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지금은 여행중 /10월 터키

<터키 여행> 터키의 아타투르크, 케말파샤

프리 김앤리 2011. 12. 27. 16:55

 

 

<터키의 국부, 케칼파샤>                     

                                                                      매일경제신문 2010. 12. 3.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아직도 터키에서는 공적 영역에 여성의 차도르를 허용하지 않는다.

무슬림 여대생이 종교적 신념으로 차도르를 고집한다면 그녀는 결코 대학문에 들어설 수 없다.

1928년 이후 지켜지는 강력한 세속주의 원칙 때문이다. 그동안 수천 명의 여대생이 차도르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퇴학을 당했다.

대학 캠퍼스에서만은 차도르를 허용해 주자는 논의는 아직도 터키 사회를 달구는 뜨거운 감자다.

이에 비하면 프랑스에서 일고 있는 학교에서의 차도르 제한 조치는 오히려 가벼워 보인다.

 

 

◆ 결단과 실천의 리더십

99%가 이슬람을 믿고 있는 터키에서 차도르 전통과 코란 언어인 아랍어를 근원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를 과감하게 실천에 옮기고

이를 헌법에 명문화한 지도자가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다.

그는 결단과 실천의 리더십으로 터키의 근대화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성취를 이뤄냈다.

후일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아타튀르크는 왕정을 버리고 공화정을 선포했으며, 헌법에 명시된 이슬람교 국교 조항을 폐지했다.

많은 개혁정책 중에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역시 1928년에 단행한 문자 개혁이다.

아시아ㆍ아프리카ㆍ유럽 3개 대륙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600여 년간 유지해 왔던 오스만 대제국이

어이없이 일순간에 무너져 버린 가장 큰 이유가 백성이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터키어를 아랍 문자 대신에 라틴 문자로 표기하게 하고, 스스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직접 가르치는 열정을 보였다.

오늘날 터키 국민 대부분이 문맹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문자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이러한 열정과 노력이 밑받침된 것이다.

물론 엄청난 저항이 뒤따랐다. 특히 이슬람 보수층의 좌절과 조직적 반발은 너무나 격렬하고 끈질겼다.

그러나 아타튀르크는 세 가지 확신을 가졌다.

첫째, 터키가 진정으로 발전하고 유럽과 어깨를 맞대는 선진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종교가 정치에 간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둘째는 국가를 넘어서는 이슬람적 연대보다는 철저히 국민국가 중심주의로 가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셋째는 사회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의 능력 발휘와 사회 참여에 대한 완전한 양성평등 지향이었다.

그리고 그는 투철한 사명감과 흔들리지 않는 원칙으로 이를 관철해 냈다.

실제로 터키에서는 탄수 칠레르라는 최초의 민선 여성 수상을 배출했으며,

간통죄와 사형제까지 폐지하면서 이슬람과 서구식 발전의 조화와 공존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 조국을 향한 불꽃 같은 열정과 사랑

아타튀르크가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해 오스만 제국의 젊은 장교로서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부터다.

특히 터키 영토를 점령한 외국군을 몰아낸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그는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1923년 터키공화국을 건국했다.

1938년 사망할 때까지 아타튀르크는 터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일관되게 개혁정책을 주도했다.

그 결과 오늘날 터키가 EU의 일원이 되고자 할 정도로 서구화하고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것은 조국을 향한 불꽃 같은 정열과 사심 없는 헌신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재산을 남겨놓지도 않았고, 조국 터키와 결혼해 자식을 두지도 않았다.

아타튀르크가 주창한 6개의 기본 원칙, 즉 공화주의ㆍ민족주의ㆍ국민주의ㆍ국가주의ㆍ세속주의ㆍ개혁주의는

많은 제3 세계 국가의 통치 원칙이 되었으며 서구와 공존하면서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성공 사례는 이슬람 국가의 근대화에 큰 기폭제가 되었다.

물론 오늘날 아타튀르크는 일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지나친 우상화와 강요된 신비화가 가져다주는 사회의 경직성과 종교적 전통에 대한 억압이 자주 논쟁에 휩싸인다.

정치 지도자의 우상화가 거의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 북한의 김일성과 함께 아타튀르크 개인 숭배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럼에도 아타튀르크는 지금 터키가 추구하고 있는 EU 가입 문제와 함께

 터키가 걸어가야 할 미래에 대한 확고한 길잡이로서 터키인의 마음속에 살아 세계적인 선진 무슬림 국가로 나아가는 정신적 표상이 되고 있다.

 

<아타투르크 이야기>

하나 : '아타투르크'는 '국가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1934년 터키 국회가 케말파샤에게 아타투르크라는 명칭을 수여한다.

둘    :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다.

          그가 마지막으로 집무했던 이스탄불의 돌마바흐체 궁전의 시계는 그 이후로 시간을 멈추었고

          매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에는 전국적으로 1분간 묵념이 실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