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121 (7월 29일) 편안한 라우터브루넨에서

프리 김앤리 2009. 7. 29. 23:16

한국에서의 일상은 그랬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해도 요일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오늘이 월요일인지, 화요일인지...

그래서 어느 반 수업이 있고, 진도는 어디까지 나가 있고, 그래서 무엇을 준비해야하는지, 무엇을 들고 교실에 들어가야 하는지...

 

시각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했다.

적어도 아침 7시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되고,

몇교시 몇교시에는 수업이 있고, 빈 시간에는 무엇을 해야하고....

12시가 되면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어야 하고, 저녁 5시가 되면  공식적인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오늘은 수요일이니까, 혹은 금요일이니까... 남아야 하고,

그래서 저녁 8시 50분이 되면 복도에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혹은 무슨 요일에는 저녁 몇시에 약속이 있고...

언제 회의를 해야하고.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무엇을 처리해야 하고...

 

항상 요일과 시간, 약속, 해야 할일에 집중하고 있어야 했다.

날씨가 덥든지, 춥든지 비가 오든지 혹은 맑든 간에...

신경써야 했었다. 그 많은 숫자들을 기억하고 있어햐 했다.

 

남편은 나보다 훨씬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다니는 일주일 단위의 빽빽한 스케쥴표를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

요일단위, 시간단위보다 훨씬 세밀한 분 단위의 일정표...

쉴새 없이 기계가 돌아가는 것 처럼, 잠시의 여유도 없었다.

계절의 시간은, 자연의 시간 흐름은 우리에게 전혀 없었다.

 

사실 여행을 떠나와서도 우리는 우리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떠나지는 못했다.

몇시 기차를 타야하고...

걷고 있더라도 언제까지는 돌아와야 마지막 버스를 탈수 있고...

어디에, 몇일에 예약을 해두었으니 그 날 까지는 거기로 들어가야 하고...

한국에서의 일상과는 비교가 안 될정도로 느슨하기는 했지만...

 

그런데...

여기 스위스 라우터브루넨에서의 시간은 순전히 자연에 맡겨져 있다.

'아! 주변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저녁이 되었구나, 저녁을 먹고 잠을 자야겠네'

'오늘은 날씨가 맑으려나?'

아침에 일어나 창가를 들어오는 햇살의 양을 보면서, 그리고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오늘, 산을 오를까 말까'를 결정하고...

'오늘 밤엔 별이 많은 걸 보니 내일은 저쪽 산자락을 한번 올라가볼까?'

'오늘은 두꺼운 옷을 입어야 겠구나... 오늘은 그냥 샌들을 신고 나가도 되겠구나...'

'교회의 종소리가 들린다. 또 한시간이 지나갔나???'

 

일출과 일몰, 맑음과 흐림...

순전히 우리의 일상을 자연의 변화와 시간에 맡겨놓고 있다.

30일 아침, 다음 SBK팀이 이곳 라우터브루넨에 나타나기 전까지

책을 읽고, 비디오를 보고... 햇살이 화창하면 밖으로 나가 이 산 저산을 오르고... 산책도 하고...풀냄새도 맡고...

짐을 풀거나 새로 싸지도 않고 같은  방에서 일주일이 넘도록 살고 있다.

편하다.

참 편하다.

 

그렇지만 우린 두개의 시간과 두개의 공간에 사는 듯하다.

이곳이 오후 5시면 한국은 자정이고,

스위스에 있으면서도 한국의 뉴스를 보고,

우리의 스위스 여행을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이 동시에 보고..

그래서 우리의 안전과 우리의 여행을 부분적으로 나마 같이 하고.

우리가 사는 두개의 시간과 공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간밤에는 천둥과 번개, 무섭도록 비가 내리더니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에 구름하나 없이 화창하다.

산으로 가야겠다.

슈첸바흐 산장 마당에서 보이는 알프스가 오늘은 선명하다.

 

크라이네 샤이데거Kleine Scheidegg까지 오르기로 했다.

SBK팀이 오면 융플라우 꼭대기를 가면서 다시  오르겠지만...

2,061m의 크라이네 샤이데거까지만 오늘 올라가서 걸어 내려올 작정이다.

분명 SBK팀은 그린델발드Grindelwald쪽으로 걸어내려갈 테니까

오늘 우리는 다른 쪽으로,

기차가 올라가는 벵겐Wengen쪽으로 내려와야지...

 

생각처럼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기차 차창 밖으로는 자전거로 올라가는 이들도 보인다.

대단하다.

 

클라이네 샤이데거 역.

항상 많은 여행객이 붐비고 있다.

 

클라이네 샤이데거 역 약간 위에 있는 레스토랑 앞에서.

레스토랑의 창문에 알프스가 선명하게 반사되어  걸려있다, 

마치 그림처럼.... 사진처럼...

 

바로 앞에 보이는 산이 융플라우다.

다른 이들은 산악 기차를 타고  

저 암벽을 뚫고 융플라우로 올라갔다.

거기는 30일에 기차타고 오르기로 하고...

 

우리는 아이거글레셔 Eigergletscher(2,320m)역까지 걸어서 올라갈 작정이다.

여기를 세번째 왔는데 한번도 이곳을 직접 걸어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많이 나니 이런 트레킹도 해본다.

그런데 트레킹을 하는 외국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 사람들은 융플라우(전망대 3,454m)를 안올라가는지...

우리는 어디를 가면 꼭 거기의 꼭대기를 올라야 직성이 풀리는데...

 

융플라우를 등지고

아이거글레이셔역까지 오르는 길... 

 

길도 잘 나있다.

우리나라 산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정도는 껌값(?)이다.

그런데 고도가 높아서인지 숨은 좀 찬다.

헉헉...

 

융플라우를 오르는 스위스 산악열차.

클라이네 샤이데거 역부터 융플라우 전망대까지는 기차가 암벽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한무리의 일본 관광객들.

나이가 제법 지긋하신 분들이다.

이 분들은 융플라우전망대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오다가

아이거글레이셔 역에서 내려서 클라이네 샤이데거 역까지 걸어내려온다. 

거기서 다시 기차를 타고 아래까지 가고...

 

우리는 주로 클라이네 샤이데거 역에서 한두시간 정도 아래까지 트레킹해서 내려가는데...

이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아이거 북벽, 융플라우, 뮌흐(Monch) 의 눈 덮힌 아름다운 봉우리를 다 보면서 내려오는 트레킹이니까...

나이가 제법 드신 분들인데도 하산하는 길이라서 그런지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다.

 

아이거 북벽을 바라보고...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오르는 것이 꿈이라는 곳.

나는 그저그 밑에서 바라보기만...

 

드디어 아이거글리이셔 역까지 걸어올랐다.

여전히 하늘에는 구름 한조각 없다.  

빙하는 바로 눈앞에 보이고...

자전거를 타고 힘겹게 올라온 외국애들은 해만 화창하면 저렇게 윗도리를 훌렁훌렁 벗는다.

우리는 햇볕을 피해 그늘만 찾는데...

 

 알프스의 빙하가 바로 눈앞에 보이고...

저기 끝에 서있는 사람은 자연의 한 점...

 

나도 역시...

 

이제는 내려가야지...

그런데 한무리의 자전거 부대가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이야 상쾌하고 시원하게 보이지만...

이 길을 올라올 때는 죽을 힘을 다했겠지...

2천 3백m를 자전거로 올라오다니...

그냥 걸어오는 우리도 숨 쉬기가 약간 힘들었는데...

 

아까 위에서 봤을 때는

등은 온통 땀으로 젖어있고... 

허리도 제대로 못피고 헉헉 숨을 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내려가는 모습은 이리도 상쾌할 수가...

 

산악열차길.

철도가 모두 톱니바퀴 모양으로 되어있다.

(사진에서는 잘 안보이는 구만...)

 

아이거 북벽을 뒤로 하고...

NORTH FACE

우리가 아는 유명 스포츠브랜드다.

이는 보통 세계 3대북벽을 의미한다고 한다.

아이거북벽, 마테호른 북벽, 하나는 모르겠다.

1830년대에 아이거북벽의 정상을 정복?하려고  많은 젊은 이들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서양여행객들은 아이거에 망원경을 대고 한참이나 들여다 본다.

 

어린아이에게 아이거 북벽을 설명하는 가족들..

아이거 북벽과 무슨 연관이 있는 사람들인지....

 

ㅋㅋ

우리를 버려두로 아래로 내려가버리는 알프스 기차...

타고 내려가도 되는데...

또 어찌 우리는 산위에 그냥 남아있는지...

ㅋㅋ

 

노부부가 트렉킹을 하다가 쉬고 있다.

이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산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을까?

 

별로 바쁠 것도 없다.

누군가를 만나야 할 약속도 없고,

처리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천천히, 쉬엄쉬엄...

다른 사람들도 보면서 산길을 내려간다.

 

2,300m에서 800m까지...

그냥 터벅터벅...

 

산 한번 보고, 하늘 한번 보고...

 

이렇게 높은 곳에도 알프스에는 사람이 살고 있구나...

자연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그런데 정말 산은 지겹지가 않다.

이 초록색도...

 

제법 내려왔는데 눈이 쌓여 있는게 보인다.

초록 풀밭에 내린 눈은 대부분 다 녹았는데

이건 아마 흙으로 덮혀 있어서 녹지 않고 그대로 있나 보다 .

중간에는 녹아서 시냇물로 흘러내리고 있다.

 

2,500m를 넘어가면 풀 한포기 없는 암벽에 눈 덮힌 산만 있다가

그 조금 아래는 나무는 없이 초록 풀밭만 보이다가...

그보다 더 아래로 내려오면 드디어 나무도 보인다.

 

생명은 자기가 살아갈 수 있는 곳에 터전을 잡는다.

 

드디어 벵겐Wengen 마을. 

1,274m 높이에 있다.

융플라우지역에는 사람들이 머무를 마을이 아주 많다.

우리는 라우터브루넨 슈첸바흐 산장에 있지만

벵겐에도 사람들이 많이 머무르는 것 같다.

 

라우터브루넨에서는 알프스의 골짜기가 보이지만

여기 벵겐에서는 융플라우도 보이고, 높은 산봉우리가 그대로 보이는 절경이다.

 

저기 아래 마을이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라우터브루넨.

 

다시 우리집(?) 라우터 브루넨과 그 예쁜 교회...

오늘도 참 많이 걸었다.

무릎도 아프고, 정강이도 아프고...

내리막을 너무 오래 걸었다.

 

저녁이 다 되간다.

햇살도 약해졌고,,, 어둠이 온다.

저녁을 알리는 종소리도 들리고...

자연의 시간이 우리더러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푹 쉬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