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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0 빚지는 인생

프리 김앤리 2010. 6. 12. 23:00

 

우리 아버지는 공무원이셨다.

매월 20일, 아버지의 월급날이면 어머니는 자식들을 쭉 둘러앉쳐 놓고 월급을 쪼개기 시작했다.

이건 이번 달 누구 학교 회비, 이것도 누구 회비,  이건 쌀 살 돈, 이건 누구 갚아 줘야 할 돈...

조마조마했다.

그냥 저렇게 다 끝나버리고 나서 우리들 용돈을 안주면 어떡하나?

애비 배고픈 건 모르고 저 배 고픔에 마냥 울어대는 새끼들처럼

이리저리 돈을 가르며 한숨짓는 어머니의 살림살이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나에게 할당되어 있는 한달치 용돈에만 목을 매고 있었다.

어떤 달은 쪼로로 앉아 눈만 끔벅거리고 있는 자식들이 귀찮았던건지 아니면 안쓰러웠던 건지

어머니는 집안 살림살이보다 우리 용돈을 먼저 나누어 줘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의 가계부야 어찌되든 내 것만 받아챙기고 얼릉  방으로 돌아와 그때부터 나의 가계부를 짜기 시작했다.

이건 차비, 이건 점심값... 이번 달에는 머리도 한번 잘라야 하는데...

반드시 써야 하는 차비나 밥값을 제외하고 나면 사실 거의 남는 게 없는 장사였다.

다른 친구들하고 비교하면 말할수 없이 초라한 용돈이었음에도

우리집에서는 용돈이라고 정해놓은 그 돈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예외도 없었다.

목욕을 가는 것도, 간단한 옷가지를 사는 것도, 그리고 간간히 사야 하는 자질구레한 학용품까지 내가 받은 용돈에서 처리했어야 했다.

모자라서 굶더라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는 냉정한 사회였다.

 

그래서 나의 가계부 예산은 사실 20일 그날 딱 하루용이었다.

며칠이 지나면  어김없이 내 지갑은 비어 버렸다.

중학교때나 고등학교때는 차비로 할당되어 있는 돈을 과자 나부랑이 몇개로 날려버리고 걸어다니기가 일쑤였다. 아니 거의 걸어다녔다.

그 때야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으니 밥 굶을 걱정은 없었다.

문제는 대학교때였다.

빛나는 20대의 청춘에 까짓껏 점심 한끼는 대충 떼우거나 굶거나 선배들을 등치면 되지만

도저히 걸어다닐 수 없는 곳에 있는 학교를 다니던 내게 차비는 참 문제였다.

그때 나의 구원투수는 용돈을 잘 쪼개쓰던 남동생의 책상서랍 안이었다.

그의 서랍은 다음달 용돈을  받을 때까지도 돈이 떨어지는 적이 없는 보물함이었다.

중학교를 다니던 동생이 아침 일찍 학교를 가고나면 살짝 동생방으로 들어가

'다음달 용돈받으면 갚아줄께'라는 쪽지 하나만 남기고 천원, 이천원을 무조건 들고 나갔다.

엄마한테는 말하지 마라고 사정까지 해두는데도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면 현관을 들어서기도 전에 나는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니, 또  강지 서랍에서 돈 빼갔제?  어째 그리 니는 요령도 없이 돈을 쓰노?"

동생한테 안 부끄럽냐는 둥, 빚지고 살면 좋냐는 둥..

콩알밖에 안되는 동생은 엄마 옆에 서서 또 뭐라고 그러고.

내 참 더러바서... 다시는 저 자식 돈을 안빌리리라 다짐해보지만 다음달이면 어느새 동생 서랍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공무원인 아버지의 월급으로 자식 여섯을 공부시키고 먹이고 입혀야 했던 어머니의 살림 철학은 단순 명쾌했다.

"빚지고 살면 안된다!"

오늘 다 써도 내일 또 돈을 벌면 되는 장사를 하는 집과는 달리 우리는 매달  들어오는 돈이 뻔하다는 것이었다.

계획과 다르게 돈을 써버린다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신은 공무원 아버지의 작은 월급으로 살아가기가 벅차 한번씩 외상이다 혹은 대출을 하기도 하셨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음달 월급에서 혹은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는 경우였다.

 

간혹, 아니 아주 자주 동생의 서랍을 넘보기는 했지만

그래서  나도 빚진다는 것은 인생의 패배? 혹은 실패?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다.

'빚지는 인생'

그래서 싫었다.

지 서랍을 함부로 열었다는 어린 동생의 모멸감(? ㅋㅋ) 느끼게 하는 눈빛도 싫었고 엄마의 잔소리도 싫었다.

그 때까지 내게 있어서 '빚을 진다'는 개념은 오로지 돈 하고만 연관되어 있었다.

돈을 빌리는 것이 빚지는 인생이라고, 그래서 그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가능하면 그렇게 하지 말고 살자고...

 

하지만 살다보니 돈과 관련되지 않는 '빚'이 더 많이 있는 세상을 만났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다보면 '빚지지 않는 인생'이라는 게 없더라는 거였다.

함께 살면 살수록, 다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인간은 인간에게 서로 기대고 베풀고 빚지고 나누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게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더라는 거였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가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이 들고가는 무거운 가방이 눈에 들어오고,

내가 힘들때 누군가가 위로해 주어 나의 어려움이 가벼워졌다면

어디선가 힘들어 하는 누군가를 발견하면 그의 친구가 되고 그의 어려움을 나누는 사람으로 되어야 했다.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이 없었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나면 그 사람 또한 나에게 언젠가는 무엇을 해주고 있었다.

꼭 돈이라는 것으로 빚지지 않아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빚이 아닌 게 없었다.

 

내가 빚지기도 하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빚지게도 하고...

혼자서만 외롭게 섬처럼 살아가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라는 게 결국 이런게 아닌가 하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것을 우리는 '마음의 빚'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겠지.

 

그래서 어느날 부터는 '빚지고 살자' '다른 사람을 빚지게 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오고 있었다.

그게 인생에 진짜 남는 장사라는 생각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형님네에는 빚을 왕창 졌다.

도착한 날부터 지금까지...

그전에 한번도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그냥 신세를 지고 있다. 빚을 지고 있다.

이번에 우리가 빚졌다. 다음엔 빚을 갚을 차례가 오겠지.

감사합니다.

 

토론토 대학에 다니고 있는 영준이, 그리고  형님, 회계사 공부를 하고 있는 은아.

 

조용한 주택가다. 덕분에 상쾌한 아침들이다.

 

조용하고 깨끗한 집. 

 

고마워!!! 영준아!!!

한국오면 '해운대' 알지?

 

 

* 글을 올리는 지금 여기는 캐나다 나이아가라폭포 옆 유스호스텔이다.

  여기 시간으로 아침 7시 반부터 월드컵 축구를 한다고 해서 유스호스텔 여기저기를 뒤지니 TV가 없다.

  인터넷을 통해서 축구를 보려고 시도하니 해외에서는 시청할 수가 없다는 메세지가 나온다.

  인터넷을 통해 1:0.... 후반에 2:0... 박지성이 한골 추가했다는 뉴스만 본다.

  우리도 즐겁지만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한창 신났겠다는 기분에 우리도 들뜬다.

  모두들 너무 좋았겠다.

  우리도 먼 나라 유스호스텔에서 축구를 보면서 응원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지만 미국과 국경을 접한 조용한 마을이다.

  캐나다가 축구를 못해서인지... 별로 월드컵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겨서 좋다.

  KOREA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