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168(9월 14일) 오베르쉬르와즈, 파리를 거쳐 드디어 차를 반납하다

프리 김앤리 2009. 9. 17. 21:08

 차를 몰고 다니는 유럽여행. 오늘로서 드디어 마지막이다.

파리까지 들어가서 차를 반납해야 하는데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파리와 가까운 반고흐의 그림이 있는 오베르 쉬르와즈를 찾아가기로 했다.

(원래는 로댕의 '깔레의 시민' 조각상이 있는 깔레를 가려고 했었는데

 노트북을 받아야 해서 파리로 가야만 한다. 깔레의 시민 동상은 파리에 있는 로댕 박물관을 찾는 걸로 하고)

 

 

<반고흐의 그림과 진짜 풍경>

사실 반고흐는 내델란드 출신이다.

그래서 고흐 미술관도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에 있고.

프랑스의 오베르쉬르와즈, 아를은 반고흐가 한동안 머무르면서 작품활동을 했던 곳.

특히 오베르쉬르와즈는 고흐가 죽음을 맞이했던 곳,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던 곳.

파리 외곽에 있는 조그만 마을을 그토록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이유는

바로 고흐 때문이다.

그의 체취가 있는 곳. 그의 그림이 있는 곳...

 

오베르 쉬르와즈 시청사 .

고흐의 그림.

고흐가 머물고 있던 여관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이다.

 

시청사의 실제 모습.

우리는 여기다 차를 주차했는데...

1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이 모습은 그대로 있다.

 

고흐가 머물던 여관.

항상 생활고에 힘들어하던 고흐였다는데...

그때는 들로 산으로 미친갱이 처럼 쫓아다니는 그림쟁이 정도로만 여겼을법 한데...

지금은 이 마을 어디로 가나

고흐의 발자취가 있는 곳이라면 선전을 해 두었다.

지금 땅속에 있는 고흐는 후대에서의 자기 존재감을 알까?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하는 지를..

그리고 사람들이 노란색, 초록색, 붉은색, 파란 그 원색의 화려한 색감에 황홀해하는지를...

 

고흐의 모델이 되었던 여관의 주인.

오베르쉬르와즈에 살면서 그는 그의 담당의사 가제트와  이 여자를 모델로 몇장의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마을 중간에 있는 고흐 동상

액상프로방스에 있던 세잔 동상과 마찬가지로

고흐의 동상은 그림도구를 메고 들로 산으로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자연이 그들, 최고의 모델인 것을.

 

고흐의 그 유명한 '오베르쉬르와즈 교회'그림.

빨갛고 파란 지붕.

그리고 짙푸른(Dark Blue) 하늘.

누렇게 변한 잔디...그리고 한명의 여인.

교회 지붕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가만 있는 세상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일렁일렁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실제 교회의 모습이다.

누구말 처럼 고흐의 그림이 훨씬 더 멋지다.

 

고흐는 교회 지붕의 어디에서 붉은 색도 파란색도 보았을까?

어느 하늘에서 저토록 무서울 만큼 아름다운 짙푸른 색을 만났을까?

딱딱한 직선이 아니라 어디에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곡선의 지붕을 생각했을까?

 

작가의 영감이란, 작가의 상상이란...

아니 '천재의 색감'이란...

 

고흐의 무덤을 찾아 올라가는 길.

아마 고흐도 들판으로 가기 위해 이길을 많이 오갔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걷는다.

 

가을 들녁에는 이미 추수가 끝났다.

그가 아침 저녁으로 보고 다녔을 밀밭의 추수는 이미 끝나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들판에 낟알곡식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까마귀들만이 간간히 보일 뿐.

 

아주 초라한... 아주 소박한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

그 옆에는 평생 그를 사랑하고 그를 지원하던 동생 테오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그 유명한 '까마귀떼 날으는 밀밭'

(지금 도시에는 워낙 불빛이 많아서 해질녁이면 보이는 저런 짙푸른 하늘을 볼수 없는 거겠지.

 여행중에는 간간히 저런 하늘을 만나곤 한다.

 아무 불빛도 보이지 않는 새벽녁, 그리고 저녁무렵.)

 

어두운 파란 하늘에 노란 밀밭.

사정없이 몰아치는 바람. 그리고 하늘을 날고 있는 까마귀떼.

고흐는 이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밀밭의 추수는 끝났지만 옥수수 가지들은 그대로 남아 바람을 맞고 있다.

그냥 밋밋하게 직선으로 나있는 이 길을 고흐는 여전히

살아움직이는 길로 만들어 놓았다.

가을 들녁에 옥수수 가지가 흔들거리는 것 처럼...

밀대가 마구 흔들거리는 것 처럼...

 

오베르 쉬르와즈 인포메이션 센터 바로 앞길.

왼쪽 문이 지금의 인포메이션 센터로 들어가는 문이다.

지금은 아주 좁은 길인데

그때의 개념으로는 이 길이 제법 넓었나 보다 .

사람들도 많이 오가는...

 

고흐의 노란색... 파란색...

 

그냥 이런 평범한 길인데.

그림이 붙어 있지 않았더라면 관심조차 갖지 않을 길인데...

 

 

 <파리 - 네비게이션을 보내다>

아!!! 파리로 들어왔다.

파리가 감동스러운 게 아니라 지난 42일동안 우리와 함께 차를 무사히 반납까지 마치고

파리 숙소를 찾아와서 감동하고 있는 중이다.

 

파리 한인 민박집 ' 별하우스'

한인 민박집을 거의 찾지 않던 우리가 파리에서 한인민박집을 찾은 단 하나의 이유는 중고 노트북을 전달받기 위함이었다.

액정이 깨진 노트북은 진작에 투어야 여행사의 손대장한테 맡겨놓고

여행사의 다른 인편을 통해 노트북을 전달받아야 했던 것.

손준호 대장이 한국에서 건너온 노트북을 런던에서 받아 가지고 다니다가

파리까지 와서 이 집까지 일부러 찾아와서 맡겨놓고 갔던 것.

같이 세계여행하느라 노트북이 호강한다.

 

그런데 차도 반납하고 노트북도 전달받고 나니 다른 걱정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그동안 잘 쓰던 차량네비게이션을 한국으로 반납해야 하는데

그것도 액정이 있는 컴퓨터의 일종이라 보험을 들지 않으면 공항에서 받아주질 않는단다.

보험들고 DHL로 보내는 비용하니까

네비게이션을 사고도 남을 굉장한 비용이다.

누구를 통해 한국으로 보낼까?

민박집에서 만난 한 분에게 혹시 한국으로 좀 가져다 줄수 없냐고 물어보니까...

안되겠단다.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혹시 마약같은 거라도 들어있으면...

그 사람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잘 되면 아줌마는 큰 이익이고, 잘 못되면 자기는 패가망신하는 거 아니냐...

 내가 나랏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이라 그런 걸 할수는 없다.

 혹시 정신병원이라도 가 본 흔적이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빌빌 거리는 사람이라면

 공항에서 잘 못되어도 정상참작이 되겠지만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 그거는 못하겠다..."

 사실 맞는 말이다.

 나라도 생판 처음 본 사람이 무슨 물건을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하면 거절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못하겠다고 그냥 말하면 될것을 ..

무슨 중요한 나라일 한다고 운운하면서 거절을 하나?

그런 사람이 여자 화장품으로 무얼 사면 좋은지 묻고 다니고?

우리의 신분을 대강 밝혔는데도...

 

 고민고민하고 있는데

 참 마음 착한 청년을 한명 만났다.

 선뜻 전달해주겠단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믿어도 되거든요..."

 우리의 신분을 알릴수 있는 방법이 이 블로그밖에 없는 것 같아 블로그 주소를 알려주고

 한국에서 전달받을 조카 전화번호 알려주고....

 혹시 이 블로그를 본다면

 "성훈씨!!! 정말 고마워요...

  한국가면 꼭  연락할께요.. 해운대에서 술한잔 사겠습니다."

 

 고마워서 민박집에서 같이 사진 한장 찍었다.

 이 사람도 알고보니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던데...

별로 대단한 티도 안내면서...

세상엔 역시 마음이 열린 사람이 더 많은 듯하다.

 

 '별하우스' 이모의 음식솜씨가 워낙 뛰어나

 며칠동안 한국음식을 한끼에 몇그릇씩 잘 먹다보니

 살이 오동통하게 쪘다.

 곧 또 빠지겠지...

 

 

 <파리에서>

파리는 우리 둘다 두번씩이나 왔다 간 곳이라

시내 관광을 하는 데는 별 흥미가 없었다.

푹 쉬면서 책이나 읽고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인터넷이나 하자고.

차를 반납하고 네비를 처리해야 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하면서.

 

그런데 잘 돌아가던 민박집의 인터넷이 말썽이다.

덕분에 시간이 나서 파리 거리로 나섰다.

다른 곳은 다 제쳐두고

샹제리제 거리와

마리앙뜨와네뜨와 로베르스 삐에르가 처형된, 그래서 프랑스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고 있다던 콩코드 광장,

그리고 프랑스 혁명 시발점이 되었던 자리 '바스티유',

'깔레의 시민' 조각상이 있는 로댕 박물관만 찾아보기로 했다.

 

샹제리제 거리.

여전히(?) 개선문도 건재하다.

ㅋㅋ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이집트의 유물인 오벨리스크를 배로 실어오는 과정,

그리고 이 광장에 세운 과정을 그림으로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제국주의가 약탈해 온 유물을 사람들은 그저 무심히 쳐다보기만 하고...

 

오벨리스크 바로 그 아래

프랑스 혁명당시인 1793년에 루이 16세와 마리앙뜨와네뜨가 처형당한 장소이다.

굶주린 시민들을 외면하고 화려하고 부패한 생활을 하고 있던 무능한 왕과 왕비를 처형하면서

찾아낸 프랑스혁명.

프랑스는 자랑스럽게 그걸 알려놓았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을 주도한 로베르스 삐에르 역시 이 자리에서 처형당했다는 사실.

혁명이라는 게 민주주의의 그 대의 아래 그 가치대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공포정치만으로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기게 해주는 자리....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인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밀려난 자인가?

또 다른 역사의 현장이다.

 

바스티유도 찾아갔다.

프랑스 혁명 당시 성난 군중들이 몰려가 부수어 버렸다는 '바스티유 감옥' 있는 자리.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바스티유라는 지하철 지명에,

지하철 통로에 붙여 놓은 당시를 알수 있게하는 몇장의 사진뿐.

지금은 그냥 기념탑만 하나 달랑 있고 완전 현대 시가지로 변해 있었다.

 

로댕박물관을 찾았다.

20세기 최고의 조각가.

실내 건물에도 있지만 정원에도 그의 조각품이 여럿 보인다.

 

그의 작품 제목에는 유독 'Shade - 그늘, 그림자' 가 많다.

사람의 모습을 조각해놓고.

사람의 어두운 측면을 말하고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의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일까?

 

그의 작품에는 아담과 이브의 조각도 있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지옥의 문'도 있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것일까?

위대한 신에 대해서 늘 순종하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 것일까?

 

아니다.

인간만이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낀다. 모든 동물중에서

염치도 인간만이 가진 ...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에게 한마디 한다.

로댕이...

부끄러운줄 알아야 인간이다라고...

 

유명하고도 유명한 로댕의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 ' 천지 창조'의 한 부분에 등장하는 사람의 형상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생각하고 고뇌하는 사람을 표현해 놓았다.

 

우리가 로댕박물관을 찾은 이유는 바로 이 조각상 때문이다.

프랑스의 깔레에 가면 진품이 있다는  '깔레의 시민'

 

"깔레의 시민' 이야기는 이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역할, 사회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임무에 대한 생각으로

오랫동안 우리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이야기였다.

하고많은 프랑스의 도시들 중에서 깔레를 꼭 가고 싶었던 이유도,

단 하루의 시간이 있는 파리에서 로댕박물관을 꼭 오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이 깔레의 시민을 보기위해서였다.

위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의무)이면서도

죽음 앞에서 고뇌하고 번민하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잘 표현한 작품.

그 앞에 우리가 섰다.

 

(깔레의 시민 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여기다 정리하기는 힘들어 지식검색으로 옮겨왔습니다.

 EBS의 지식채널에서도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

더보기

로댕 갤러리 - 깔레의 시민 
 
<깔레의 시민>을 위한 기념비 건립 사업은 사실상 1819년부터 시작되었다.

 한 조각가가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의 흉상을 만들도록 위촉되었으며, 이 흉상은 1820년에 제막되어 2차대전 전까지 깔레의

오뗄 드 빌에 남아있었다. 이후 다비드 당제David d'Anger가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 기념비 제작의뢰를 맡았지만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1868년에는 또 다른 조각가가 제작의뢰를 받지만 프랑코-프러시안 전쟁의 발발로 무산되었다.
1884년 가을, 깔레시의회는 다시 공모안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공모안을 받아서 작품을 제작하기로 했으며 입상자에게 5,000프랑을 약속했다. 깔레에 사는 로댕의 친구중 하나가 그에게 이런 소식을 전했고, 깔레시 시장인 오메 드바브랭이 로댕의 스튜디오를 방문하도록 주선했다. 결국 로댕외에 다른 두명의 조각가도 안을 내도록 위촉받았다.
로댕이 이 작품기획안을 만들기 전에 작품의 주제에 대한 도상학적인 정보를 조사하여 충분히 고려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쨌든 그의 주된 영감의 원인은 이 사건에 대한 가장 상세한 묘사가 들어있는 14세기 장 프로와싸르의 연대기였다.

. .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의 가장 부유한 시민인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일어나 말했다 : "여러분, 이런 비극적인 사태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마당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서 굶어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 중 누군가가 우리들을 이런 운명에서 구한다면 국왕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제가 먼저 나서서 목숨을 바친다면 그분께 용서와 자비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는 기꺼이 홑옷과 맨발에 맨머리로 목에 밧줄을 두르고 나가 에드워드 2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 . .또 다른 부유하고 존경받는 시민인 장 데르가 일어서 그가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세번째 지원자는 자크 드 비쌍으로 상속받은 재산뿐 아니라 사업으로 벌어들인 재산이 상당한 자였다 : 그는 자신의 두 사촌과 함께 하겠다고 했고, 이어서 피에르의 형제도 나섰다. 그리하여 다른 나머지 두명과 함께 영국왕이 요구한 대로 홑옷만 걸친 채 목에 밧줄을 두르고 출발하였다 . . .

1884년 가을, 로댕은 <깔레의 시민>첫번째 모형을 제작하였다. 1884년 11월 20일 드바브랭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 작품은 건축적이고 조각적인 면에서 완벽하게 새로운 것입니다. 더욱이 서로 감정과 표현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여섯명의 순교자의 형상 그룹이라는 주제 자체가 워낙에 독창적이며, 영웅적인 개념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조각의 받침대는 개선문 받침에 개선문 아치장식에서 빌린 것이지만, 그 위에 영웅이 탄 전차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애국심, 극기, 덕성을 나르기 위한 것입니다. . . 저 자신도 모형에서부터 작품에 이런 우아함과 진지함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던 적은 없었읍니다. 인물중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는 홀로 손을 들어 그 단호한 동작의 위엄으로 그의 친척과 친구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
  
  
  이 편지에서 로댕은 작품가격으로 25,000프랑에 작가기획료를 따로 받는 다고 적고 있다. 1884년 11월 25일자 편지에서 기념비 가격은 34,000프랑으로 오른다. 주조공장에서는 주물 뜨는데만 15,000프랑이 들 것이라 했고, 석재 받침대를 만드는 데는 4,000프랑이 든다고 했다. 1885년 1월 중순쯤 위원회는 로댕의 모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나 작품을 완성시키기 전에 실제크기의 1/3에 해당하는 크기의 두번째 모형을 만들어 확인받기로 했다. 1885년 1월 28일, 양측이 계약서에 사인하였고, 로댕은 첫 지급액인 15,000프랑을 받았다. 나머지 금액은 작품설치 후에 받기로 했다. 
  그는 1886년에는 작품이 주물뜨기 전 단계까지 완성될 것이라고 공언했다.로댕은 생김새보다 강한 성격을 염두에 두고 모델을 찾아 각 인물의 형태를 발전시켰다. 로댕의 친아들인 오귀스트 뷔레와 동료화가인 장 샤를르 카쟁이 인체의 여러 부분을 위해 모델을 섰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설교하는 세례 요한>과 <걷는 남자>로 유명한 모델인 피나텔리가 키가 크고 마른 몸매의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의 나신상을 위해 모델을 섰다고 전해지고 있다. 로댕의 습관에 따라 각각의 인물들은 옷을 입히기 전에 나신상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제작과정의 중요성은 로댕이 드바브랭에게 보낸 1885년 7월 14일자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두번째 모형이 완성되었으며 보내기 직전이라고 썼다. 

. . . 그것(모형)은 보다 큰 크기로 확대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부가 둔해질테지만 이런 변화는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옷주름들은 보다 큰 크기로 제작되었을 때 다시 손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네킹에 옷을 입혔을 때 같은 옷을 입혀도 입힐 때마다 그 옷주름은 다르게 잡히듯이 이 모형의 주름이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옷주름 밑에 숨는 나신상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들을 완벽하게 제작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할 겁니다. 물론 여기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만 말할 나위없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은 끝났습니다 . . .
 
  습작 깔레시의 사람들이 로댕이 제출한 감동적인 작품인 두번째 모형에 불만을 품은 이유는, <깔레의 시민>에 대한 그들의 존경과 애정으로는 기존의 이상적인 인물상과 거리가 먼 그 모형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의 극렬한 반대는 상처받은 자존심보다는 아카데미 미술의 원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쪽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위원회는 주장했다.

. . . " 이건 우리의 영광스러운 시민들이 영국왕의 막사앞에 나섰을 때 보였으리라 생각한 그런 모습이 절대 아니다. 그 죄인같은 모습은 우리의 기대와 정반대이다. 인물들의 윤곽은 우아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요구한 것과 거리가 멀다. 작가는 바닥 면의 높이에 차이를 두어 인물 윤곽 사이의 단조로움과 건조함을 물리치고 다양한 높낮이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역사책에 언급된 가벼운 옷보다 너무 무거운 것을 걸치고 있다고 본다. 우리는 로댕 작가가 그 작품과 윤곽에 대한 태도를 누그러뜨리길 바라는 바이다. " . . .

이런 혹평은 로댕의 미학원칙상 가장 극렬한 글을 쓰게 한다. 적어도 1885년 8월 이전에 쓴 것이 분명한 드바브랭에게 보낸 날짜미상의 편지에서 로댕은 이렇게 썼다.

. . . " 저는 방금 벌써 들어본 적이 있는 비판을 그대로 되풀이한 깔레 일간지에 실린 글을 다시 읽었습니다. 작품속 인물들은 피라미드형을 이루어야 한다 : 사각형이나 직선을 이루면 안 된다. 아카데미식으로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말도 안되는 원칙에 반대합니다. 이건 벌써 오래 전부터 우리 시대를 가로 막아 왔던 원칙입니다. 이건 다음 시대의 위대한 예술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으로 경직되고 완고한 사고의 산물이며,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 작품은 관례에 굴복하게 됩니다.
두번째로 위스타쉬 드 생 피에르가 왕 앞에 서 있어야 한다는 평인데, 그럼 나머지 사람들은 뒤에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는 마을을 떠나 영국왕의 막사로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걷는, 움직이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겁니다. 위스타슈는 처음으로 나선 사람이므로 내 작품에서는 그는 이렇게 묘사되어야 합니다.
세번째로 기념비적 작품은 정원이나 건축적인 틀안 네모진 공간의 한가운데 설치되야 한다는 겁니다. 만일 이것만 피할 수 있다면 내가 만든 인물들은 구원받을 겁니다. 이 분들은 이게 삼분의 일 크기의 모형이며 최후의 작품은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될거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나는 연극같이 꾸민 아카데미 미술의 적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경멸하는 이런 관례적인 미술을 따르도록 하려는 겁니다.
사각형은 표현력이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원뿔형은 미술대상을 타려고 싸우는 학생들이나 만드는 것입니다. ". . .

이런 공격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작품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1886년 6월 17일 그는 약 2,000프랑의 금액을 받았는데 아마 1886년 에드몽 드 꽁꾸르Edmond de Concourt가 그의 스튜디오에서 본 확대 작품을 위한 비용이었던 것같다. 그의 일기에서 꽁꾸르는 "힘차고 사실적인 강조로 가득 찬 <깔레의 시민> 실물크기의 여섯 찰흙 인물상, 바리(Barye)가 그의 동물조각에 실현한 것 못지 않은 같은 아름다운 음영을 지닌 인간 육체"라고 썼다.
  
 
     
  1886년 깔레의 경제난으로 작품의뢰를 연기하게 되었으나, 로댕은 작품제작을 멈추지 않았다. 세명의 등신대가 넘는 크기의 인물들이 1887년 조르쥬 프티 화랑에서 공개되었고, 같은 화랑에서 1888년 다시 두명이 더 공개되었다. 1889년 봄 동안 전체 그룹이 석고상태로 [로댕-모네 이인전]에 공개되었다. 페레 회사는 그 조각상을 18,000프랑에 주조하려고 준비하였으나 아직 돈이 지불되지 않았다. 1890년 10월에 로댕은 드바브랭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다시 희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가 완전히 절망에 빠진 적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도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더 나아지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씩 제 인물들을 둘러 보고 그것들을 조금씩 수정하기도 합니다."  
 
      
 각 인물을 완성한 것은 로댕이 이 기념비 작품을 완전히 마쳤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인물들의 구성과 설치라는 더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었다. 로댕은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 . . " 나는 이 작품에 좌대를 원치 않았다. 나는 그들이 마을을 떠나 왕의 막사로 떠나는 순간처럼 보이도록 깔레시 광장 한복판 바닥 돌위에 고정되기를 바랬다. 이런 방식으로 제시되었을 때 그들은 당대의 일상생활속에 섞여들 것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팔꿈치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사람들은 깔레의 시민들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의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도시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의 귀감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이 선례를 따를 수 있는 영광이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들을 못지 않게 당당하게 나설 것이다." 그러나 작품제작을 맡긴 사람들은 나의 소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조각대가 없는 조각이라니! 그런건 어디서도 본 적이 없어! 꼭 받침대는 있어야 해 " 내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 . .
 
 
대안으로 로댕은 작품을 아주 높은 받침대 위에 놓는 방식을 생각해 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자신의 주장을 접고 보통 크기의 받침대 위에 작품을 세워야 했다. 그를 가장 골치 아프게 했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조각상이 경직되어 보이지 않느냐 였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동작들이 하나의 조각상안에 담기는 <설교하는 성 세례요한>처럼 여섯인물로 표현하고자 했다. 앞에서 보면 장 데르의 경직된 굳건함에서부터 시작해서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의 느릿한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정체되어 보인다. 어쨌든, 피에르 드 비쌍의 동작이 가리키는 대로 시계방향으로 관람자가 움직이면 동작들은 점차 빨라지고, 마지막으로 뒤에서 보면 시민들은 막 출발한 것처럼 팔다리들을 뻗고 있다. 로댕이 구성문제를 해결한 솜씨는 당시에는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다.  
  
      
  로댕이 직면한 또 다른 문제는 각각의 인물이 개성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동질감을 끌어내는 것이었다. 로댕이 고민한 바 있듯이 각기 다른 여섯명의 인물은 응집력을 잃고 서로 동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전체로써 균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통일감을 유지할 수 있던 이유중 하나는 <지옥의 문>에서 사용했던 방식대로 전체 작품에서 같은 부분들을 되풀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피에르 드 비쌍을 위해 만든 오른손을 자크 드 비쌍의 오른손으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피에르 드 비쌍을 위해 만든 오른손은 심술궂게 오므린 입술과 어두운 눈썹을 가진 머리는 장 데르와 앙드리유 당드르, 자크 드 비쌍에서 다시 되풀이 되었다. 관람객이 인물들 주위를 움직이며 관찰해 보면 똑같거나 비슷한 부분들이 되풀이 사용되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같은 형태를 풍부하게 변형시킨 것을 보면 단순히 전체를 통합하기 위해 이 방식을 사용한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1893년 9월 드바브랭의 주도하에 작품을 위한 비용이 조성되었다. 1894년 4월 로댕은 깔레로 가서 기념비를 놓을 장소를 물색함과 동시에 여러 주조소들과 교섭을 했다.

 
 
 
  각 인물이 한 덩어리로 주조되기를 바랬던 로댕은 각 인물을 두 조각으로씩 나누어 제작하겠다는 그리폴 & 로지Grifoul et Lorge회사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티에보Thiebaut사는 18,000프랑을 제의했지만, 유명한 바르브디엔느Barbedienne 주조소가 12,000프랑에 제의를 받아들여 결국 계약을 맺었다.
공적자금 조성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1894년 3월에 내무부가 45,000프랑의 자금동원계획을 세웠으나 역시 너무 늦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결국은 정부보조금을 받았다.
1895년 6월 3일, <깔레의 시민>은 5피트 높이의 받침대에 장식 쇠난간에 둘러싸인 채 리술리외 앞에서 제막되었다. 당시 신문에 실린 보도에 따르면 윈래는 기념비를 정원에 놓을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그것을 공공 화장실앞에 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고 적혀 있다. 1924년에 이르러서야 <깔레의 시민>은 로댕이 원했던 대로 아주 낮은 받침대위에 놓여지고 재건된 오뗄 드 빌 앞에 설치되었다.    
 
     
 
 시대를 앞서 로댕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중 하나인 1889년 옥타브 미르보는 <깔레의 시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혼을 일깨우는 감동이 이렇듯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과거를 재현하는데 탁월했던 미쉘레Michelet같은 사람은 여러 세기전에 잠들었던 죽은 자들의 심연를 불밝히는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기념비에서 로댕은 시민들을 애국주의나 영웅주의의 모호한 개념으로 치환시키기를 거절하고, 대신 실제로 그러했을 모습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는 깔레시의 사람들이 그의 기념비에서 추상적인 가치를 역설하는 독단보다 인간애의 아름다움을 느끼기를 바랬다.

. . . " 나는 그들을 될 수 있는 한 마르고 수척한 모습으로 만들려고 했다. 만일 아카데미의 공식이나 법칙에 따르자면 나는 그 몸뚱이들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했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했다면 나는 그 인물들을 사실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은 오랜 포위기간 동안 배고픔을 겪어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그 사람들을 비참하게 재현할수록 사람들은 역사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이상화된 인물의 집합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들의 영웅성을 찬양함으로써 진실을 잊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따로 떼어 냈다. 대의에 대한 각오와 죽음에의 공포사이의 끊이지 않는 갈등으로 인해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의식 속으로 침잠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고의 희생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있다. 그들의 정신은 그들을 앞으로 가라고 떠미는 반면 그들의 다리는 발걸음을 떼놓으려 하지 않는다. 엄청난 희생의 무게 때문에 굶주림은 잊었지만 그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해 우유부단한 상태에서 힘들게 자신을 이끌고 있다 . . .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 약해진 육체가 어떻게 삶을 움켜쥐고 있는지, 그리고 그 영혼이 용기를 파먹고도 얼마나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이있는지를 제대로 나타낼 수 있다면, 나는 이 웅장한 실화의 감동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 . .

<깔레의 시민>은 그 이전에 공공에게 공개되고 전시된 어떤 기념비보다 더 깊은 개인적인 공감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이것은 그 크기와 거대한 동작에 있어서만 공공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외에 다른 면들은 완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범위에 속하는 작품이다.
 
전세계 깔레의 시민
깔레에서 제막된 첫번째 <깔레의 시민>이후 세 개의 <깔레의 시민>이 로댕 생전에 주조되었다. 그때마다 조각가는 조각대와 조각위치에 각각 다른 해결방식을 제공하였다. 그 예로 로댕은 런던에서 베니스 콜레오네Colleone와 비슷한 방식으로 7미터 높이의 조각대위에 작품을 세웠다.
다른 8개의 조각은 로댕 사후에 제작되었다. 열두개의 <깔레의 시민>은 전세계에서 볼 수 있으며 대부분 구입한 미술관의 전시장이나 정원이나 마당에 전시되고 있다.
전세계 깔레의 시민 소장처

1. 깔레 시청광장
2. 코펜하겐 니 칼스버그 조각관
www.glyptoteket.dk
3. 모랑벨츠 마리몽 미술관
4. 런던 국회의사당 정원
5. 필라델피아 로댕미술관
www.rodinmuseum.org
6. 파리 로댕미술관 www.musee-rodin.fr
7. 도쿄 국립서양미술관 www.nmwa.go.jp
8. 바젤 쿤스트하우스
9. 워싱턴 허쉬혼 미술관 조각정원 hirshhorn.si.edu
10. 로스엔젤레스 노턴 사이먼 미술관
www.nortonsimon.org
11. 뉴욕 현대미술관 (MOMA) www.moma.org
12. 서울 로댕갤러리 
출처:
http://bbs.catholic.or.kr/attbox/bbs/board/read.asp/이강길제공   

                    

 <다 버리고 떠나라>

여행은 버리는 거라 생각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버렸는지...

몇 날 며칠동안을 정리하고 또 정리하면서 버렸던 그 많은 옷들, 다른 사람에게 줘버린 전자제품.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 한다던 선생이라는 직업까지 버렸고,

집도 다 비워버렸는데....

 

그래서 배낭 하나의 무게로 세상르 거뜬히 살아갈 수 있다고,

아니 세상을 살아가는 게 사실 배낭 하나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서

다 버렸고, 지난 몇달동안 그게 가능했다.

 

그런데 5월에 뜻하지 않게 한국엘 한번 들어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유럽을 차로 여행하는 기회가 생겨버렸다.

 

다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차라는게 생기고 나니 고민의 무게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우리 둘의 잘 공간, 먹을 거리만 고민하면 됐는데,

이제는

'숙소에 주차할 공간은 있는지'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인지'

'기름은 어디에서 넣을지'

우리 둘의 의식주만이 아닌 차의 의식주까지 걱정하게 만들었다.

하나를 더 가지면 둘 셋은 더 고민해야 한다.

 

버림의 아름다움을 또 배우는 시간이었다.

 

파리 샹제리제 뒷거리에서 만난 아주 특이한 청동상.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있는, 머리와 가슴은 있으나 배 부분은 뻥 뚫려있는.

이것을 만든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수 없으나

이것을 본 우리는 한눈에 같은 생각을 했었다.

' 다 비워라.

  다시 가득채울, 따뜻한 가슴과 생각하는 머리만 비워두고...

  달랑 배낭 하나로 다시 떠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