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지금은 여행중 /4월 스페인 포르투갈

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여왕

프리 김앤리 2018. 3. 19. 13:07

스페인 역사의 한 장면... 후아나 여왕과 카를 5세에 얽힌 이야기...

재미있어서 '최미선씨가 쓴 책 『사랑한다면 스페인』에서 옮겨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그건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생떽쥐페리가 『어린 왕자』에 풀어놓은 말처럼 얼굴만큼이나 각양각색인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그 바람같은 마음을 잡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사랑이야...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건 기적'이라 했던 그의 말처럼 사람 마음중에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얻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일까.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 그 사랑 외엔 눈에 뵈는 게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콩깍지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벗겨지련만 죽을 때까지 털어내지 못하고 사랑에 매달린 여인이 있다. 미치광이 취급까지 받은 그 사랑으로 자신도, 상대방도 힘들게 했던 여인의 이름은 후아나, 바로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딸이다. 

 페르난도가 아라곤 왕이 되던 해에 태어난 후아나에겐 언니와 오빠가 있었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사람 팔자 알수 없는 문제다. 그저 왕실 여인으로서의 교육만 받은 후아나는 열입곱살 되던 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출신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인 열여덟살 페리페와 결혼하게 된다.  하지만 왕의 계승자였던 오빠가 요절한 데 이어 언니마저 이듬해 죽는 바람에 그 계승권이 후아나에게 떨어진다. 아버지의 나라 아라곤은 남자만 후계자가 될 수 있었기에 어머니의 나라인 카스티야 왕위 계승권만 인정되었지만 사실 카스티야의 힘이 훨씬 막강했다. (당시 스페인은 두 왕국의 통합 형태였다.) 졸지에 과한걸 얻으니 운명의 여신도 시샘했던 걸까? 그녀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인생은 장밋빛이었다. 정략결혼이었던 만큼 서로를 몰랐던 두 사람이었지만 첫 대면한 순간 서로에게 반해 당장 결혼 시켜달라고 졸라 다음날 결혼식을 치를 정도였다. 후아나도 '한 미모' 했다지만 펠리페는 아예 '미남왕'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후아나가 미친듯이 빠져든 그 잘난 외모는 동시에 불안 요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깨소금 냄새 폴폴 풍기는 신혼을 보내지만 첫 딸이 태어난 후 펠리페는 슬슬 아내에게 흥미를 잃는다. 펠리페에겐 궁정에 널린 게 여자였고 인물값 하느라 대놓고 바람을 피웠다. 그럼에도 아내가 스페인 여왕이 될 신분을 고려해서인지 아들과 둘째 딸을 연이어 낳긴 했다. 

 스페인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남편 사랑에만 목맨다는 딸 소식을 접한 이사벨 여왕은 상속 문제를 거론하며 두 사람을 스페인으로 불러들였다. 특히 펠리페는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으려면 어쩔수 없이 가야했다. 장인 장모의 환영을 받으며 스페인에 도착한 펠리페는 몇달간의 회의 끝에 '여왕이 되는 아내의 동반자 자격으로 왕이 되는 권리'를 인정받자 아내를 두고 홀라당 떠나버렸다. 후아나가 함께 따라나서지 못한 건 만삭인 딸의 몸 상태를 염려한 친정 엄마의 만류때문이었다. 

  하지만 후아나에게 남편 없는 삶은 생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남편이 다른 여인들과 놀아나는 상상은 그녀를 더 미치게 했다. 아들을 낳자마자 남편에게 달려가려는 딸을 친정 엄마는 또다시 말릴 수 밖에 없었다. 출산 후 회복되지 않은 몸도 몸이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육로가 막힌 탓이었다. 그럼에도 철딱서니 없는 딸은 "프랑스와 싸우는 건 스페인이지 내가 아니잖아"라며 프랑스를 가로질러 가겠다고 부득부득 우겼으니 엄마는 복장 터질 노릇이었을게다. 그것이 이사벨 여왕의 명을 재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불타는 사랑을 누가 말리랴, 쇠약해진 어머니를 두고 남편 곁으로 갔을 때 그녀의 상상은 여지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사랑이란 게 혼자면 고통이고 둘이면 행복이지만 셋이면 싸움이 된다. 독이 오른 후아나는 남편 사랑을 뺏은 여인의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잘라버리고 만다. 게다가 늙은 시녀들만 남기고 젊고 매력적인 여인들은 죄다 내보냈다. "너 미쳤어?"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극도로 예민한 후아나의 반응에 펠리페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종종 가두기까지 했다. 그럴수록 자신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아내에게 질린 펠리페는 사냥을 핑계 삼아 수시로 외박을 했다. 미꾸라지 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남편을 잡고 싶어 더더욱 안달이 난 그녀는 덕지덕지 화장하고 주렁주렁 보석도 달고 주술을 담은 '사랑의 묘약'까지 지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를 또 낳았으니 부부란 게 참 묘하다. 

  후아나가 남편 곁으로 온지 몇 개월 후인 1504년 11월 26일, 이사벨 여왕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후아나가 여왕 자리를 물려받자 그 자리에 군침을 흘린 장인과 사위 간의 암투가 벌어졌다. 페르난도 2세는 딸이 미쳤다며 섭정 명분을 내세웠다. 이는 일전에 후아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히 적어 보낸 사위의 편지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에 다급해진 펠리페는 부랴부랴 스페인으로 향했다. 이때 펠리페 부부는 또 한바탕 부부싸움을 벌였다. 남편 옆에 여자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 후아나가 배에 탄 시녀들을 몽땅 내리게 했기 때문이다. 1506년 봄에 스페인에 도착한 그들은 의회로부터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여왕이 미쳤다는 소문이 다시금 솔솔 돌았다. 후아나는 소문의 근원지가 바로 남편임을 알면서도 사랑 때문에 눈감아주었고 오히려 한발 물러나 모든 권한을 펠리페에게 넘겼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역시나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을 이용만 했던 남자에게 하늘이 벌을 내린 걸까? 즉위 3개월 만인 1506년 9월, 그는 권력의 맛을 제대로 보기도 전 스물여덟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스페인 북부에 위치한 부르고스에서 갑작스런 열병으로 급사한 젊은 왕의 주검을 놓고 장인의 독살설이란 얘기도 나돌았다. 

 미우나 고우나 너무나 사랑했던 남편이다. 그런 남편의 죽음을 결코 받아 들일수 없었던 후아나는 남편이 곧 살아날 것이라 믿어 장례식조차 거부했다. 그녀는 남편의 시신을 끼고 어머니가 잠든 그라나다로 긴 여행을 떠났다. 여섯째를 임신중이었기에 더더욱 느리고 힘든 여행길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자들은 관 옆에 얼씬도 못하게 했고 날마다 관 뚜껑을 열어 남편을 어루만졌다. 시간이 갈수록 부패되어 역한 냄새가 진동하고 구더기가 꼬물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듯 죽은 남편에게서도 벗어나지 못했던 기이한 행동에 사람들은 그녀를 '후아나 라 로카(미친 후아나)'라 부르기 시작했다. 

  남편의 시신을 운반하던 중 이듬해에 딸을 출산한 그녀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여장부였던 어머니와 달리 마음이 여린 후아나는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에게 권한을 부여하고자 했다. 하지만 무정항 아버지는 뭣이 불안했는지 그런 딸을 역시나 미쳤다는 핑계로 두 살배기 손녀와 함께 수도원에 감금하고 만다. 심지어 음식을 거부하는 그녀에게 채찍이 약이라며 매질까지 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1516년 1월에 죽었음에도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지 못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기에 내막을 모르는 이들은 그녀가 단단히 미쳤다고 여겼다. 

  페르난도 왕이 죽은 이듬해 그녀의 맏아들이 비로소 엄마를 찾아왔다. 1506년 플랑드르를 떠난 후 12년만의 만남이다. 엄마는 아들 볼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겼지만 열입곱 살 아들은 무덤덤하다 못해 매정했다. 아들의 관심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듯 엄마의 지위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줄곧 떨어져 살았기에 살가운 모정을 느끼지 못했을지언정 그래도 자신을 낳아준 엄마다. 그런데도 자신이 왕의 지위에 오르려면 그 엄마가 여전히 미친 사람이어야 했다. 

  아버지의 의해 서른 살에 감금된 후아나는 아들의 외면으로 무려 46년간 수도원에서 쓸쓸하게 지내다 1555년 76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외쳤던 이름은 남편 펠리페였다. 스물 다섯살에 여왕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그 지위도 마다하고 오로지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인이길 원했던 후아나. 권력만 탐낸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아들에게까지 버림받은 비운의 여인. 그런 인생이라면 여왕이 아닌 차라리 평범한 여인이었어야 했다.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비정한 아들은 1516년 카를로스 1세가 되어 스페인 왕권을 거머쥐었고, 3년후에 친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죽음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되었다. 이 아들이 바로 알함브라에 카를 5세 궁전을 세운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바로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긴 무적함대의 제왕 펠리페 2세다. 

  어머니까지 내치면서 권력을 거머쥐었던 아들은 말년에 통풍에 시달리다 어머니가 죽은 지 3년후인 1558년 세상을 떠났다. 후아나가 정말 미쳤던 건지, 권력 암투의 희생양이었던 건지는 오로지 그녀만 알 일이다. 파란 만장한 인생의 후아나는 죽는 날까지 사랑했던 남편 펠리페 1세와 함께 어머니 이사벨 1세, 아버지 페르난도 2세 옆에 영원히 잠들어있다. 그들이 나란히 누운 곳은 그라나다 대성당 옆에 붙어 있는 왕실예배당이다. 



<알함브라 궁전 안에 있는 카를 5세 궁전> 


<왕실 예배당 입구.  오른쪽은 예배당 안의 왕실 묘지. 가운데가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의 관. 제일 왼쪽이 펠리페 1세, 오른 쪽이 후아나의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