 우리의 광개토왕비와 비슷하다는 둥...

광개토왕비 보다 최소한 2000년은 앞선 문명인데...

우리것도 소중하지만 더 오래된 피부색 다른 선조의 유물도 소중한데...

 

히타이트의 스핑크스

이집트의 스핑크스보다 작고 훨씬 예쁘게 생겼다.

비록 부숴져서 여기저기 누더기로 붙어있지만...

 

고고학 박물관에서 유독 눈길을 끈 젊은이의 상

유명한 다른 그리이스, 로마의 신이나 황제의 모습보다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평범한 조각상

맘이 끌린다.

 

 목은 어디 달아나고 없지만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다운 부조...

 

소위 '알렉산더의 석관'이다.

쉽게는 알렉산더의 관이라고도 하지만 아니란다.

알렉산더를 존경했던 현재의 레바논의 시돈의 왕, 석관이다.

부조는 알렉산더군이 페르시아군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새긴 것이다.

제일 왼쪽에 말을 탄 이가 알렉산더 대왕이다.

 

원래 이 석관은 아름답게 채색되어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마치 석관에 천연색 돌인형을 붙혀놓은 듯하다.

 

석관의 다른 면...

한참동안이나 앉아서 석관을 보았다.

알렉산더 대왕과 그를 존경하는 이의 모습도 생각하고..

고대인들 ... 의리도 있었네..

자신의 석관에 존경하는 이의 행적을 새기고...

 

  

아야소피아 성당 뒤쪽을 돌아가면 톱카프 궁전이 나온다.

톱카프궁의 '예절의 문'.

술탄을 제외하곤 누구라도 이 문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

'톱카프'는 '대포의 문'이란 뜻이다.

1467년에 완성된 톱카프궁전은 보스포러스해협쪽에 대포를 걸어두었다고 하여 유래되었단다.

약 400년 동안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왕궁이다.

 

수백년은 되었음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득하다.

 

 왕궁안의 하렘 건물

금남의 건물... 술탄과 환관을 제외하곤 남자들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

술탄, 그의 부인, 환관, 여자 노예등의 크고 작은 방이 있다.

외부의 침입이나 노예들의 탈출을 막기위해 창문에는 창살이 있다.

 

 술탄의 도서관 앞에 있는 술탄의 샘

술탄의 샘에도 금색이 칠해져 있다.

톱카프 궁에는 술탄의 옷, 왕관, 보석 등이 전시되어 있지만 사진 촬영금지다.

많은 여행객이 술탄의 보석에 관심이 많은데...

우린 전혀... 그냥 스쳐 지나간다.

예언자 모하메드의 발자국과 그가 사용하던 칼도 전시되어있다.

 

술탄은 샘도 금색을 칠했다고 웃음 참지 못하는  터키의 천진난만한 아이... 

 

아야소피아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예레바탄 지하저수지... 일명 지하궁전.

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노플은 수많은 사람들이 사는 거대도시로 변했었다.

식량과 많은 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비잔틴 제국 초기에  지하에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었다.

높이가 약 10m, 길이가 140m, 총 330여개의 대리석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다.

저수지의 물은 약 20km 떨어진 교외의 숲에서 토관과 수도교를 통해 공급되었다고 한다.

 

 지하저수지의 물은 맑아서 물고기가 살고있다.

기둥을 자세히 보니 다르다.

무늬가 있는 기둥, 붉은 색깔의 기둥...

 

 

밑이 삼각형으로 시작되는 대리석 기둥.

대부분의 기둥이 대리석 종류이긴 한데... 자세히 보니 모양이 틀리다.

지하궁전?을 만들때 여기 흩어져 있는 신전에서 가져온 기둥이라고 한다.

에페소에서 가져온 돌도 있다고 한다.

 

 지하궁전의 한쪽 구석엔 메두사의 거대한 머리가 새겨진 기둥이 있다.

거꾸로 된 메두사의 머리...

액땜을 하기 위해서 만들었나..?

그 의미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아름다운 이스탄불...

오늘 저녁밤까지 합한다면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모두 엿새밤을 보낸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마음 한편으로는 이스탄불을 여행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마음 한편으로는 벌써 우리는 한국에 들어가 있었다.

엿새동안 어딘가를 부지런히 다닌 것 같으면서도

또 뭘 제대로 본 것이 없는 것 같은 게 이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 그냥 멍청하게 있은 시간은 거의 없으니 아주 많은 것을 보고 아주 많이 걸어다니고 아주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풀어 헤쳐져 정리가 되지 않은 것 같은 게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서 여행을 벌써 마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마지막이라고 긴장을 풀고 있은 덕에 부르사엘 내리면서 가방을 두고 내리는 게 그 시초였는지도 모른다.

*** 다행이 나의 정들었던 오렌지색 가방은 이스탄불 메트로 버스 사무실에서 되찾았다***

 

...

... 

여행은 낯선 것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익숙했던 많은 것들과 헤어지고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낯선 문화를 접하고 낯선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곳에 가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뭔가를 찾고, 끊임없이 몰랐던 누군가를 만나는 시간.

그리고 또 어디론가 짐을 꾸려야 하는 시간들에 적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 앞서 지난 몇년간 숱하게 다녀왔던 여행들.

그것들도 우리에게는 아주 소중하다.

두 사람이 함께 했든 아니든 간에.

그러나 그 때의 여행은 제대로 정리가 되지는 않았었다.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정리해보자고 늘 다짐은 했었지만

돌아가서는 그리 만만하게 시간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시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여유도.

늘 일에 허덕이고 있었고, 일을 해야 할 의무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다행이 블로그라는 것을 만들어서 여행을 정리하면서 해왔다는 것에 정말 감사한다.

돌아가면 또 여러가지를 다시 정리해야 하겠지만

순간순간 드는 느낌의 파편들이라도 블로그속에 붙잡아 두어서

전체 여행을 정리하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전 세계가 하나의 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교통도 통신도 다 발달한 21세기에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이제는 돌아간다.

이번 여행을 여기 이스탄불에서 마치고

우리는 다시 익숙한 것들로 돌아간다.  

사랑스런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