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지금은 여행중 /1월 이탈리아

걸어서 '로마' 속으로

프리 김앤리 2016. 12. 26. 14:45

< 2017년 1월 투어야여행사 단체배낭, 품격 이탈리아 여행  준비 28>


2017년 1월 16일 월요일, 오후 2시쯤이면 우리는 드디어 로마에 도착할 것이다.

다음날까지 이틀, 로마의 계획된 일정은 대충 이러하다.

물론 '계획하고 있는 일정'!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반드시 달라져야 하고...


1월 16일 (월 )



1월 17일(화)

우리 전용버스로도 다니고... 1일권을 끊어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When in Rome, do as the Romans do!

(로마에서는 로마사람들이 하는대로 하라!!)



1월 16일(월)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교황궁 내의 미술관.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고문서·자료를 수장하고, 또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에 의한 내부의 벽화·장식으로 유명하다.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 때 벨베데레의 정원에 고대 조각이 전시된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클레멘스 14세 치하인 1773년이다. 현재 본관은 피오 클레멘티노미술관·도서관·성유물관·회화관 등 많은 부분으로 나뉘고, 또 각실은 보르지아실·라파엘로실·지도실이라는 특유의 명칭으로 불린다. 미켈란젤로나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시스티나성당·파오리나성당·니코로 5세 성당 등도 미술관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다.
주요 작품은 고대조각에 《아포크슈오메노스》 《벨베데레의 아폴로》 《벨베데레의 토르소》 《라오콘》, 고대 회화에 《오디세우스 이야기》 《아르드브란디니가(家)의 혼례도》, 중세 회화에 《웨르기리우스사본》 《여호수아기(記)》, 그리고 르네상스 회화에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최후의 심판》, 라파엘로의 《성체의 논의》 《아테네 학당》 《그리스도의 변용》,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성히에로니무스》, 카라바지오의 《그리스도의 매장》 등과 역사적인 고문서 ·공문서류도 소장되어 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성 피에트로 대성당>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이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 죽음의 힘이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장)." 성 베드로(피에트로)는 예수에게 '반석'이라는 의미의 '베드로'라는 이름과 '천국의 열쇠'를 받고 첫 굫솽이 되었다.
세계 가톨릭의 중심지로 성경의 글귀처럼 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워졌다. 서기 90년, 성 베드로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되었고, 326년 로마 제국 전체에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지금의 이름으로 성당을 지었다. 16세기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건물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운 성전을 세울것을 명령했다. 그 때부터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 10명이 넘는 예술가가 참여해 120년에 걸친 작업 끝에 1626년 11월 28일, 비로소 지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모습을 갖추었다. 베르니니의 설계로 제작한 높이 29m의 발다키노는 주위를 둘러싼 성자들의 조각 및 미켈란젤로가 만든 거대한 쿠롤라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 이탈리아 데이 -


<산 피에트로 광장>

베르니니가 설계한 광장으로 바로크 건축의 특징인 거대한 규모, 화려한 장식, 과장되고 극적인 느낌을 잘 살렸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르네상스 건축의 대표작 캄피돌리오 광장의 차분하고 정적인 느낌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베르니니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두 팔을 벌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감싸 안는 느낌이 들도록 설계했다. 양팔 역할을 하는 회랑은 284개의 원기둥과 베르니니가 직접 제작한 140개의 성인 상으로 구성된다. 광장 가운데 있는 오벨리스크의 양옆에 분수가 있는데 분수 주변 바닥의 타원형 표식에서 바라보면 4줄로 늘어선 회랑의 원기둘이 하나로 겹쳐 보인다. 이는 광장이 하ㅗ려함 속에서도 통일성을 갖도록 한 베르니니의 의도이다. - 이탈리아 데이



1월 17일(화)

오늘은 우선 일일권을 끊고 시작합시다.


<대전차 경기장 >

첫 경기가 열린 4세기 당시에는 고대 로마의 가장 큰 주 경기장이었지만 지금은 풀잎만 무성한 공터.

관중 25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4륜마차 경기, 경기, 맹수 싸움 등 갖가지 공연이 열렸던 곳.

맞은 편으로는 팔리티노 궁전이 보인다. 바로 저 자리에서 로마의 황제가 대전차 경기를 관람했다고.

Pala 라는 단어에서 Palace가 유래.



<진실의 입>

4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바다의 신, 트리톤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다. 로마시대에는 가축시장의 하수도 뚜껑.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중세 때 사람들을 심문할 때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잘려도 좋다고 서약한 데서 유래한다.

만약, 진실을 말하더라도 심문자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을 자르기도 했고 정치적으로도 악용되기도 했다.



<캄피돌리오 언덕>

카피톨리노 언덕은 로마의 역사가 시작된 7개의 언덕 중 하나로, 정치와 종교적으로 로마인들에게 중요한 곳이다. 지금의 Capitol(수도)의 어원이 되기도 한 이 언덕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광장이 있다. 광장이 조성되기 전에는 광장 정면의 세나토리오궁전과 오른쪽 편에 콘세르바토리 궁전만 있었는데 미켈란젤로에 의해 콘세르바토리 궁전 맞은편에 누오보 궁전이 대칭되도록 지어졌다. 현재 세나토리오 궁전은 시청사로 사용되며, 좌우의 궁전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카피톨리노 언덕을 오르기 위해 만들어진 코르도나타 돌계단을 눈여겨 보자 이는 착지효과를 이용해 만든 계단으로 미켈란젤로가 밑에서 위로 갈수록 계간의 좌우 폭을 넓게 만들어 실제로 밑에서 위로 올려봤을 때

일자로 보이게 해서 유명하다. 계단 끝에는 포로로마노에서 옮겨온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조각상이 있으며 광장 가운데는 로마시대 가장 뛰어난 황제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청동상이 우뚝 서있다. 원래는 산조반니라테라노 성당 앞에 높여 있었으나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상으로 여겨 파괴되지 않았고 현재 로마에 있는 유일한 황제 청동상이다. 1981년까지 진품이 놓여있었지만 현재는 청동상의 부식을 막기 위해 복제품이 놓여있다.  - 이탈리아에서 옮김 -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내려단 본 포로로마노(로마 공회장)>

캄피돌리오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에 자리한 저지대로 고대 로마의 생활 중심지였으며 사법, 정치, 종교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곳이다. 포로(Foro)는 영어 포럼(Forum)의 의미로 '공공 집회 장소'를 뜻한다. 이곳은 주변 언덕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물물 교환을 하거나 종교행사를 치르기에 지리적으로 매우 이상적인 장소였다.

약 1000년동안 로마 제국의 정치 사회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으나 로마 제국 몰락 후 테베레 강이 범람하면서 흙속에 묻혔다. 18세기 부터 발굴 작업을 시작했으며 현재까지도 발굴중. 과거에는 하나로 연결된 지역이었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무솔리니가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기 위해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오에 이르는 대로,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를 건설하면서 지금처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무덤과 수많은 황제 기념비 그리고 당대를 살았던 로마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 일부, 이탈리아 데이에서 옮김-


<베네치아 광장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이탈리아를 통일(1871년) 초대 국왕.

왼쪽 사진이 비토리오 2세 기념관인데 광장의 이름이 베네치아로 붙은 것은 광장의 앞 쪽에 있는 베네치아 궁전 덕분이다.

무솔리니가 이 건물 발코니에서 제 2차 세계대전 참여를 선포한 것으로 유명하다.


<콜로세움>

고대 로마 유적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은 로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72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짓기 시작한 뒤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예루살렘 침공 때 잡아온 유대인 포로 4만명을 동원해 80년에 완성한 건축물이다. 건물 곳곳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4세기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 수많은 교회를 짓기 위해 청동 뼈대를 빼낸 흔적이다.

5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며, 1층에는 대규모 관중이 신속히 입장할 수 있는 아치로 된 입구가 80개나 된다. 신분별로 출입구가 달랐으며 좌석 또한 정해져 있었다.

티투스 황제는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검투사들의 격전장으로 콜로세움을 사용했다. 당시 정부는 15퍼센트나 되는 로마 실업자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려고 노예 검투사와 검투사, 야수와 검투사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이 원형 경기장에서 치렀다. 또한 이곳은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장소로도 이용됐다.  - 손바닥 유럽에서 옮김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현재 로마에서 가장 큰 개선문 (21m 높이, 너비는 25m).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오 다리에서 당시 로마의 지도자였던 막센티우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마 제국의 지도자가 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개선문이다. 사실 '밀비오 다리의 전투'에서 원로원은 군사적 우위에 있던 로마의 지도자 막센티우스를 위한 개선식과 개선문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콘스탄티누스가 전쟁에서 승리하자 개선문을 새롭게 만들기에 시간이 부족하여 원로원들은 이미 로로로마노 안에 만들어져 있던 개선문 3개를 부수로 다시 합쳐 지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만들었다. 따라서 정면과 상부 옆면의 부조가 다르게 만들어져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나폴레옹도 이를 보고 반해서 본 떠 만든 것이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개선문과 루브르 박물관의 카루젤 개선문이다.



<판테온>
그리스어로 '신'을 테오스(theos)다. 

'판테온'이란 Pan(모든) + Theo(신) + on(건물, 장소를 나타내는 그리스식 접미사), 즉 모든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 혹은 범신전이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와 로마의 신전 건축에서 신상 안치소는 사제만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인데 판테온에서 넓은 내부 공간 그 자체가 신상 안치소였으며, 사제만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 안에 들어가 종교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판테온을 처음 세운 사람의 이름은 입구 상부에 큼지막한 청동 글씨로 기록되어 있다. <M.AGRIPPA. L. COS. TERITIUM FECIT> 풀이하자면 "세번째TERITIUM  집정관COS 루키우스의 아들L 마르쿠스 아그리파M.AGRIPPA가 했다FECIT"이다. 기원전 25년의 이야기다.

아그리파는 복수의 유티페르 신 (쥬피터)에게 바치기 위해 판테온을 세웠는데 실제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지어 바친 것이라 할 수 있다.

... 오늘날 우리가 보는 판테온은 아그리파가 세운 것은 아니다. 그가 세웠던 판테온은 원통형이 아닌 육면체의 신전으로 여겨진다. 여러번의 화재로 그의 판테온이 전소된 후 서기 118년과 125년 사이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때다.

- 매력과 마성의 도시, 로마 산책에서 옮김-


<콘도티 거리>

스페인 광장 앞 직선도로로 뻗은 거리로 전 세계 명품매장을 만날 수 있다.



<스페인 광장, 스페인 거리>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계단. 그래서 더 유명해진 계단.

계단의 뒷편에 스페인 대사관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에는 베르니니와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가 설계한 마르카치아 분수가 있다. 바르카치아란 '쓸모없는 오래된 배'라는 뜻.


<트레비 분수>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알려진 트레비 분수. 교황 클레멘스 13세가 모집한 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된 니콜라 살비의 작품이다.

1762년 완공. 바다의 신, 넵튠이 중앙에 있고 양쪽으로는 두 트리톤이 두 마리의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격동의 바다와 잔잔한 바다를 상징한다.



<나보나 광장>

자세한 설명 로마 나보나 광장 이야기 http://blog.daum.net/freeleeandkim/1414



<피오리 광장>

자세한 설명 부르노, 진실을 말하라 http://blog.daum.net/freeleeandkim/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