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지금은 여행중 /1월 이탈리아

<옮김>로마, 나보나 광장 이야기

프리 김앤리 2016. 12. 26. 15:00

 

< 2017년 1월 투어야여행사 단체배낭, 품격 이탈리아 여행  준비 29>

                     

 보로미니와 베르니니, 나보나 광장의 성 아녜제 성당과 사대강의 분수

 

17세기에 들어 로마에서는 르네상스가 퇴조하고 바로크라는 새로운 예술의 기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서양 예술의 요람으로 발전하여 유럽 모든 나라의 표본이 되었다.

로마에서 바로크 시대를 연 대예술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쟌 로렌쪼 베르니니, 프란체스코 보로미니를 꼽을 수 있다.  이 세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1년 차이로 각각 1597년, 1598년, 1599년에 태어났으며 모두 로마가 아닌 외지 출신으로 로마에서 대성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뛰어난 화가에 뛰어난 건축가였고, 건축가로서 17세기 로마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은 장본인들이다.

특히 베르니니는 건축가이기 이전에 원래 조각가로서 미켈란젤로 이래로 최고의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세사람 중에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라이벌 관계였으며 성격도 극과 극이었고 출신지도 정반대이며 추구하는 건축도 달랐다.

나폴리 태생인 베르니니는 남부 이탈리아를 대표하듯 신앙심을 바탕으로 로마에서 가장 명망있는 예술가가 되었다.

반면에 보로미니는 북부 이탈리아 문화권인 스위스의 남부 티치노 지방 출신으로 베르니니처럼 신이 창조한 인간으로부터 조화의 비례를 찾아내기 보다는 기하학적인 도형을 바타응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했다. 그는 다소 침울하고 고독했으며 화를 잘 내었고 극히 비사교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보기 드문 뛰어난 건축가였지만 말년에 이르러 사람들이 그의 고약한 성격때문에 큰 프로젝트를 맡기지 않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로마에서 이 두 라이벌의 작품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나보나 광장이다.  한편 나보나 광장 뒤쪽 골목에는 피에트로 코르토나가 설계한 산타 마리아 델라 차페라는 건축적으로 뛰어난 성당까지 있으니

이 지역은 바로크 세대가 모두 집결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사람에게 작품을 남길 기회를 준 장본인은 팜필리 가문이었다.

 

  <나보나 광장의 사대 강의 분수와 성 아녜제 성당>

 

팜필리 가문 출신 교황 인노첸티우스 10세는 1644년부터 11년동안 재위하면서 서민들의 시장터로 사용되던 나보나 광장을

로마에서 가장 품위있고 매력적인 도시 공간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그는 나보나 광장에 세워진 팜필리 궁이 더욱 돋보이도록 광장 한가운데 있던 가축들에게 물을 먹이던 분수를 품위있는 분수로 완전히 바꾸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팜필리 궁 옆에 있던 성녀 아녜제가 순교한 곳에 세워진 기존의 '산타네제 인 아고네 성당'을 헐고 그 위에 성녀에게 바치는 성당을 새롭게 세우도록 했다. 교황은 당시 로마의 유명한 건축가이던 라이날디 부자에게 성당 설계를 맡겼으나 그들의 작업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 계약을 파기하고 보로미니를 불러들였다. 성당의 공사는 라이날디에 의해 이미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로미니는 성당의 내부보다는 외관 디자인에 집중적으로 신경을 썼다. 그리하여 성당의 인상을 결정하는 쿠폴라(돔)가 올려졌는데 이것은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쿠폴라보다 더 날씬하고 날렵하게 솟아있다.

그리고 성당 정면의 가운데 부분이 안으로 움푹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이 쿠폴라는 원래의 위치보다 훨씬 더 바깥쪽으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쿠폴라는 나보나 광장 안 어디에서든지 잘 보인다.

그리고 성당의 정면과 좌우에 솟아있는 종탑과도 완벽한 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외관은 후세의 성당 건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며 중부 유럽에도 널리 전파되었다. 그 중 특히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중심지에 있는 카를 성당은 보로미니의 영향을 받은 피셔 폰 에를라흐가 1716년에 설계했는데, 성 아녜제 성당을 그대로 베껴놓은 듯 닮았다.

 

그런데 아녜제는 도대체 누구이며 왜 하필 이곳에 아녜제라는 이름이 붙은 성당이 세워졌을까?

아녜제는 이탈리아어식 표현이고 라틴어 표기로는 아그네스로 양을 의미한다.

성 아그네스는 순결을 상징하고 소녀를 지키는 성녀로 추앙되고 있다.

아그네스가 정확히 어느 시대의 인물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3세기 중반 데키우스 황제 재위시 또는 4세기 초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재위시

로마 제국 전역에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있을 때 이 곳에서 순교한 13세의 어린 소녀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곳은 매음굴로 사용되고 있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아그네스가 순교를 당하기 전에 옷이 벗겨졌는데 기적적으로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나 몸을 감쌌다고 한다.

 

한편 이 성당의 이름 산타녜제 인 아고네(Sant'Agnese in Agone)에서 아고네는

'승리하기 위해 힘을 겨루는 곳' 즉 '경기장'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곤Agon의 이탈리아어식 표기이다.

'인 아고네'는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형되어 나보나Navona 로 굳어졌다.

그러니까 성당의 이름을 번역하면 '경기장에 있는 성녀 아녜제 성당'이 되는 것이다.

....

 

성 아녜제 성당 앞의 분수는 나보나 광장에서 초점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베르니니이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4대강의 분수'이다.

이 분수는 당시 유럽에 알려져 있던 유럽의 도나우강, 아프리카의 나일강, 아시아의 갠지스강, 남아메리카의 플라타강을 의인화 한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로미니의 성 아녜제 성당과 베르니니의 4대강의 분수를 두고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보로미니가 세운 성당이 무너질 것 같아서 놀란 플라타 강 조각상이 손을 들고 있으며

나일 강 조각상은 아예 이 성당이 보기 싫어서 보자기를 덮어쓰고 외면하고 있는 모습으로 베르니니가 조각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보로미니는 성당의 종탑 아래에 가슴에 손을 얹어 이들을 안심시키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아녜제의 조각상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성당이 세워진 것은 4대강의 분수가 세워진 후의 일이고 베르니니는 보로미니가 이 성당 건립에 관여할 줄은 전혀 몰랐다.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이 이야기에서 보로미니와 베르니니의 라이벌 관계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어떻게 보면 '승리하기 위해 투쟁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아고네 Agone라는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하게 한다.

 

그런데 보로미니는 그의 라이벌 베르니니가 제작한 4대강의 분수를 보고는 울화통이 터졌을 것이다.

왜냐면 교황에게 4대강 분수의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이 바로 그 자신이었고, 이 분수를 세우기 위해 수로를 끌어들이는 공사를 계획하고 감독한 장본인도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보로미니는 4대강 분수를 미리 디자인해 두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일을 맡을 줄 알았다.

그런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베르니니가 교묘하게 인맥을 이용하여 이 프로젝트를 가로챈 것이다.

즉, 베르니니는 4대강 분수의 모형을 만들어 평소 잘 알고 있는 교황 측근을 통해 교황의 눈에 띄기 쉬운 탁자 위에 올려놓도록 했는데,

이것을 본 교황이 그만 입이 벌어지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크게 감탄했던 것이다.

사실 보로미니가 준비했던 분수 디자인은 상당히 교과서적이었다.

다시 말해, 감상자의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는 감동은 베르니니의 작품에 비해 많이 부족했다.

아마도 보로미니는 자기가 그 일을 당연히 맡을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다소 방심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절호의 기회를 졸지에  빼앗긴 보로미니는 '베르니니, 도`둑몰놈"이라고 울분을 토하면서 이를 갈았으리라.

그러고 보니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화병이 시달린 것도 짐작이 간다.

나는 이런 보로미니에게 다가가 위로를 해주고 싶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으니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그리고 또 한미다 덧붙이고 싶다.

 "자신의 실력에 도취되지 않고,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요."

                            - 옮김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에서   정태남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