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20101022 드디어 그랜드캐년 속으로 들어가다

프리 김앤리 2010. 10. 28. 23:58

 

드디어 그랜드캐년 깊숙한 그 속으로 들어갑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몇번씩이나 우리를 거부하던 그랜드캐년이 오늘은 우리를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잘 다녀왔습니다.

 

사실 지난번 미국 여행에서 그랜드캐년 아래까지 내려갔다 왔다면
이번 미국 여행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지난 여행중에 몸이 아파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그랜드캐년이었습니다.
두번씩이나 갔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다 하지 못하는 림트레일을 몇 Km씩이나 걸었으면서도
정작 아래로 내려가지 못한 그랜드캐년은 우리에게 여전히 가보지 못한 곳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들어가서 몸이 추스려지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랜드캐년으로 몸이 달았습니다.
 "다시 가자!"


왜 그리 그 속을 보고 싶었을까?

누구는 그랜드캐년에 몇번을 가보았는데 사실 뭐가 좋은 지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또 누구는 정말 재수(?)가 좋아 한번만에 저쪽 북쪽 노스림까지 다 보이는 화창한 날씨에 딱 맞아 떨어졌다며
미국 여행 이야기만 하면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본 그랜드캐년은, 미처 속으로 들어가보지 못해도 그 장엄함은 대단했습니다.
누구처럼 화창한 날씨로 노스림까지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깊게 패인 협곡, 천변만화하는 날씨, 광활한 자연만으로도 벅찬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20억년의 지구 역사를 직접 느낄 수 있으려면 그 속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지층 1Cm가 쌓이려면 일만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지층 1m가 쌓이려면 백만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2100m의 그랜드캐년 꼭대기에서 제일 아래 협곡까지라면 20억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차곡 차곡 쌓인 지층인 것입니다.


45억년의 지구 역사 중에서 20억년의 지층이 들어올려져 깊게 패인 협곡에 그대로 드러나는 유일한 곳.
그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었습니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인간으로

자연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간의 역사로 들어가 진짜 '시간'이라는 걸 느끼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그랜드캐년의 여러 트레일 중에서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Bright Angel Trail)입니다.
협곡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브라이트 엔젤트레일은 사진에서는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 있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로는 왕복 20Km 가까이 되는 플레투 포인트(Plateau Point)까지 갈 작정입니다.
깊이로 치자면  일천m 이상을 내려가는 길입니다.
지구의 나이로 치자면 10억년을 되돌아 가는 길이지요.

 

그런데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지금까지의 다른 산행과는 정반대로
그랜드캐년의 산행은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하는 길이라
체력이 따라 주느냐가 가장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또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날씨도 오늘의 주요 변수입니다.

 

자, 시작합니다.

 

몇발짝 걷지 않아 만나는 첫번째 석문입니다.
지난번에는 몸이 아파서 이 곳 조차 멀리서 바라만 봐야 했던 곳입니다.
그래도 깊이로 따지자면 벌써 한 10m는 내려온 겁니다.

 

10m - 일천만년 전의 지층.


진화의 역사로 따진다면 인간이 출현하기 전 시기까지 벌써 내려온 겁니다.
직립보행하는 인간의 역사가 400만년전이니까 우리가 4m 정도 내려왔을 때 보이던 지층이
인간이 출현했을 때 만들어졌다는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내려가야 할 깊은 협곡의 시작도 채 안되는 지점이었습니다.
지구의 역사속에서 인간의 출현은 정말 얕은 시간이었습니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이 엄숙한 진실로 다가옵니다.

 

저 아래, 저 끝.
구불구불 절벽길을 따라 깊은 협곡 속으로 다 내려가서
다시 그 길을 한참 걷고 , 또 다시 평지의 끝까지 걸어가야 Plateau Point가 나옵니다.
거기를 가야 깊게 패인 협곡 사이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진 속의 파란 대지를 따라 나있는 그 끝입니다.

 

절벽을 따라 난 길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위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점처럼 보입니다.

 

날씨가 맑은 동안 조금이라도 더 많이 걸어가려고 서두르느라
만나는 사람들과는 힐끗 스치면서 Hello, Hi가 다였는데
아이까지 업고 산아래서 올라오는 이 엄마에게는 눈길이 한 번 더 갑니다.
아이는 신나서 생글생글,  엄마는 뿌듯해서 싱글벙글.
 

별 힘들지 않고 내려온 것 같은데 그래도 제법 내려왔나 봅니다.
수평으로만 보이는 맞은 편 계곡의 산들이 이제는 우리 눈 높이 위로 있습니다.

 

거대한 지층을 마주합니다.
이 지층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오랜 세월의 과거로 돌아가야 할까?
이 때는 어떤 생물들이 출현했을까?

 

또 다른 석문도 하나 지납니다.

 

어제 그제 내린 비로 땅은 약간 질척거립니다.
그래도 대만족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것만 해도 대만족입니다.
이 정도의 장애물이야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장애물도 아닙니다.

 

첫번째 쉼터가 나옵니다.
1.5 마일 쉼터입니다.
2.4Km를 걸어온 것입니다.
깊이로는 345m를 내려온 것이구요.
3억년은 더 걸어왔군요.

 

혹시 계획한 곳까지 다 못가고 해가 져버릴까봐,
힘 있을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멀리 가려고
쉼터에서 쉬지도 않고 바로 갈길을 재촉합니다. 

 

시간은 천천히 가라고 하는데
마음은 빨리 빨리 내려가고 있습니다.

 

앞서의 한 무리들은 짐이 아주 많습니다.
이들은 오늘 이 계곡에서 야영을 할 모양입니다.
우리도 협곡 끝까지 내려가 있는 팬텀롯지에 하룻밤을 예약할 수 있었다면 그리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번 아프고 나니까 슬그머니 드는 걱정을 어쩔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몇달 전부터 예약이 다 되었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 반갑게 들리던 건 또 무슨 조화였을까요?

 

나이가 들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꿈 꿔왔던 것 들중에 이제는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나씩 지워간다고 했습니다.
그랜드캐년의 꼭대기에서 1300m 아래에 있는 팬텀롯지에서의 야영은
어느새 우리 스스로 지운 '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와서 보니까
다른 서양사람들은 그 꿈을 지우지 않고 여기를 왔나 봅니다.
그랜드캐년의 속을 걷고 있는 사람들,
야영장비를 가득 채운 키 큰 배낭을 메고 가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더 들어보입니다.

 

해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쓰~윽 하던 지리산 종주의 실력이면
여기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는데
그 놈의 대상포진이라는 놈이 우리를 나약하게 했었나 봅니다.

하여튼 자신의 꿈을 지우지 않고 계속 실천해 나가는 어르신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길입니다.

우리도 다시 꿈을 지우는 시간이 아닌, 꿈꾸고 이루어 나가는 시간으로 되돌릴 용기를 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무거운 짐을 당나귀에다 실어 올려 보내나 봅니다.
저렇게라도 해서 이 길을 걷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겠지요.


3박4일의 안데스 산맥 잉카 트레일, 7박8일의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까지 가는 길.
그 길에서는 포터들의 힘을 빌렸었습니다.
3~4천m를 넘는 높은산에 험한 산길, 그리고 고산증까지 겹쳐 오는 길이어서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오르지 못했을 산이었을겁니다.
우리의 짐을 지고 올라가던 잉카의 후예들, 네팔 친구들에게 미안함과 안타까움, 부끄러움과 고마움이
뒤엉킨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랜드캐년의 이 길은 지그재그로 나 있어서 아주 편한 길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체력을 믿지 못한다면,
체력의 한계로 짐을 다 지고 이 길을 갈 수 없는 사람이라면
당나귀에게 자신의 짐을 맡기고서라도 가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인간 포터보다야 당나귀 포터에게는 안타까움이나 미안함이 좀 덜할테니 말입니다.

 

아직까지 당나귀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는 우리는 마음 편하게 이 길을 걷습니다.
 

차곡차곡 쌓여진 지층이 바로 눈앞에 나타납니다.
1Cm, 1Cm 쌓여온 지구의 역사가 보입니다.

 

3마일 지점의 쉼터까지 내려왔습니다.
거리로는 4.8Km, 깊이로는 644m까지 내려온 겁니다.

 

단 한번도 쉬지 않고 6억년 이상의 과거로 돌아온 우리들은 여기에서 잠시 한숨을 돌립니다.
아직도 힘이 남아있다고, 날 좋을때 쉬지말고 가자고 재촉을 해보지만 남편은 서두르지 말잡니다.
저 멀리 보이는 곳에 사진도 찍고, 가져온 물도 마시고, 말린 과일 육포 땅콩 초콜렛등 간식도 먹잡니다.
맞습니다.
며칠전 우박비에 놀란 가슴때문에
하늘 구름에 바짝 긴장해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한참 남았습니다.
천길 낭떠러지 처럼 저 아래가 내려다 보입니다.

 

그랜드캐년 제일 꼭대기에서 시작한 '시간의 트레일'
중간 중간, 사람들은 '이제 그만!'이라며 발길을 되돌렸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길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는 길이 꼭 그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힘든 오르막길이기 때문입니다.
1.5마일 쉼터에서 그랬고, 지금 3마일 쉼터에서는 더 많은 사람이 걷기를 멈추고
다시 되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더 밑으로 내려가려는 입구에 떡 버티고 서있는 안내문도 현재 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경고 :'Down is optional, Up is Mandatory.'
       '내려가는 것은 옵션이지만, 올라가는 것은 의무이다.'


Down is optional은 조그만 글씨로 써놓고 Up is Mandatory는 아주 크고 진하게 새겨놓았습니다.

다른 산행과 달리 몇시간의 산행뒤에 힘이 다빠진 상태에서 다시 산을 올라야 하는 곳입니다.
섣불리 자만해서는 안되는 곳입니다.
건방지게 달라들어서는 안되는 곳, 겸손해져야 하는 길입니다.

 

물도 잔뜩 마시고, 가지고 온 간식을 한참 먹고도 호주머니 구석구석을 간식거리로 다시 채웁니다.
먹으면서 천천히 가게, 힘 안빠지도록 조심하게.

 

다시 구불구불 아래로 내려갑니다.

 

정말 많이 내려왔나 봅니다.
이제 거대 협곡 사이에 있는 우리를 발견합니다.

 

천천히 걸으려고 노력합니다.
처음 시작할때의 오만방자한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서두른다고, 힘 있다고 처음에 다 빼버리면 결국엔 이 길을 포기해야 함을 알기에 스스로를 달랩니다.

 

당나귀를 타고 올라오는 한 무리의 관광객을 만납니다.
아침 일찍 이 무리들이 먼저 내려가느라 우리가 오던 땅이 당나귀 발자국으로 그리 질척거렸나 모르겠습니다.
다들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씰룩씰룩 산길을 오릅니다.
그래서인지 뒤따라 오는 커다란 배낭 멘 사나이의 어깨가 더 무거워보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선택입니다.
자신의 선택이었을 겁니다.

 

제일 앞에 있는 가이드는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했으며
거기가 몇 미터 지점이었으며
저기 보이는 지점이 어디인지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리상의 어느 지점뿐만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 속에서 어느 지점까지 되돌아 왔는지도 물론 설명을 했을테지요.

 

마주 보이는 거대한 지층은 이미 선캄브리아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와 있습니다.
아득한 그 시기 이 지층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하면,
그 아득한 지층을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뜁니다.

 

꼭대기에서 보이던 아래 끝 협곡까지 거의 내려왔나 봅니다.
이제 곧 인디언 가든이 나올테지요. 

 

아래로 내려오니 나무 가득한 숲입니다.
진짜 가든입니다.
여기서는 야영도 할 수 있는가봅니다.
캠핑하는 곳이 있습니다.

 

마주 오는 저 어르신들의 배낭도 무겁습니다.
아마 지난 밤 야영을 하신 모양입니다.
자신들의 꿈을 접지 않은 고마운 분들인가 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멋진 어르신들입니다.

 

'밑바닥까지 갈 것인가'

'이제 그만 돌아갈 것인가'

고민합니다.
사실 아주 잠깐 고민했습니다.
날씨가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한 더 걸을 수는 있겠다...
여기서 팬텀롯지가 있는 콜로라도 강까지는 왕복 6마일 9.6Km, Plateau Point까지는 4.4Km 입니다.
우리는 플래튜 포인트까지가 목표입니다.
콜로라도 강이 다 내려다 보이는 그 곳,
그랜드캐년 협곡 전체가 다 올려다 보이는 그 곳까지 망설이지 않고 갑니다.

 

'It's your decision.'이라는 안내문이 보입니다.
맞습니다.
항상 선택은 자신의 결정입니다.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자신의 선택, 자신의 선택을 책임질수 있는 결정이어야 합니다.
너무나 뻔한 진실을 그랜드캐년의 깊은 협곡 속에서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꼭대기에서 인디언 가든까지의 길은 계속 내리막길이었지만
이 길은 평평하게 이어집니다.
꼭대기에서 보면 협곡 사이에 한없이 넓게 펼쳐진 대지의 끝까지 가는 길입니다.

 

아주 조금 내리막이 있을 뿐, 편안한 길입니다.

 

이제는 되돌아보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걸린 시간은 약 3시간, 다시 돌아갈 시간을 충분히 만들어 두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여유입니다.
일상에서 부지런히 뭔가를 해놓고 시간을 벌어놓았을 때 느끼는 여유와 비슷합니다.

 

북쪽, 노스림의 산들도 이제 가까이 보입니다.

 

되돌아가는 사람의 뒷 모습도 보입니다.
그의 앞에 있는, 지금 막 우리가 내려왔던 사우스림의 산들도 보입니다.
앞만 보고 마냥 내달려 내려왔던 시간과는 또 다른, 주변도 둘러보이는 순간들입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며 내달려 온 시간,
우리의 체력이 괜찮을까, 우리의 시간 안배가 맞을까? 우리가 돌아갈 시간까지 날씨가 괜찮을까?
남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나봅니다.

 

아주 추웠던 꼭대기보다 아래로 내려오니 기온도 훨씬 더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더욱 편안합니다.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 왔습니다.
Plateau Point입니다.
그랜드캐년 협곡 사이를 세차게 흐르는 콜로라도 강이 보입니다.

 

그 끝에 앉았습니다.
자연을 정복한 자의 오만함이 아니라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게 한 자연에 대한 겸손함으로 앉았습니다.

 

꼭대기에서 치자면 거의 1000m를 내려왔습니다.
이 지층이 만들어진 시기를 생각한다면 10억년은 된 곳입니다.
10억년 전에 만들어진 지층위에 서고 싶었습니다. 

 

10억년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섰습니다.

 

영혼을 가진 인간,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거대한 자연 앞에 섰습니다. 

 

그랜드캐년의 깊은 속에 우리가 들어왔습니다.
시간의 트레일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한참을 그냥 그대로 앉아있었습니다.
세차게 흘러내리는 황토빛깔 콜로라도 강은 쳐다만 보았습니다.

 

이제는 다시 돌아가야합니다.
저 높은 곳을 올라야 합니다.
다시 10억년의 세월을 올라가야 합니다.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힘이 다 빠져 지쳐 쓰러지면 안됩니다.

 

옆도 보지 않고, 뒤도 보지않고 그저 내달려온 시간.
돌아가는 길은 천천히 가야합니다.
이제 남은 길은 천천히 가야합니다.

 

함께 가는 동행이 있어 외로운 길은 아닙니다.
말없이 뒤따라 오고 있는 남편은 나의 영원한 벗입니다.

 

아름다운 숲이 나타납니다.
다시 인디언 가든입니다.

 

어제 저녁 숙소에서 싸온 도시락을 이제야 먹습니다.
아끼고 아껴둔 우리의 에너지입니다.
비빔밥. 멸치볶음, 삶은 계란, 그리고 물.
ㅋㅋ
이것 먹고 어떻게 힘을 내냐구요?
ㅋㅋ
여지껏 쉬지않고 입을 오물거렸습니다.
과일에, 말린 과일, 땅콩, 육포, 양갱, 초콜렛... 중간에 샌드위치도 반쪽 먹었구요...물.
그리 힘든 건 아니었으면서도 비지터 센터나 트레일 구석구석에 붙여놓은 무시무시한 경고문 때문이었습니다.
ㅋㅋ

잘난 척, 건장한 척 건방지지 않으려고 노력 많이 했습니다. 

 

다시 오르막길로 올라갑니다.
저 끝, 우리가 다녀왔던 Plateau Point가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너편 하늘은 시커멓게 변하고 있습니다.
비구름입니다.
비가 쏟아질 모양입니다.

별 걱정이 없습니다.
이제는 돌아갈 길만 남았는데 조금 내리는 비는 견딜 수 있습니다.
그저께처럼의 돌덩이만한 우박포탄 비만 아니라면...

 

한바탕 비가 쏟아졌습니다.
순간적으로 너무 세차게 내려 우산을 꺼내 쓰고 우비를 입고 난리를 쳤습니다.
이 길에 있는 사람들중에 거의 우리 둘만...
다른 사람들은 오는 비를 그저 맞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쬐금이라도 비를 맞으면 어찌되는 줄 아는 한국사람들의 호들갑이었나 봅니다.
펼쳤던 우산을 접고, 입었던 우비를 다시 접어 가방 뒤에 꽂았습니다.

 

한쪽 계곡에 피어오른 무지개를 뒤로 하고 우리의 길을 걸어올라 갑니다.

 

그랜드캐년의 산행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곳입니다.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일반 산행이 아니라
내려갔다가 올라가야하는 거꾸로의 산행.
거꾸로 된 세상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더욱 힘든 곳입니다.

내려가는 것은 선택이고, 올라가는 것은 필수라는 안내문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3마일 쉼터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3마일, 4.8Km만 올라가면 됩니다.

 

오전에 만났던 지층도 다시 만났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똑같은 순간이 다시 한번 되풀이 될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일반 산행에서는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입니다.
그 때는 힘들게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알같이 내려올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그랜드캐년의 산행은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하는 올라가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지쳐서 빨리 내달을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쉬엄쉬엄 올라가면서, 내려갈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까 지나쳤던 곳을 다시 만나는 이 길에서
반복될 수 없는 우리의 일방통행적 삶을 돌아봅니다. 

 

반복되지 않는 일방 통행의 삶을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오고 있을까?

 

저기 구불구불 산길에 앞서 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까 내려갈 때는 우리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사람들을 제쳐가며 앞서서 내려갔더랬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앞서 간들, 결국엔 똑같은 길로 돌아와야 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들보다 조금 더 먼저 왔다고 절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을 아니었습니다.

 

20억년의 지구 역사를 느끼고자 시작한 산행에서조차
찰나에도 해당되지 못할 그 순간을 더 먼저 나가고자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제치면서까지...

 

누군가는 그러더군요.
여행을 많이 다니더니 거의 '도사 수준'으로 변한다고 말입니다.
해탈이라나요?
'도사'라... '해탈'이라...
좀 더 멋진 단어였으면 수긍을 했을텐데...
뭐 '구도자' 정도로...

 

구도자가 아닌 도사라서 거부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감히 어디다대고 해탈이라는 말을 들먹일 수 있을까요?
그저 여행을 하다보면 시간이 많이 나게 되고,
시간이 많이 나면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이지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삶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두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저 노부부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보는 이유이지요.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게 변할 수 있는 우리의 선택인게지요. 

 

두번째 석문을 이제는 거꾸로 통과해서 올라갑니다.

 

지그재그 저 쪽 길에  저 아래로부터 동행하여 올라온 사람들이 보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제 고개만 들면 우리가 도착해야 할 끝,
오늘 아침 우리가 출발한 시작지점이 보입니다.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 천천히 가는 여유.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체득하고 있는 진실인가 봅니다.

 

다시 한번 지층을 바라봅니다.
지구의 역사를 바라봅니다.
10억년전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지구의 나이를 봅니다.
그리고 그 세월 진화해온 생명체들을 봅니다.
아직 인간이 출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원시인이라고 배워온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출현이 400만년전 이라니까
어쩌면 아직도 이 지층까지 와도  포유류조차 등장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또 한번 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협곡과 구불구불한 절벽길, 그리고 숲 오솔길, 평평한 대지의 길... 그 끝에 우리가 서있었던 지점을 바라봅니다.
햇살이 비치는 순간, 구름이 하늘을 덮어버리는 순간.
순간 순간 달라지는 색깔이 달라지는 오묘한 그랜드캐년입니다.
 

이제 거의 다 올라왔나 봅니다.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처음처럼 그랜드캐년의 산들이 아래로 내려다 보입니다.

 

그래도 아직 조금은 더 가야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 발로 오르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 산입니다.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첫번째 석문을 통과합니다.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갑니다.

 

오늘의 트레일에서 유독 많이 만났던 프랑스 사람들과 함께 마지막을 올랐습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칩니다.
스스로에게 보내는 박수입니다.

우리도 하이파이브를 했습니다.

 

지구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지층을 우리 눈으로 보겠다고 기어이 속으로 들어간 그랜드캐년.
그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지구 20억년의 역사. 그 아득한 세월.

다시 그 위에 포개어지는 지금 우리의 삶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