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60 (5월6일) 숙제같았던 타지마할을 다녀와서

프리 김앤리 2009. 5. 6. 16:28

'인도여행' 하면 가보고 싶었던 곳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타지마할 한군데였다.

아마 학교 다닐 때의 기억때문이리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건축물에 담겨있는 사랑조차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델리에 들어오자 마자, 타지마할로 가는 투어버스를 신청해두었다.

기차로 가고 싶었지만, 기차는 이미 예약이 다 차 어쩔수가 없었다.

 

아그라 성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자한이 결국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유배되어 비참한 말년을 보낸 곳이다.

자신의 사랑하는 부인의 무덤인 타지마할을 야무나 강  너머 멀리서 보기만 하면서...

엄청난 규모와 작렬하는 태양아래의 붉은 벽돌...

 

아그라 성 내부...

너무 더워서 사람들의 걸음 조차 느릿느릿하고 그늘로만 다닌다.

 

아그라 성의 정원 

시원한 키 큰 나무라도 심어놓았으면 좋으련만...

 

멀리 보이는 것이 타지마할이다.

샤자한은 이곳에서 저기 멀리 있는 타지마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드디어 타지마할로 왔다.

타지마할은 우리들에게 "사랑의 화신" 처럼 알려져있다.

샤자한왕이 죽은 왕비를 위한 무덤. 저승의 길이라는 서쪽으로 문을 내고 내세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는 무덤...

 

사춘기 여학생인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건축물이었다.

온통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 해가 지는 시간이면 붉게 물든다는...

 

"사랑의 화신"으로 극찬을 받던 타지마할을 여기와서 느낀 것은 좀 다른 것이었다.

건축광이었던 샤자한이 이 타지마할을 짓느라고 국고를 엄청나게 낭비했다는 사실.

그래서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결국 유폐되었다는 사실...

 

몇백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는 엄청난 빈부 격차를 겪고 있는 것 같은데...

길거리에는 오물과 쓰레기와 범벅으로 뒹굴로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것 같은데...

 

그 당시에 이렇게 많은 흰 대리석으로만  엄청난 건축물을

이렇게 화려하게 지었다니...

 

망할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사랑의 화신" 보다는 " "사치의 극치"  " 민중의 분노와 절망"이라고 표현했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서쪽 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바라 보이는 타지마할...

교과서나 잡지에서 숱하게 보아오던 장면이다.

 

 

땀에 절은 옷으로 그래도 타지마할 앞에서 한 장.

햇볕이 너무 따가워 짧은 바지보다는 긴바지가 더 낫다는....

 

달궈진 대리석 바닥이 마치 찜질방의 돌 같더라는...

 

타지마할을 가면 해질녁에 가라고 했다.

그런데 단체로 가는 거라 마음대로는 못하는게 정말 아쉬웠다.

해가 지면,

그래도 우리가 실망했던(화나게 만들었던) 타지마할이었지만,

그 자체로의 아름다움이라도 더 느낄 수 있었을텐데...

미처 해가 지기도 전에 우리는 떠나와야 했다.

(타지마할과 아그라 성... 우리를 화나게 했던 건 또한가지가 있었다.

입장료.

인도 사람들은 타지마할의 입장료가 10루피, 그런데 외국인은 이들의 75배인 750루피...

10배도 20배도 아닌 75배....

상상이나 할 수 있나?

우리가 타고 온 투어 버스가 45인승이었는데, 그 안은 우리 둘을 빼고 모조리 인도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 다 합해봐야 입장료가 430루피 밖에 안되는데,

우리는 한명이 750루피, 둘을 합하면 무려 1,500루피였다.

외국인이 타지마할을 보존해야 하는  무슨 봉인가????)

 

 

그래도 예뻤다.

분수에 비친 성문 그림자...

 

 

아름답기는 아름다웠다.

두번 갈 곳은 못되지만...

인도를 가면 반드시 가야만 할 것 같았던, 타지마할.

숙제를 하나 해 치운 느낌이다.

 

.......

델리 식당에서의 일이다.

그 때 우리는 인도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서양인들이 맥주를 시켰는데, 맥주병은 없이 컵에 맥주를 부어 온거다.

서양애들은  “병째로 갖고 와라. 그리고 우리 보는 앞에서 따라라”라고 요구했고,

종업원은 여기서는 그렇게 안한다고만 계속 답했다. 서양애들은 자기네들끼리

 “ 여긴 인도다. 어떻게 믿냐?  물을 섞었는지, 혹시 다른 뭔가를 섞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아냐” 며 그냥 나가버린다.

그래도 종업원은 어쩔수 없단다.

그 때 우리는 그 서양애들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여긴 인도인데, 어떻게 믿을 수 있냐?’며.

 

그런데 그리 길지는 않지만 인도 여행 중에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인도 사람들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으며, 술을 파는 곳도 거의 없다는 사실.

그리고 한정된 곳에서만 술을 팔고 있으며, 설사 술을 산다고 해도 술병채로 길거리에 들고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

맥그로드 간지에서 만난 치과선생님 부부랑 맥주 한잔 하려고 술 파는 곳에서 맥주 3병을 사서 집까지

그냥 병째로 들고 오기 뭐해서 신문지로 꽁꽁 싸서 집으로 왔었다.  성인 4명이 고작 5도짜리 맥주 3병을 사서 감춰? 가지고..

이 곳의 문화였다.

그러니까 ‘맥주를 병째로 달라는 서양애들’과 ‘술병을 드러내놓고 판매하지 않는다는 식당의 방침’이라는

서로간의 문화의 충돌인 셈이다.

 

20여일의 여행 뒤에 이제 우리는 전적으로 그 서양애가 맞다고만은 말할 수 없게되었다.

 

이해하고 싶었다.

이해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인도에 대한 ‘더럽다’ ‘위험하다’ ‘사기를 잘 친디’는 등의 선입견을 이번 여행을 통해 없애고 싶었다.

서로간의 다른 문화라면 이해해야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었다.


조금은 풀린 건 사실이다 .

그래도 여전히 이 거대한 땅덩어리 전체를 쓰레기와 오물로 뒤덥히게 한 이들을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다.

사람도 많은데다, 개, 소, 돼지, 낙타가 범벅이 되어 쓰레기도 뒹굴고, 동물도 뒹굴고,

그 사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고 밥먹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굴제국, 영국제국주의의 그 오랜 침략 속에서도

묵묵히 지켜왔다는 힌두교의 전통이라는 것도 온전히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전히 인간을 계급화 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너도 나도 받아들이는 이 사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인도를 떠나는 지금, 아직도 혼란스럽다.

쓰레기, 오물, 카스트, 많은 인구는 인도가 풀어야 할 숙제다.

 

오늘 저녁 , 드디어 이란으로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