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지금은 여행중 /10월 터키

이스탄불의 역사

프리 김앤리 2012. 9. 14. 14:14

 

 

지금의 이스탄불이 있는 땅에는 트로이 전쟁 이후 수백년이 지난 BC 10세기경 최초의 정착이 이루어졌다.

 

BC 7세기 중엽 그리스인의 식민도시로 창건되어 비잔티움이라 불리었다.

비잔티움이라는 명칭은 '비자스'라는 한 그리스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그리스를 떠나기 전 델피 신전에서 새로운 식민지로 적당한 지역에 대한 신탁을 받고자 했다.

그가 받은 신탁의 내용은 '장님들이 사는 반대편에 도시를 건설하라'는 것이었다. 길을 떠나 보스프러스 해협에 다다른 비자스와 그의 일행은

아시아 지역에 살면서 반대편에 있는 천연항구(골든혼)를 알아보지 못하는 칼케돈인을 눈 뜬 장님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델피에서 받은 신탁대로 지금의 톱카프 궁전 자리에 도시를 건설하고 도시의 이름을 비잔티움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비잔티움은 천연항구의 골든혼을 중심으로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무역로의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BC6세기에는 배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서 보스프러스 해협을 건너온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에게 비잔티움은 함락된다.

이후 아테네, 스파르타, 다시 아테네의 영토가 되었다가 로마제국의 영토가 된다.

 

 

AD 330년 로마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기면서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으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이름지었다.

콘스탄니누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콘스탄니우스가 이 도시에 아야 소피아 성당을 짓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로마 제국은 힘이 약화되다가 결국 395년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동로마 제국과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힘이 약해진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 족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였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와 콘스탄티노프를 중심으로 약 1000년간 더 번영을 누리며 발전했다.

이러한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다스릴 때 전성기를 맞았다.

아야 소피아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에도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등장한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체제를 정비할 즈음인 960년 무렵,

투르크의 한 부족이 오늘날 중앙 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부근으로 이주했다.

이곳은 일찍부터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때 부족을 이끈 사람이 셀주크 장군이었는데 훗날 서아시아 이슬람 세계를 다시 통일하고 오늘날 터키 부근으로

이슬람교가 퍼져 나가는 기초를 만들었던 셀주크 투르크 제국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셀주크 부족이 교역로를 따라 세력을 확장하자, 다른 투르크계 부족들도 잇따라 셀주크의 지휘 아래 몰려들었다.

셀주크제국은 여러번의 전투 끝에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시켰고

마침내 지금의 터키 지역인 아나톨리아 지역도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세력권에서 투르크족이 지배하는 이슬람 세력권으로 흡수시켰다.

 

셀주크 투르크는 11세기가 전성기였는데 이슬람 세력에 대해 기독교를 지키자는 유럽쪽의 십자군과 여러차례 전쟁을 치루었다.

 

투르크 족은 십자군 전쟁등을 치르면서 하나의 거대한 국가로 지속되지 못하고

셀주크 제국 이외에도 여러 튀르브 부족국가들의 땅의 되었다. 이런 부족 중의 하나가 부르사를 중심으로 하는 오스만 투르크였다.

오스만 투르크는 14세기 중반 차낙칼레 해협을 넘어서 유럽 쪽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1449년 비잔틴 제국에는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제위에 오르고, 2년뒤인 1451년, 메흐멧이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되었다.

19세의 젊은 술탄은 곧바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나서 1452년 보스프러스 해협의 아나돌루 히사르 건너편에 루멜리 히사르(성)를 축조한다.

콘스탄티노플은 7주가늬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함락되고 정복자로서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젊은 술탄 메흐멧은 Fatih(정복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메흐멧 2세는 아야소피아 교회를 곧바로 회교도 사원인 자미로 바꾸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를 이 곳으로 옮긴 뒤 도시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명명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줄어든 도시 인구를 보충하기 위하여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한다.

그후 파티( Fatih ) 술탄 메흐멧은 톱카프 궁전 건축을 시작했다.

이스탄불을 차지한 이후 100년동안 오스만 제국은 중동과 발칸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투르크 해군은 에게 지역의 섬들과 지중해의 아프리카 해안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오스만 제국의 최절정기는 술탄 슐레이만(1520~1566)의 재위 기간이었다.

슐레이만은 거의 모든 전쟁을 손수 지휘하며 대부분을 승리로 이끌어 북부 아프리카 전체, 동유럽 대부분과 러시아 남부를 호맣해서

로마 제국의 영토에 맞먹는 영토를 획득했다.

하지만 슐레이만 이후의 술탄들은 무능력하였으며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군사조직이었던 예니체리의 잦은 반란으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절대군주의 서유럽과 다르게 오스만 제국은 경제가 황폐해졌고 세력이 점차 쇠퇴해갔다.

마침내 제 1차 세계대전을 맞아 오스만 제국은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독일의 편에 서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재촉했다.

 

 

오스만 제국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독립 운동을 일으킨 무스타파 케말은 1922년 그리스를 물리치고 마침내 독립 운동을 승리로 마무리 지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선포하고 제 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세운 터키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의 부패로 상징되던 이스탄불을 떠나 앙카라를 수도로 정하였다.

이로써 이스탄불이 누려온 수도로서의 화려한 천년사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 '수도'라는 호칭은 앙카라에 내어주었지만

이스탄불은 여젆 터키 공화국의 경제 수도이자 문화수도이다.

지금도 인구 천만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인 이스탄불을 예전의 영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계인의 수도'다.

                                    -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처음 읽는 터키사] & 강용수 지음 [터키의 유혹]에서 발췌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