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지금은 여행중 /1월 이탈리아 남프랑스

'아비뇽의 유수'와 '카놋사의 굴욕'

프리 김앤리 2014. 12. 24. 12:59

 

 < 투어야여행사 단체배낭 2015년 1월 이탈리아 준비 12 >

콜로케이션(Collocation)?

한 단어가 나오면 다음 단어를 떠올리게 되는 조합. '단어의 궁합' 이라고 할까?

역사에서도 콜로케이션 처럼 등장하는 사건들이 있다.

'아비뇽의 유수'가 나오면 반드시 '카놋사의 굴욕' 이 따라 나오는 그런.

암기를 한다는 것이 결국엔 공부였던 내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하여튼...  내년 1월 말이면 우리가 여행할 프랑스의 아비뇽은 도심에 버티고 있는 아비뇽 교황청을 보러 가는 일이고

그건 곧 '아비뇽의 유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 다음은 당연히 '카놋사의 굴욕'으로...

 

<아비뇽의 유수>

잡아가둔 다는 뜻의 '유수(幽囚)라는 단어도 이 때 처음 알았다.

글자의 모양도 그렇게 생겼다. 사람(人)을 뭔가 꽉막힌 틀(口)에다 꽁꽁 묶어두었으니 어렵게 보이는 한자어지만 글자의 모양의 본다면 당장 이해가 된다.

'아비뇽의 유수(幽囚)'!  아비뇽에 갇혔다는 뜻.

 

'아비뇽의 유수'는 교황권이 쇠퇴하고 황제권이 강화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서양사에서의 중세기는 기독교와 봉건제라는 두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다.

기독교의 권력은 교황에게, 봉건제의 권한은 봉건 영주와 각국의 왕들에게 있었다.

 

 

 

11세기 부터 시작된 이른 바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 실패로 교황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왕권이 더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국왕 필리피 4세는 교회의 세금 문제를 둘러싸고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대립했는데

결국 필리피 4세가 승리하고 교황은 대립의 패배 직후 사망하였다.

그 뒤 프랑스는 교황청을 아비뇽에 두고 1309년부터 1377년까지 70여년간 교황청을 프랑스 왕의 영향하에 두었다.

교황청이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이전되어 있었던 이 시기를 '아비뇽의 유수'라고 부른다.

교황을 아비뇽에 묶어 두었다는 것~~

 

론강 옆에 지어놓은 아비뇽의 교황청에는 14세기의 예배당, 수도원, 교황 거주지, 응접실 등을 볼 수 있다.

 

 

<카놋사의 굴욕>

왕권에 대해 교황권이 약해졌던 시기를 '아비뇽의 유수'라고 한다면

'카놋사의 굴욕'은 그 반대로 왕이 교황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을 말한다.

 

 

1054년 독일 왕위에 오른 하인리히 4세는 자신의 힘이 강대해진 것을 기회로 자신의 궁정 신부를 대주교에 임명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7세는 성직 임명권에 관한 한 교황의 권한이라며 '성직 임명권에 대한 협상'에 응할 것을 하인리히 4세에게 청했다. 

그러나 주교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믿었던 황제는 교황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교황은 황제와 그를 따르던 주교들도 파문했을 뿐 아니라 왕을 폐위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뒤이어 머뭇거리며 양쪽을 저울질 하던 주교들도 방향을 급선회하여 교황에게 고개를 숙였고 새로운 국왕 선출해야 한다는 의견서까지 제출했다. 

 

주변으로부터 완전 고립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노사(Canossa)라는 이탈리아 북부의 성에 개인 자격으로 부인을 대동하고 가서

눈발이 흩날리는 성문 앞에서 맨발로 무릎을 꿇은 채 파문 철회를 눈물로 호소했다.

그제서야 교황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짓던 파문 결정 3일 후인 1077년 1월 28일 철회를 선언했다.


카노사의 굴욕은 황제나 왕의 권위보다 교황의 권위가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남부 지방에 아비뇽(Avignon), 이탈리아 북부 지방이 카놋사 (Canos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