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지금은 여행중 /10월 대만

대만의 역사

프리 김앤리 2014. 9. 29. 14:01

 

 

 

 

 

 

 

 

 

 

글 옮김 :  [네이버 지식백과] 타이완의 역사 (타이완 개황, 2010.6, 외교부)

 

 

1. 타이완의 네덜란드 식민시기 이전 역사(~1624년)

   타이완(臺灣)에는 약 500여 개소에 이르는 선사유적지가 있다. 이 선사유적지에서 출토된 출토물로부터 추정한 것에 따르면

   선사시대의 타이완에는 말레이-인도네시아 계통의 종족이 거주했다. 이후 오랜 세월을 두고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타이완에 정착하였다.

   1590년에는 일단의 포르투갈 선단이 타이완에 도착하였다가, 타이완 북부지역에 잠시 거주하였다.  

   이들은 타이완을 ‘아름다운 섬(Ilha Formosa)’이라고 부르고 타이완을 이 명칭으로 서양에 소개하였다.

 

2. 타이완의 네덜란드 식민시기(1624년~1662년)

  1624년 네덜란드의 동인도(東印度)회사가 타이완(臺灣) 남부의 젤란디아(Zeelandia) 요새와 현재의 타이난(臺南) 지역에 ‘안핑(安平)’이라는 소규모 거주지를

  건설하였다. 1626년 스페인이 현재의 지룽(基隆)에 요새를 건설하고, 산살바도르(San Salvador)로 불렀다. 1629년 스페인이 현재의 단수이(淡水) 지역을

  카스틸로(Castillo)라고 부르고 이 지역에서 식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1642년 필리핀 내란으로 인해 스페인의 타이완 북부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상황에서 네덜란드가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북부 지역까지 점령한 후, 젤란디아 요새를

  식민수도로 결정하였다. 네덜란드는 1642년부터 동인도회사를 통해 타이완을 관할하였다. 총통을 임명하고 중국인 및 토착인에 대한 과세 등을 실시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이후 타이완을 이 지역의 교역과 해운의 중심지로 육성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비단, 도자기 및 약재를 수입한 후, 일본 및 네덜란드로

  재수출하였다.

  1644년 만주족이 명(明)나라를 침입하여 중국 대륙이 혼란에 휩싸이자, 중국 푸젠성(福建省) 남부, 광둥성(廣東省) 동부 지역의 많은 중국인들이 대륙으로부터

  타이완으로 이주하였다. 그러자 네덜란드는 중국인들에 대해서 농지 소유를 불허하고 중과세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중국인들은 항거하면서

  1652년 궈화이이(郭懷一)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기반이 크게 약화되었다.

  만주족의 대륙지배에 항거하면서 명나라의 재건을 도모하던 정청궁(鄭成功)이 1662년 네덜란드 잔류 세력을 축출하고 안핑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였다.

 

3. 타이완의 반(反)청 항쟁기(1662년~1683년)

   정청공(鄭成功)과 그의 아들 정징(鄭經)은 유교 교육을 실시하고 중국식 법제를 시행하는 등 타이완(臺灣)에 중국식 관습과 문화를 이식하였다.

   한편, 정청공과 정징은 군대를 훈련시키고 대륙과 마주보는 해안에 성벽을 건설하는 등 청(淸)나라에 대항하였다. 이 기간 중에도 청나라의 압제를 피하여

   타이완으로 이주하는 중국인들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682년 정징이 사망하고 12세의 어린 아들이 그의 뒤를 승계하자 청나라는 1683년에 군대를

   파견하여 타이완을 점령하였다.

 

4.타이완의 청나라 왕조 통치시기(1683년~1895년)

   청조(淸朝), 즉 청나라 왕조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타이완(臺灣)에서는 쌀, 대나무 및 장뇌(樟腦) 농업이 집중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대륙으로부터 많은 본토인들이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환금성이 높은 장뇌 채취에 종사하였다. 타이완은 쌀, 설탕 및 차의 생산이 풍성하여 중국 대륙 등에 수출하였다. 타이완은 농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19세기에 들어서는 영국, 미국, 프러시아(Prussia) 및 일본 등 당시 제국주의 세력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청나라는 1858년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한 후 안핑(安平)과 지룽(基隆) 등 타이완의 4개 항구를 외국에 개방하였다. 이후에도 제국주의 열강은 타이완의 주요 지역을 공략하고

   거점화하려는 노력을 지속하였다.

   청나라는 제국주의 열강이 타이완에 대한 침탈을 계속해오자 선바오전(沈葆楨) 및 딩르창(丁日昌) 등을 파견하여, 타이완의 계속적인 개발과 방어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청나라는 1822년 타이완을 청나라의 22번째 성(省)으로 편입시키고 그 다음해인 1823년에는 리우밍촨(劉銘傳)을 최초의 성장(省長)으로 파견하였다.

   리우밍촨은 타이완을 3개 부(府), 1개 주(州) 및 3개 청(廳)으로 나누는 등 타이완의 지방행정 조직을 체계화하고, 교통·우편·통신망을 정비하는 등 타이완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1895년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맺어짐에 따라 청나라는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하였다. 리우융푸(劉永福) 등 타이완 주재 청나라

   관리들과 타이완의 토착세력들은 일본에 대한 타이완 할양에 반대하였다. 그리고 1895년 5월 25일 타이완의 독립과 타이완민주국(臺灣民主國)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1895년 10월 21일 일본은 타이완의 독립 움직임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5. 타이완의 일본 식민시기(1895년~1945년)

    일본은 타이완(臺灣)에 대해 50년 동안 식민통치를 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이 기간 동안 타이완을 일본 본토에 대한 식량 공급기지 및 일본 공산품의 소비기지화하기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였다. 일본은 식민초기인 1895년부터 1918년까지 타이완에 대하여 잔존 저항세력을 제압하고 일본식 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집중적으로 경주하였다. 특히 일본은 철저한 경찰 통제, 전 지역에 걸친 토지 조사, 도량형 표준화 등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식민중기인 1918년부터 1937년까지는

    타이완에 대한 통치를 공고화하기 위하여 일본어 교육을 의무화하고 문화 동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식민후기인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타이완인에 대한 이른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특히 일본식 이름의 사용을 의무화하고 신사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6. 타이완의 1945년 이후 역사
  1) 중국국민당의 타이완 이주기

    중국국민당(KMT)1)은 1945년 8월 일본이 타이완(臺灣)을 연합국에 양도한 후 국부군(國府軍)을 타이완에 파견하여 인수작업을 실시하였다.

    타이완 거주민들은 초기에는 국부군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국부군이 부패하고 타이완 거주민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들에 대해 점차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2월 28일, 이른바 ‘2.28 사건’이 발생하였다.

    탈세 담배를 팔던 한 노파가 담배를 강제 몰수한 연주공매국(煙酒公賣局) 직원들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폭행을 당하고, 이를 구경하던 행인 한 명이 총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관할 경찰서가 오히려 가해자를 비호하자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공매국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고 이 시위가 타이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타이완의 여론 주도층들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하여 ‘2.28사건처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자 국부군은 21사단을 타이완에 파견하여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처리위원회 소속 타이완 여론 주도층 대부분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본토인들과 타이완인들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1949년 5월 중국국민당은 공산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타이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30만 명의 국부군을 타이완에 진주(進駐)시켰다.

    그리고 중국국민당은 1949년 10월 광둥(廣東) 등지에서의 대규모 접전에서 공산군에게 패배한 이후 12월 7일 타이완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이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미국 제7함대에 명령을 내려 타이완 방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1954년 3월 3일 미국과 타이완 사이에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1958년 8월 23일 중국군이 진먼다오(金門島) 지역에 대규모 포격을

    실시한 이른바 ‘8.23 전투’가 발발했다.

 

  2) 중국국민당의 타이완 정착기

   타이완으로 이주한 장제스(蔣介石)의 중국국민당(KMT) 정부는 토지개혁 및 연속적인 4개년 계획 등 타이완 경제 부흥정책을 실시하였다.

   이 정책은 제한적인 국내수요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고도의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이었다. 그리하여 타이완은 1962년부터 1985년까지 연평균 9.3%의 높은 경제성장률

   을 기록하였다. 타이완은 1970년대에도 고도경제성장을 계속해서 이루어갔으나 외교적으로는 고립화의 추세가 시작되었다. 구체적으로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으로부터 축출되었고, 미국 및 일본과 단교하였다. 1970년대 이후 타이완에는 국내정치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1975년 4월 장제스 총통이 사망하고,

   후임으로   옌자간(嚴家淦) 총통이 취임하였다. 1978년 3월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취임하였다. 1988년 1월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며, 장징궈 총통이 사망하고, 리덩후이

   (李登輝) 총통이 취임하였다.

 

3) 타이완의 리덩후이 총통 시기

    타이완 출신으로서는 최초로 총통에 취임한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기존의 장징궈(蔣經國) 총통 시기의 경제 정책 및 민주화 정책을 지속하였다.

    리덩후이 총통은 1988년 1월 계엄령을 해제한 데에 이어 1991년 5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2)을 폐지함으로써 타이완의 민주화 추진을 위한

    법적인 기본 장애를 제거하였다. 리덩후이 총통은 이 밖에도 국민대회(國民大會), 입법원(立法院), 총통(總統) 및 부총통(副總統) 직선 등 정치개혁을 가속화하였다.

    리덩후이 총통은 1989년 복수정당을 허용하고, 1991년 최초의 국민대회 직선을 실시하였으며, 1992년 최초의 입법원 직선을 실시하였다. 리덩후이 총통은

    1994년 최초의 타이완 성장 및 타이베이(臺北) 시장, 가오슝(高雄) 시장의 직선을 실시하였고, 1996년 최초의 총통 직선을 실시하는 등 민주화의 진전을 이루었다.

 

4) 타이완의 천수이볜 총통 시기

  2000년 5월 20일 타이완 최초로 야당인 민주진보당(DPP)3)의 천수이볜(陳水扁) 주석이 총통으로 취임하였다.

  집권 1기의  천수이볜 총통은 중국 공산당이 타이완에 대해 무력 동원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사불일몰유(四不一沒有)4)’ 양안(兩岸)5) 정책을 발표하였다.

  천수이볜 총통은 2002년 7월 18일 ‘도전 2008 국가발전중점계획’을 수립하여, 타이완을 아시아·태평양기업 운영 본부로 육성하는 방안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금융, 교육, 사법, 정치 등 4개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천수이볜 총통은 2001년 1월부터 진먼(金門), 마쭈(馬祖)와 중국 푸젠성(福建省) 사이의 소3통(小三通)

  을 일방적으로 실시하여, 계급용인(戒急用忍)6) 정책을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등 변화를 모색하였다.

  천수이볜 총통이 2002년 8월 「일변일국(一邊一國)론」을 발표함에 따라 양안 관계는 경색(梗塞)되었다.

  2003년 8월 천수이볜 총통은 ‘하나의 중국’ 전제하에서는 양안직항(兩岸直航) 등 3통(三通)7)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천수이볜 총통은 2004년 3월 20일에 실시된 제11대 총통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하였다.

  집권 2기를 맞은 천수이볜 총통은 2004년 5월 20일 총통 취임사에서 2006년에 헌법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하였다.

  총통선거 당일에 동시 실시된 ‘방위성 국민투표8)’는 투표율 과반수 미달(45%)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천수이볜 총통은 타이완의 방위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패트리어트   

  미사일(Patriot Missile), 잠수함, 대잠기9) 등 미국 무기의 구입을 추진하였다. 한편 타이완의 방위성 국민투표와 관련하여 중국 측은 2005년 3월 14일 전국인민대표대회

  (全国人民代表大會)에서 타이완이 독립을 추진할 경우에는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내용을 법률화하는 「반분열국가법」을 통과시켰다.

  2004년 12월 11일 실시된 타이완의 제6대 입법위원 선거에서 민주진보당을 포함한 여당권은 입법원 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2005년 12월 실시된 현장(縣長) 선거 및 시장(市長) 선거에서 6지역에서 승리한 민주진보당(DPP)은 14지역에서 승리한 중국국민당(KMT)에게 패배하였다.

  천수이볜 총통은 2006년 신년사에서 양안(兩岸) 경제정책으로 「유효개방, 적극관리(有效開放, 積極管理)」를 발표하고,

  2006년 2월에 국가통일위원회와 국가통일강령 「종지(終止)」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타이완과 중국의 관계는 긴장 국면에 돌입하였다.

  타이완의 중국국민당과 친민당은 천수이볜 총통 일가 등의 부정혐의에 따라 2006년 6월 27일, 2006년 10월 13일, 2006년 11월 24일 등 3차에 걸쳐

  총통파면안을 상정하였으나, 모두 부결되었다.

 

5) 타이완의 마잉주 총통 시기

  타이완은 2008년 3월 총통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선거에서, 양안(兩岸) 관계 개선 및 경제회생을 주장한 중국국민당(KMT)의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58%의 득표율로

  민주진보당(DPP)의 셰창팅(謝長廷)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로써 타이완은 8년 만에 민주진보당에서 중국국민당으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마잉주 후보는 독립을 추진하지 않고, 통일을 추진하지 않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3불(三不) 정책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양안 간 평화협정 체결, 양안 간 경제교류 확대 등을 추진하겠다고 표명하였다. 한편 중국국민당(KMT)은 총통 선거에 앞서 2008년 1월 실시된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두었다. 마잉주 총통은 2008년 5월 20일 취임 후, 높은 지지율10)을 기반으로 양안회담을 재개하는 등 적극적인 양안관계 개선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타이완 국민들은 2009년 8월 7일 ~ 2009년 8월 9일에 발생한 태풍 모라꼿(Morakot)의 피해로 인해 마잉주 정부의 국정수행능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마잉주 정부는 야당 및 언론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으며 최대 위기에 직면하였다. 마잉주 총통은 집권 1년여 만에 내각 총사퇴를 전격 단행하였다.

  그리고 태풍 피해와 관련하여 복구 및 재건을 당면 과제로 경제 불황 극복에 진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아울러 양안정책 및 대외정책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

  하였다. 새로운 내각의 주요 구성원은 우둔이(吳敦義) 행정원장, 주리룬(朱立倫) 행정원 부원장, 양진톈(楊進添) 외교부장 등이며 40개 부처 13명의 장관급 교체가

  단행되었다. 타이완은 2009년 12월 5일 타이완 17개 지역에서 현장·시장 및 현의원·시의원 등을 선출하는 지방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중국국민당은 전통적

  강세지역인 중북부의 12개 지역에서 승리하였고, 민주진보당은 남부의 4개 지역에서 승리하였다. 비록 중국국민당이 다수지역에서 승리하였으나, 2005년 지방선거와

  비교하면 승리지역, 득표율 등의 측면에서 민주진보당이 크게 약진한 결과를 보였다.

  민주진보당은 2010년 1월 10일 실시된 보궐선거에서 3석을 추가해 타이완의회 내 의석 30개를 확보하였다. 이에 따라 민주진보당은 개헌안과 총통파면안 제출에 필요

  요건인 총의석(113석)의 1/4(29석)을 넘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