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20100915 비겁한 놈, 징한 놈

프리 김앤리 2010. 9. 15. 22:01

비겁한 놈.

힘 있을 때는 어디에 짱박혀 쪽도 못쓰고 깨갱거리고 있다가

주인님의 힘이 약해지자 물 만난 고기마냥 활개를 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쿡쿡 찌르고 쑤셔먹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사람의 그나마 조금 가진 걸 빼앗아 지 배를 채우는 놈.

 

질긴 놈.

수십년 몸속에 살아남아

그 많은 양의 술과 담배의 공격에도 끄덕않고 질기게 연명해온 놈.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상포진이란다.

어릴 적 앓았던 수두 바이러스가 몸 속에 기생하며 살고 있다가

몸에 면역력이 떨어지면서 다시 활동을 시작한거란다.

이 놈들은 사람의 신경을 타고 움직여서

환자에게 지독스런 아픔을 가져다주는 병이란다.

그것도 감각신경만을 골라 들쑤시고 다닌다며

의사는 많이 아팠을거라며 항바이러스제와 진통제를 처방해준다.

동생의 시어머니는 대상포진을 앓으면서

'애낳는 고통보다 더 힘들다'는 말씀을 하셨다나...

 

비겁한 놈들, 징한 놈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나서부터

사실 우리 둘 사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별스런 병이 아닐꺼라며 내심 서로를 위안했지만

순간 순간 '혹시' 하며 마음을 졸여왔다.

'큰 병이라면 도중 하차하지 말고 하던 여행을 그대로 계속해야 하고

 작은 병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가서 좀 쉬면서 병을 치료하고

 다시 여행을 나오자'라는 태연한 듯 하면서도 가슴 섬뜩한 말도 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 날짜를 바꾸어놓고 나서는

통증때문에 문득 문득 깨는 새벽녁 잠자리에서

남편은  "내가 없어도 살수 있겠냐?"는 말을 슬그머니 꺼내놓기도 했다.

45억년 지구의 역사속에서 한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이 찰나밖에 되지 않는다는

엄연한 진실을 이야기하면서도 곧 맞닥뜨려야 할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정리가 되지 않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의사 친구에게 이것 저것 증상을 적어 메일을 보냈더니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무리하지 말고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엄포를 놓았다.

돌아오면 바로 검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겠다며

친구야, 무조건 돌아오란다. 빨리 돌아오란다.

 

돌팔이 같으니...

하기야 왼쪽 갈비뼈 아래가 무지하게 아프고 어깨까지 아프다는 말만 했으니

왼쪽 갈비뼈 '아래'라는 곳이

길이로의 '아래'가 아니라  깊이로의 '아래'를 연상한 의사의 짐작으로는

왼쪽 갈비뼈 아래 있는 심장에 탈이 난 것이 분명한 것이라고 느꼈으리라.

아픈 지점 그 위 피부에 반점처럼 뭔가 토독토독 올라온 것이 있다고만 말했어도 되는데

우리는 그게 파스를 붙였다 떼어낸 자국으로 피부가 덧난 것이라고만 생각했으니

친구 의사가 돌팔이가 아니라

우리의 무지함이 만든 괜한 걱정이었음을 ...

 

대상포진이라는 게 아프기로 치면 장난이 아니라던데,

사실 남편은 그저 '좀 불편하다' ' 묵직하다'  '쿡쿡 쑤셔댄다'라는 정도로만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지구의 나이를 이야기하고 , 진화를 이야기 하고

대자연 앞에 인간은 겸손해야한다며  묵묵히 카메라만 들여대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고맙고 미안하다.

 

하여튼 지금은 한국이다.

병원에서 지어주는 약을 한 봉다리 담아와서 하루에도 몇번씩 약을 먹고

간호사를 하고 있는 시누이 덕분에 집안에 편안히 누워 영양제 링거만 맞으면 된다.

그리고 나는 텅빈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음식 재료들을 사와

그동안 슴슴하고 느끼하던 미국 음식에서 탈출하는

온갖 한국 음식을 간식에, 삼시 세끼까지 하루종일 해대고 있다.

 

이건 쉬라는 이야기다.

그동안 너무 무리했다는 경고다.

공짜로 우리를 캐나다, 미국까지 데려다줬던 마일리지 비행기 티켓은

꼭 그만큼, 지 역할만큼만 우리한테 해준 것 같다.

다시 미국엘 가려면 결국 돈주고 비행기표를 사야할까보다.

 

좀 쉴 작정이다.

덕분에 올해는 남의 나라에서 뜨는 한가위 보름달이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서 볼 수 있겠다.

비겁한 놈, 대상포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선물이다.

한달 정도는 그냥 아무것도 안하고 책이나 읽고 놀고 먹고 쉬어야겠다.

쉬면서 부산의 이곳 저곳을 산책삼아, 운동 삼아 다니면서 부산 이야기로 블로그를 채울까 싶다.

그리고 다시 원기 왕성해지면 못다한 우리의 여행을 계속 해야겠다.

 

그랜드 캐년을 마지막으로 일단 우리의 미국 여행은 일차로 정리했다.

그랜드 캐년을 떠난 우리들은 다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어지는

태평양 1번 도로의 어느 한 해변에서도 하루 밤을 잤었다.

태평양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저 바다 너머엔 우리 집이 있는 부산이 있다고..

일단.... 우선... 이번은... 미국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