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지금은 여행중 /1월 이탈리아

묻혀버린 도시, 잠에서 깨어난 생생한 고대. 폼페이 1

프리 김앤리 2016. 12. 27. 18:58


< 2017년 1월 투어야여행사 단체배낭, 품격 이탈리아 여행  준비 32>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서기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암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소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 당일 소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소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대플리니우스는 당시 함대의 선장으로 배를 타고 나가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독성이 강한 화산 가스에 질식해 그만 죽고 말았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로마의 도시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발굴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는 당시 로마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유적이었다. 화산 폭발로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도시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는 한 변이 약 2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시 서쪽에는 포럼이라 불리는 광장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신전과 시장, 시청 등이 모여 있었다. 조사를 통해 바로 이 지역이 폼페이의 종교·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시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들은 모두 포장되어 있었으며, 차도와 보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사거리에서는 공동 수도와 각 가정으로 물을 보내기 위한 수도관 시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밖에 공중 목욕탕과 체육관, 두 개의 극장, 1만 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도 발굴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한 빵집과 술집에서는 화산 폭발이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남아 있었다. 화덕에 그대로 남아 있는 불에 구운 빵과 술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잔 등이 바로 그 증거다. 한가로운 일상을 한순간에 참극으로 몰아넣은 급작스런 화산 폭발과 도시의 파괴가 단지 이야기만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폼페이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대유적-도서출판 들녘에서 옮김)


카를 브률로프 작. 1830~1833년 「폼페이 최후의 날

 

카를 브률로프(1799~1852)는 19세기 전반기의 러시아 아카데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의 죽음과 더불어 러시아 아카데미 미술은 짧은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브률로프는 일찍 명성을 얻었다.

그의 대작 「폼페이 최후의 날」은 이탈리아에서 그려졌다.  이탈리아의 평론가들은 서른 세살의 젊은 브률로프를 루벤스, 렘브란트에 비교하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는 전설 속에 있던 폼페이의 유적지가 발굴되던 시기였으며 빙켈만이 고전 고대(서양의 고전 문화를 꽃 피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를 이르는 말)의 아름다움을 예술의 전범으로 내세웠던 시대였다. 화가나 작가 뿐 아니라 교양을 갖춘 신사라면 이탈리아를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여행하는 것이 필수 코스가 되었다. 브률로프도 1827년에 폼페이 유적지를 방문하고 6년동안 사료를 뒤져 작품을 구상한다.

 

그는 화산 폭발이라는 자연재해를 문명의 파국을 야기하는 가혹한 운명으로 해석해 냈다.

그의 탁월한 솜씨가 발휘되는 것은 파국의 순간에 처한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양상이다.

멀리 화산이 불을 뿜고 있고 대낮인데도 하늘은 지옥처럼 컴컴하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사람들, 이미 죽은 사람들, 날뛰는 말들이 뒤엉켜 화면은 아수라장이다. 부자는 보석을 학자는 실험 도구를 , 어머니는 아이들을 챙겨서 나왔다. 이들을 일순간에 정지 상태로 만든 것은 신전에 떨어진 벼락이다. 

벼락은 폼페이 시민들이 숭배하던 신전의 조각상에 정면으로 떨어진다. 사람들의 눈길은 모두 여기로 쏠려 있다. 신전을 덮친 재앙은 이제 구원은 완전히 불가능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강하게 빛이 떨어지고 있는 화면 중앙에는 가장 절망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이미 죽은 어머니 곁에서 울부짖는 어린 아기의 모습은 결정적인 파국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브률로프는 대재앙의 현장을 생동감 있게 전하고 싶었다. 그는 그림 속에 비극의 현장을 지켜보고 증언하는 인물들을 그려 넣는다.

오른쪽 하단에 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애원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아이는 피니 2세인데 화산 폭발을 목격했고 다행히 살아남았다. 후에 브률로프가 참조한 자료 중에는 피니 2세가 성인디 되어서 쓴 편지가 있었다. 브률로프는 이런 자료들을 참조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목격자가 되어 화면 속에 들어가 있다. 화면 왼편 상단에 화구를 이고 도망가는 젊은 브률로프의 모습이 보인다.

화가는 파국의 순간의 목격자로 모든 것을 낱낱이 지켜보며 역사가처럼 신뢰할 수 있는 기록자가 딜 것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 그림에는 브률로브의 개인적인 절망도 표현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화면 가운데 죽어 누워있는 여인의 얼굴과 왼쪽 귀퉁이에서 두 딸을 안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무척 닮았다. 브률로프가 흠모하던 율리아 사모일로바 공작 부인을 모델로 이 두여인을 그렸던 것이다. 일찍 남편과 사별한 사모일로바는 이탈리아 시절부터 평생 브률로프를 후원하였다. 브률로프가 제아무리 전도 양양한 화가일지라도 대귀족 부인과 화가라는 신분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다. 그는 초상화 뿐 아니라 작품 곳곳에 그녀의 모습을 그려서 연정을 표현한다. 연인을 죽은 사람의 모델로 삼는 것은 고약한 일이지만, 브률로프의 마음 속에 그녀는 영원히 살아 있었고, 또 의도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     이진숙 지음 『러시아 미술사』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