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투어야여행사 단체배낭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1>
이게 한 며칠이나 지나고면 또 모르겠다.
기가 찬 건 이게 여행 첫날이라는 거다.
성당이 많은 유럽을 한참 다니다보면 처음의 설레임이나 감동이 차차 사라지고 이게 그거 같고 그게 그거 같은 무딘 순간을 맞게 된다.
우리 나라 여행을 한답시고 전국의 사찰들을 돌아볼 때의 심정과 비슷하다.
사찰 처마나 기둥의 모양, 현판의 글씨등이 그저 정지된 화면처럼 보여
그렇게도 자랑하는 고고한 역사 조차 주절한 설명처럼 한 귀로 들어와 다른 귀로 나가버리는 때 말이다.
그럴 때면 처마 끝의 날렵한 선이나 뚱뚱한 몸매를 자랑하는 육중한 기둥에 눈이 가기 보다는
바람따라 울고 있는 풍경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어느 마루의 한 귀퉁이에 털썩 주저앉아 그저 너른 마당이나 보고 있기 일쑤다.
그곳의 역사가 아무리 거창한 들 그 때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만 할 것이며
국보에 보물에 온갖 치장을 하여도 대웅전 귀퉁이 종이문에 기대서서 바라보는 산세만 하겠는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세계 유명 도시의 유명 건축물이나 유수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딕양식의 성당의 모습이
어느 정도 물릴때가 되면 화려하고 복잡한 성당 앞이나 도시 전체가 다 내려다 보이는 어느 건물의 꼭대기보다
어느 후미진 골목을 찾게되며 거기서 문득 만난 빨래, 혹은 돌틈을 비집고 올라오는 작은 꽃잎 하나에 오랫동안 눈길을 주고는 한다.
유명하다는 것이 시들해진다는 것은 그래, 그것의 필요조건은 적어도 며칠이 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안봐도 충분히 뭔가를 본 것 같은 충만감, 아니 적어도 몇백만원은 들여서 떠나온 여행이니 본전만은 뽑고 난 이후의 상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이번 여행은...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목표로 떠나온 보름간의 우리 여행은 첫날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다.
우리 동네 슈퍼와 별다를 바 없는 흔하디 흔한 슈퍼에 들어가
그냥 어슬렁어슬렁 거리다가
수박 한덩어리를 덜컥 사들고 나와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가방 안에서 칼을 꺼내들고 수박을 쪼개고
우걱우걱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와서 지금 우리가 뭐 하고 있냐?'는 항변을 어느 누구 하나 말하는 이가 없었다.
굳이 그곳이 여행을 떠나온 헝가리가 아니어도 전혀 상관없을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물이 줄줄 흐르는 수박을 먹으면서 키득거렸다.
우리가 앉은 벤치 바로 옆에는 아리따운 여인 한명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는데
우리가 걱정한 것은 우리의 소란스러움으로 그녀의 독서활동에 방해를 주는 게 아닌가 하는 거였다.
급기야 예의하면 한 예의하는 뚱교수님이 살포시 그녀 곁으로 다가가 당신도 수박 한 입 먹겠냐는 질문(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ㅋㅋㅋ)과 함께
떠들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의 시끌벅적함에도 아랑곳않고 그녀는 자리를 뜨지 않고 너무도 꼿꼿이 책을 계속 읽었다.
그 와중에 순남쌤은 우리 바로 옆에 있던 나무에서 집을 짓고 있는 벌들을 발견했고
우리가 흘려대는 수박의 단맛에 벌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누군가가 얼마전 말벌에 쏘여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했고 수박을 들고 있던 우리의 손과 달달한 향기를 내풍기고 있던 우리 몸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수박을 우둑우둑 씹어 삼키고 누군가는 재빠르게 물휴지를 꺼냈고, 수박 잔해들을 신문지에 쏟아붓고 손을 털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순남쌤은 '우리가 가만 있으면 벌은 공격하지 않을거'라며 전문가답게 말하고 있었고
뚱 교수님은 어느새 책을 읽고 있던 헝가리 여인에게 다가가 말벌을 피해야 한다는 친절을 베풀고 있었다.
ㅋㅋㅋ
그랬다. 첫날 우리의 모습이었다.
우리들 중 몇은 여행을 같이 한 경험이 있어 서로 안면이 있기는 했으나 나머지는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마치 오래된 친구들처럼 손발이 척척 맞았고 편안했다.
글루미 선데이로 유명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라면
우리는 뭔가 세련된 폼으로 거리를 걸어야 하고, 유럽으로 나들이 나온 흥분에 한껏 들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여행자들이라고는 통 보이지 않는 어느 뒷골목으로 들어가 벤치에 퍼질러 앉았다.
난생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는데(내만 빼고) 우리는 뭔가 할 이야기들이 많았다.
씨~원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누군가 말했고 발빠른 태현쌤은 어느 순간 까페로 향했고 돌아온 그의 두 손에는 시원한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한껏 물오른 여름 나무들의 초록 이파리가 팔락팔락 거렸고 이파리들 틈새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오페라 하우스 앞의 근엄한 쇼팽과는 달리 뒷 길에서 만난 쇼팽은 삐쭉 솟아나온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있었고
긴 손가락의 양팔을 쭉 뻗은 그에게 우리는 당연한 듯 안겼다.
그의 무릎에 턱을 괴고...
그의 팔 밑에 안기며...
때로는 그의 팔을 잡아당기는 놀이를 하였다.
우리의 오라비들(?)은 그의 콧구멍을 쑤시기도 하고
그의 손아귀에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2013년 7월, 우리들의 동유럽 첫날이 그랬다.
...
잘못하면 맞아 죽겄다.
비싼 돈 주고 가서 아무것도 안 한 것인냥, 아무것도 안 본 것 처럼 우리의 여행을 폄하했다며 같이 간 친구들한테 맞아 죽겄다.
ㅋㅋㅋㅋ
기다리시라.. 우리들의 화려하고 화려한 여행이야기는 앞으로도 쭈~욱 계속 될 터이니~~~
...
그런데 여기서 잠깐. 절대 넘어갈 수 없는 한 장면.
뚱 교수님. 이건 뭔 시츄에이션?
나는 수박을 들고 가고... 교수님은 이미 수박 한 통을 배에 넣고 가고...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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