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지금은 여행중 /4월 스페인 포르투갈

[김남희의 앉아서 하는 여행, 몸으로 읽는 책] 포르투갈 리스본

프리 김앤리 2018. 3. 23. 09:09

포르투갈 리스본과 ‘리스본행 야간열차’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마드리드보다 조용하고, 런던보다 소박하고, 파리보다 쇠락했으면서 그

모든 도시를 더한 것만큼이나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리스본은 언덕의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한 남성이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 보들레르의 절규는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는 종종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꾼다. 이곳이 아닌 저곳이라면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어떤 가면도 쓰지 않은 얼굴로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장소를 찾아 평생을 방황하기도 한다. 때로 장소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삶의 결이 달라진다. 그러니 장소에 대한 동경을 품은 사람들은 어쩌면 자기 삶을 변화시킬 가장 강력한 가능성을 지닌 이들인지도 모른다.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무례함에 질릴 때면, 이 도시가 강제하는 소비의 규모에 허리가 휠 때면, 달려가는 속도에 어지러울 때면 떠올리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라면 조금 더 예의를 지키면서, 가난에도 더 아무렇지 않게, 느릿느릿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여행과 일상의 사이에서 약간의 긴장과 적당한 느슨함으로, 한 계절이 시작되고 저무는 모습을 온전히 지켜보고 싶은 곳.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그런 곳이다.


유럽의 수도 중에서 이토록 고요한 도시가 있을까. 한때 영광을 누렸던 나라의 시민들 치고 이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까. 마드리드보다 조용하고, 런던보다 소박하고, 파리보다 쇠락했으면서 그 모든 도시를 더한 것만큼이나 매력이 넘치는 곳. 어째서 리스본이냐고 묻는다면 이 도시를 사랑했던 여러 작가의 말을 빌려오고 싶다. 존 버거는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에서 죽은 어머니와 해후하는 장소로 리스본을 선택했다. 리스본은 카드놀이에서 ‘이기는 즐거움마저도 고요하기만’한 곳이며 이 도시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면서.


<파이 이야기>의 얀 마텔은 신작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포르투갈의 햇빛은 진주같이 부드럽게 빛나고, 감칠맛 나고 포근하다”며 “부드러운 빛과 노스탤지어와 가벼운 권태가 뒤섞”인 도시를 배경으로 환상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나와 같은 모국어를 쓰는 작가 김한민은 리스본에 살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그의 그래픽 노블 <비수기의 전문가들>에는 주인공이 새 삶을 찾아 떠나기 위해 검색을 거듭하는 장면이 나온다. 산책하기 좋고, 좋은 시인들이 한두 명은 있(었)고, 알파벳 문자를 쓰고, 공기가 나쁘지 않고, 지나친 민족적 자부심 같은 게 없는 곳 등 42가지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킨 유일한 곳이 리스본이었다.



 

리스본의 매력을 가장 잘 표현한 책을 찾기 위해 예닐곱 권의 책을 읽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책은 처음 읽었던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다. 삶을 바꾸는 한 번의 여행에 관해 이토록 진지하게 파고든 책은 없었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축으로 진행되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죽음이라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모두에게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시간이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데 비해 공간은 유동적이며 탄력적이다. 선택의 가능성이 있기에. 우연적으로 일어난 일, 찰나의 스치는 만남, 이런 것들이 어떤 공간에서는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결과로 변할 수도 있다. 삶에서 예외성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이다. 어떤 장소는 우리의 상상을 현실화시키고, 더 나아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 삶을 열어주기도 한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와 같은 고전의 세계에 둘러싸여 평생을 살아온 남자 그레고리우스. 매일 아침 15분 전 8시에 학교로 향하는 시계추 같은 삶을 살아왔던 그가 우연히 마주친 포르투갈 여자와 어쩌다 손에 들어온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포르투갈어 책으로 인해 평생 살아온 도시를 벗어날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책의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것만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문장에 꽂힌 그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30년이 넘도록 자신이 헌신한 학교의 교장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구절을 남긴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영혼의 떨림을 따라 온 리스본에서 그는 <언어의 연금술사>를 쓴 의사 아마데우 프라두의 흔적을 좇는다. 존경받는 의사였던 그는 의사의 윤리에 따라 인간백정이라고 불리던 비밀경찰의 목숨을 구한 후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게 된다. 속죄라도 하듯 비밀 결사에 참여해 저항운동을 시작한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라고 일찌감치 믿었지만 그는 지나친 예민함 때문에 저항 운동을 견딜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절의 포르투갈은 우리의 풍경과도 겹쳐졌다. 말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도, ‘거짓말을 잘하는 것이 생사를 가르는, 끔찍한 독재정치’도, 저항 운동을 하다 받은 고문으로 육체가 망가졌으나 끝내 존엄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도 닮아 있었다. 신의를 종교처럼 여기고 언어의 의미에 집착했던 아마데우의 삶을 좇는 동안 그레고리우스는 제 삶의 의미 또한 새롭게 찾아간다. 삶이 논리와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결정적인 일들은 우연에 기대어 혹은 운명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아마데우가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인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이라고 했듯이.



도시에 생기를 부여하는 레몬색 전차.


내가 11월 중순에 갑자기 리스본으로 향한 이유도 책이 남긴 여운 때문이었다. 리스본은 과연 언덕의 도시였다. 이 도시에 대한 가이드북을 썼던 페소아는 7개의 언덕이 있다고 했지만, 언덕의 개수는 늘 가벼운 논란거리였다. 트렁크를 끌고 그 무수한 계단을 올라가던 밤, 숨을 고르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발밑으로 집들의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11월 중순이었는데도 리스본은 따뜻했다. 아침마다 햇살이 투명하게 쏟아져 내렸다. 따스한 온기와 테주강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 이 도시에 생기와 활력을 부여하는 노란 전차에 마음이 들떴다. 전차가 비좁은 골목 사이로 지나갈 때면 건물 안에서 손을 내밀면 전차 안의 사람과 악수를 나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명한 레몬 색깔의 전차는 적당히 낡은 도시에 생기를 부여했다. 어두운 골목에서 노란 불빛을 밝힌 전차가 거친 기계음을 내며 나타날 때는 애잔한 기분에 젖어들고는 했다. 나무틀을 댄 창가에 비치는 사람들의 얼굴도 향수에 젖어있는 것 같았다. 이 도시 사람들이 ‘사우다드’라고 부르는 애환의 정서. 슬픔, 애수 혹은 향수. 지금은 사라진 것들과 시대에 대해 느끼는 애잔한 갈망이라고 했다. 속삭이듯 말하는 사람들의 낮은 음성이 그런 느낌을 더 부추겼다. 


고풍스러운 거리 식당에서 시민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유럽의 대항해 시대를 연 리스본은 한때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였다. 1755년 11월1일 전까지는, 만성절 축일에 일어난 지진과 세 차례의 해일, 5일간 이어진 화재. 이 참사로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주민의 10~20%가 생명을 잃었다. 잔인무도한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공간에 기대어 삶을 이어왔으니 이 도시의 정서가 애수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인간이 장소에 기대어 삶을 이어가는 한 이 세상 어디에 애수 어린 향수를 품지 않은 도시가 있을까?
삶이 있는 한 어떤 공간에서나 고통스러운 일들은 생겨난다. 다만 정해진 레일만을 달려가는 시간이라는 열차의 바퀴자국이 그 상처를 희미하게 만들 뿐. 냉정한 시간이 이제는 치유자가 되는 아이러니가 우리의 삶이다. 길고 고통스러운 치유의 과정이 고스란히 쌓여온 공간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지나가버린 시간을 그리워하면서도 공간을 바꾸어 삶 또한 변화시키고 싶다는 모순되는 욕망을 안은 채로. 아마데우 안에 길을 떠나길 원하는 여행자와 과거를 향한 향수병을 앓는 두 사람이 있었듯이.

나는 낮이면 아마데우의 집과 병원이 있던 곳으로 묘사된 바이후 알투 언덕을 거닐고,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했던 아우구스타 대로를 기웃거렸다. 도시에 어둠이 내리면 상타 주스타 타워에 올라 테주강과 주홍색 기와지붕들 너머로 해지는 모습을 바라본 후 더없이 구슬픈 파두의 선율이 흘러나오는 알파마 지구로 향했다. 좁은 테이블을 가득 채운 사람들 사이에 앉아 지금의 자신이 아닌 다른 가능성을 꿈꾸며 이 도시로 날아온 그레고리우스를 찾았다. 한 번 파두를 듣고 나면 그 애잔한 선율을 잊어버릴 수 없게 되듯, 한 번 리스본을 찾아오게 되면 리스본의 햇살과 바람은 그의 몸과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어느날 문득 영혼 안쪽에서부터 그 바람이 불어오고, 햇살이 몸을 데우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 밤이 오면 당신 또한 열차표를 손에 쥐고 영혼의 떨림을 따라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탈지도 모른다. 이 삶이 아닌 다른 삶으로, 지금이 아닌 먼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데려다줄 야간열차를.



경향신문 [김남희의 앉아서 하는 여행, 몸으로 읽는 책] (21) 영혼의 떨림을 따라가라, 상상을 열어주는 공간으로  에서 옮김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travel/khan_art_view.html?artid=201801112114005#csidx204e6f1f5b2d1ac98b5fd90977643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