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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와 제노사이드 - 아르메니아 역사

프리 김앤리 2018. 5. 6. 00:30


기원전부터 무수한 역사가 있겠지만... 아르메니아 역사는 디아스포라와 제노사이드에 그 오랜 세월이 함축된다.

아르메니아의 지금 인구는 300만. 그러나 전 세계에 나가있는 아르메니아인이 천만을 넘는다고 한다. 디아스포라다.


디아스포라(Diaspora)

디아스포라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너머'를 뜻하는 '디아(dia)'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로(spero)가 합성된 단어로, 이산(離散)   또는 파종(播種)을 의미한다.

본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르메니아 본토가 아닌 외국에 살고 있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디아스포라로 불러주기를 원한다. - 두산백과


제노사이드(genocide)

인종학살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인종적, 정치적, 문화적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을 절멸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살해하는 것을 일컫는다. 
영어 genocide는  그리스 어원인 'geno'(인종, 종족)와 라틴어 '-cide'(살해)가 합성돼 만들어졌다. 
당초 폴란드계 유대인 변호사인 라파엘 렘킨이 2차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을 지칭할 때 썼다. 
아르메니아 학살은 20세기 최초의 인종학살로 꼽히며 가까이는 1994년 아프리카 르완다 학살을 예로 든다.  - 두산백과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세계 제 1차 대전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르메니아들은 당시의 지배자 오스만투르크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몄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그동안의 압제에 대한 저항의 하나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무슬림 촌락을 습격하고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전쟁 중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자 많은 아르메니아 인들이 러시아 군대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에 1915년 4월부터 오스만 제국이 18세~50세 사이의 아르메니아 남자들을 모두 강제 징집하여 집단 사살을 하기도 하고 과중한 노동으로 인한 질병과 기아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징집하지 않은 부녀자나 노약자 어린이들은 모두 사막으로 강제 추방하여 대부분 굶어죽거나 질병으로 사망하게 만들었다. 아르메니아 정부의 주장에 의하면 이때 희생당한 사람이 150만명으로 보며 생존자 50만명도 러시아나 미국 등으로 흩어져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를 형성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터키의 입장은 다르다.

세계 제 1차 대전을 전후로 터미 동부 산악지역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 인들이 터키의 적국인 러시아 군대에 가담하여 오스만 제국에 무장 저항했으며 이들은 진압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인명 손실이 초래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터키는 이때의 희생자를 30만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 그리스, 폴란드 등 22개국이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종학살로 인정한다.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나 국제 사회에서도 각 나라마다 입장차이가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 폴란드 등 22개국은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종학살로 인정한다.  유럽 인권감시기구인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와 유럽의회도 인정하며 스위스, 폴란드 등은 이를 부인할 경우 형사 처벌까지 요구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지난 2000년과 2004년 '아르메니아 대학살 결의안'이 하원에 상정되었으나 터키 로비스트에 의해 좌초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터키가 한국전쟁에 참가한 우방이라는 점을 감안해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한 터키 책임을 공식 인정하지는 않은 채 '양국간 평화적 해결'을 바라고 있다.

한편 지난해 아르메니아를 방문한 프란체스코 교황은 "1915년의 사건은 아르메니아 인종의 대학살'이라며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제국의 행위를 비판하는 메세지를 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