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91(6월 29일)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도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프리 김앤리 2009. 6. 30. 07:41

드넓고 푸른 초원, 시원한 바람, 깨끗한 공기, 끝없는 바다, 낯설고 경이로운 풍경...

그리고 트레킹...

아일랜드에서의 하루하루는 항상 자연과 함께 였습니다.

이렇게 실컷 걸어본 적은 정말 처음입니다.

 

그런데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는 자연이 아니라 역사와 만났습니다.

늘 뉴스에 등장하던 벨파스트.

폭탄, 테러, IRA, 평화 협정, Bloody Sunday, 분쟁...

'벨파스트'라는 도시와는 뗄수 없는 단어들이었습니다.

 

아일랜드하면 느껴지던 친근한 음악과 그 평화로움과는 달리

뭔가 어둡고 두려운, 그러면서도 항상 관심이 가는 역사의 현장, 벨파스트에 들어왔습니다.

 

숙소로 정한 International Youth Hostel 에서 우리를 맞고 있는 투어는 지금까지의 것과는 색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지나온 Giant's Causeway 투어도 있었지만

'Political Tour'라는 생경한 포스터가 우리를 맞습니다.

역시 정치적인 이슈가 강한 곳입니다.

 

1998년에 평화협정을 맺어 이제는 도시 어디에도 폭탄테러의 무서움을 발견할 수 없는 데도

이 사람들은 이것을 역사의 한 장면으로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벨파스트에 유명한 것은 이 벽화입니다.

City Sightseeing 버스도 , Political Tour도 이 정치적인 벽화들을 둘러봅니다.

정치색 강한 대형 벽화들이 거리 곳곳에서 보입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보이며...

 

이 벽화는 바비샌즈에 관한 그림입니다.  

 

바비샌즈는 (1954-1981)는 IRA (아일랜드공화군) 출신의 시인이자 투사였습니다. 

그는 1972년 10월 자택에서 무기소지혐의로 체포되어 1976년 풀려났으나

다시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됩니다. 

감옥에서 바비 샌즈는 두루마리 화장지에 시와 글을 적어 밖으로 내보냈고, 이것이 신문에 게재되어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는 영국이 관리중이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자신들을  정치적 수감자로 인정해 줄것과 재소자 처우개선을 주장하며

소위 "담요 투쟁"과 괕은 영국에 대한 투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마가렛 대처는 이들을 범죄자로 규정하며 일체의 협상도 거절하여,

바비는 단식 투쟁에 들어가게 되고 3월 23일 교도소 내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릅니다.

3월 30일 ,그는  Fermanagh 와 South Tyrone 지역 선거후보로 옥중 출마하게 되고 3만표를 넘는 지지를 받고 당됩니다. 

하지만 바비 샌즈는 1981년 5월 5일 새벽에 65일간의 단식투쟁 끝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장례행렬에는 10만명이 넘는 아일랜드인들이 운집하여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합니다. 

 

젊은 날을 치열하게 보낸 우리로서는 관심이 가는 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IRA의 정치조직인 신페인당(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의 부대표 였던 모양입니다.

도심의 한 벽에는 이 사람의 죽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신페인당의 다른 멤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벽 글귀도 보입니다.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죽어간 이들...

   

우리는 아일랜드 분쟁 이야기를 하면

주로 제국주의자 영국의 억압,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

그래서 이들의 핍박만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아일랜드에서 죄없이 죽어간 사람들은 모두 아일랜드 분리 독립주의자만이었다고...

 

그런데 벨파스트 시내에서는 또 다른 희생자들의 죽음도 만났습니다.

IRA, 신페인당등이 구교도를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독립주의자였다면,

신교도 중심의 UVF, UDA와 같은 친 영국계 단체도 있었고,

서로간의 끊임없는 분쟁속에 이들 역시 죽음이라는 비극을 피할 수 없었나 봅니다.

 

벨파스트 곳곳에 이들의 죽음을 알리고 있는 벽화, 비석들이 또 있습니다.

 

하루종일 인간과, 분쟁, 비극, 죽음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UVF의 벽화.

이들도 잊지 않겠답니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죽음은 죽음을 남기는가 봅니다.

 

 

북아일랜드에는 영국계 신교도가 58%, 나머지가 원래 아일랜드 출신 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서로 같은 학교도 다니지 않고, 어떠한 공통체도 없고,

같은 지역에 살지도 만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영국계가 사는 지역', '아일랜드 계가 사는 지역' 하며

폴 거리, 샹킬거리로 나누어 중간에 이렇게 장벽까지 쳐놓았습니다.

베를린 장벽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증오와 분단?이 높은 철망사이로 느껴집니다.

90년대 뉴스에서 아일랜드 폭탄하면 나오는 거리가 주로 이들 거리였습니다.

 

장벽을 따라 걷는데...

마음이 저려옵니다.

 

서양의 어느 도시를 가도 이렇게 많은 교회를 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아니 이렇듯 적극적 선교활동을 벌이는 교회들을 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은 대부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육중한 성당들이 도심을 상징하고 있었다면,

여기 벨파스트의 영국계가 사는 거리에는 한 모퉁이를 돌아서면 교회, 또 다른 모퉁이를 돌아서면 교회가 보입니다.

더구나 모든 곳에는 여러가지 선전문구까지 붙여놓고...

 

그런데 잘 알다시피,

지금의 북아일랜드는 벨파스트는 아주 조용합니다.

2002년 양쪽이 서로  평화협정(Good Friday 협정)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평화협정에는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 그리고 얼스터연합당과 민주연합당, 사회민주노동당, 신페인당 등

북아일랜드 8개 정당이 공동 서명했습니다.

이 협정은 1998년 5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북아일랜드의 71%, 아일랜드의 94% 지지를 얻었습니다.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국민 대다수가 평화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죽음들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밸파스트의 벽화는 양쪽의 희생이나 죽음, 주장을 알리는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역사를 그려놓은 것도 대단한 벽화였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날, 기쁨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주택가의 한 벽면입니다.

 

일차대전에 참가하는 아버지와 아들들의 모습을 그려놓은 벽화도 있습니다.

전쟁에 참가하려고 들뜬 마음으로 줄을 서있는 장년과 청년들의 모습과 함께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부인, 가족의 모습도 한쪽에는 그려놓았습니다.

아들을 꼭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도 보이고..

  

이들도 평화를 바라고 있습니다.

세계 일차대전, 이차대전에 참가한 모습을 자랑스럽게 그려놓고,

분쟁 당시의 모습도 그려놓고...

Gooa Friday Agreement(굿프라이데이 협정)을 들고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

그림에는 아직 평화를 의심하는 ...

바라고만 있는 평화가 아니라 이미 평화가 찾아와 있었습니다.

 

(마침 여기에서 뉴스를 검색해보니,

며칠전 6월 27일자로 신교세력인  UVF와  UDA도 기자회견을 갖고 " 모든 무기를 완전히 폐기하는 절차를 끝냈다"며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제  "무장 투쟁의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이들의 발표를 읽었습니다. )

 

이제 이들은 자신들만의 평화를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평화를 기원하는 벽화도 많이 그려놓았습니다.

"Everyone has the rght to live free from Sectarian /Racist harassment!!!"

"어떠한 종교로 부터도, 인종적인 핍박으로 부터도 모든 사람은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커다랗게 그려놓은 벽화에 새겨넣은 문구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스라엘 문제도 그려놓고...

 

바스크 민족에 관한 이야기도 그려놓았습니다.

이제 쿠바에 대한 장벽을 풀라며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Time for change Mr OBAMA' 랍니다.

 

세계의 평화를 바라는 거리 벽화로 되어 있습니다.

벨파스트 시내를 돌아보는 투어 버스가 오른 쪽으로 들어오고 있네요..

사람들은 내려서 사진을 아주 많이 찍습니다.

 

인간의 권리 선언도 그림으로 그려놓았습니다.

벽화를 찾아다니며 벨파스트 시내를 한바퀴 다 돌았습니다.

 

버스 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동상.

별로 예쁘지도(?) 않는 여자를 왜 이렇게 만들어두었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여성평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왼쪽은 가정에서 일하는 주부, 오른 쪽은  밖에서 일하는 주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왼쪽 여자의 귀걸이는 우유병 젖꼭지, 가슴에는 우유병이, 가슴에 걸려있는 건 시장바구니,

그리고 뒤를 보면 옷걸이, 다리미, 부엌 살림살이 등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몸에는 가정에서의 노동을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글귀를 써두었습니다.

 

오른 쪽 여자도 마찬가지.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몰랐던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국에서는 1918년에 이미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되었는데,

북아일랜드에서는 1969년까지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네요.

우리나라보다 더 늦게 여성 투표권이 인정된 것입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네요...

 

어느날 북아일랜드 의회를 독점하고 있던 극우파 개신교세력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긴급 회의를 연다.

의원 1 :런던에서 연락이 왔습니다.여성투표권을 지연시키는것을 더이상 인정할수 없다고 합니다.
의원 2 :그렇다면 이제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우리와 같은 편인 개신교파 여성들에게만 투표권을 주는건 어떨까요?
의원 3 : 그건 말도 안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가톨릭쪽의 여성들은"우리도 똑같은 여성인데 왜 우리만 차별하느냐"며 절대 가만있지 않을겁니다.
          지금도 불안한 상황인데 그렇게 제한을 한다면 더 걷잡을 수 없는상황이 됩니다.
의원 4 :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가톨릭쪽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는것이 좀 두렵습니다.
          아니 싫다고 해야 솔직한걸까요?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투표권을 주었을때 이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우리가  미워하고 짓밟았던 가톨릭교도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 심각하게 생각해 봅시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보면 가톨릭교도들은 가톨릭후보를 많이 밀어주는 경향이 생기겠지요
          한이라는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의원 1 :맞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몇백년동안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우리 자신이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너무 많아서 너무 끔찍해서 다 얘기하려면 평생 말해도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들을 인간으로 대한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권리를 얻으면 그동안 그들에게 밉보였던 우리가

         (의회의 의자를 가리키며) 이 자리에 있을수가 없게된단말입니다!!
의원 5 :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투표권을 줘야 합니다!!
           비록 우리 모두가 그들의 지지를 얻지못해 선거에서 패해도 국회의원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임무

          즉 그들에게 저질렀던 모든 잘못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말입니다.....
(결국 투표권은 통과되었다. 40년간 연기되었던 투표권인정이 드디어 실현된것이다.)

 

아!! 북아일랜드는 이렇게 살아왔구나..

지금의 벨파스트는 아주 평화롭습니다.

벨파스트 시청사 앞.

 

Queen's 대학

 

대학 건물 본관에는 갈릴레이의 동상이 있습니다.

지구본을 아래에 놓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몰랐던 사실 한가지.

여기 벨파스트의 선박공장에서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를 만들었다네요.

 

타이타닉호의 도크.

도크가 얼마나 큰지 , 저기 중간에 쬐그맣게 서있는 게(까만 선?) 사람의 실물크기로  만들어 놓은 모형입니다.  

당시 아일랜드의 선박건조술은 세계적 수준이었던 모양입니다.

 

 

벨파스트 시내의 거리...

 

지금 벨파스트 는 아주 평화롭습니다.

 

 

이건 Tip,

어디 배나 쫄쫄 굶고 다니는 가 걱정할까봐...

벨파스트의 저녁 식사입니다.

생선 튀김과, 야채 볶음, 그리고 샐러드, 토스트, 와인까지...

한국에서 처럼 배가 부를때 까지 먹는 건 아니지만,

이만하면 만들어 먹는 식사로 괜찮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