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194(10월10일) 폴란드 크라쿠프, 아우슈비츠

프리 김앤리 2009. 10. 11. 06:17

저녁 9시,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를 떠난 버스는 밤새도록 달려, 해도 뜨지 않은 어스름 새벽,

우리를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내려놓았다. 

바르샤바. 러시아를 들어가기 전에 들렀던 곳이다.

우리에게 그다지 매력적인 도시도 아니었고. 다시 머물러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트램을 타고 바로 역으로 가서 폴란드의 남부에 있는 크라쿠프로 가는 기차에 올라 탔다. 

러시아를 거쳐 발트 3국을 여행하는동안 비가 오고 너무 추워서 빨리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고도 싶었다.


크라쿠프. 폴란드 왕국의 옛 수도다.

우리나라로 친다면 천년 신라의 고도 ‘경주’와 같다고 할까?

폴란드인에게는 ‘영원한 심장’과도 같은 도시란다.

폴란드 왕궁과 신앙심 깊은 폴란드인들의 성당이 있는 곳,

중세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준 소금광산이 있는 곳,

근세기 가장 잔혹하고도 슬픈 인류 역사를 간직한 아우슈비츠가 있는 곳.


새벽을 뚫으며 야간버스에 지친 몸을 싣고 우리는 크라쿠프를 간다.

 

 

<아!! 좋다. 크라쿠프> 

“아!!! 따뜻하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야?”

“아~~~ 정말 좋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지?”


크라쿠프에 도착하자마자 계속 탄성을 질렀다.

어디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인지 크라쿠프 역에서부터 광장까지, 골목골목 여행자들로 꽉 찼다.

온 도시가 활기로, 열기로 북적거린다.

 

크라쿠프의 메인 광장.

노점상과 노천까페, 그리고 넘실대는 사람들의 물결.

‘여기는 한 여름보다 지금이 성수기인가?’


광장의 한쪽 옆에는 세인트 메리 바실리카 성당(St. Mary's Basilica)이 우뚝 서 있다.

이 성당의 꼭대기에서는 매 정시마다 나팔소리가 울린다.

매 시각마다 울리는 나팔소리. 이까지는 다른 도시에서도 흔히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크라쿠프의 광장에 울려퍼지는 나팔소리는 연주를 끝까지 하지 않고 중간에

뚝 끊겨버린다는 게 매력(?)이다.  

이는 타르타르족(Tartars )이  크라쿠프를 침략했을 때

시민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높은 탑의 꼭대기에서 끝까지 나팔을 불다 화살에 맞아 숨진

나팔수를 기리는 연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때 그 나팔수가 연주하다가 끊긴 딱 그 소절까지만 연주한단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 

크라쿠프에서 다시 배우는 진실이다.

 

크라쿠프 광장까지 이어지는 프로리안스카(Florianska) 거리.

14세기 초에 만들어진 프로리안스카의 문 너머로 광장까지 이어진 소위 ‘왕의 도로’가 보인다.


왼쪽으로 보이는 맥도널드 몇 집 건너에 우리가 묵은 호스텔이 있었다.

성문 밖에서 구도시로 들어오는 길목 중의 하나가 이 거리인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던지.

이 사진은 크라쿠프를 나오는 마지막 날, 이른 아침에 찍은 사진이다.

불행하게도 그 날 아침에는 비도 내리고 토요일 이른 오전이라 아직 사람들이 북적거리지 않았다.

전날 , 금요일 밤에는 무슨 대규모 행진이라도 하듯이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까지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어찌나 사람들이 붐비던지

여행자들 많기로 유명한 프랑스의 파리도, 영국의 런던도 ‘저리가라’였다.

 

도대체 크라쿠프의 매력이 뭘까?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끌어당기는 걸까?

이 터질 듯 한 활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물론 소금광산도 아우슈비츠라는 엄청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큰 이유일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크라쿠프 도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유산, 잘 짜여진 관광시스템도 한 몫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크라쿠프 광장을 쭉 따라 내려가면 비스와(VIstula)강가의 높은 바위산 위에 

세워진 육중한 건물군(群)을 만난다.

 

크라쿠프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17세기까지 폴란드 왕궁으로 사용되었던 바벨 성(Wawel Castle)이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폴란드 학생들이 단체로 여행을 오기도 하고,

다른 관광객도 반드시 찾는 곳이다.

산이 없는 도심의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

 

바벨 언덕의 건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부분은 바로 여기, 바벨 성당이다.

지금은 선종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신부시절 미사를 드리기도 한 곳이란다.

내부는 정말 아름답다는데, 우리는 두번이나 올라갔으면서도 시간을 못 맞춰 안을 들여다 보지 못했다.

그래도 밖을 둘러 보는 것만해도 감동은 충분했다.

 

크라쿠프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바벨 언덕에 올라 바벨 성도 보고, 바벨 성당도 들른다.

사람들을 끄는 힘이다.

 

바벨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비스와 강.

조용하고 아늑하다.

 

크라쿠프의 또 하나의 상징 '용'

뭐, 이 성에서 살았다나 어쨌다나...

용이 빠져 나왔다는 구불구불한 굴도 있고...

비스와 강가에는 위엄있거나 무섭기는 커녕 그저 귀엽기만 한 청동으로 만든 용 동상도 세워놓았다.

5분마다 한번씩 여의주 없는 입에서는 진짜 불을 내뿜기도 하고.

뻔한 스토리이기는 한데

5분마다 한번씩 뿜어주는 불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기다리고 서있다.

주변에는 아기공룡 둘리하고 꼭 같은 인형들을 주렁주렁 내걸고 팔고 있는 노점상들도 있고...

 

이 외에도 많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신앙심이 깊다는 폴란드 인을 말해주듯이 도시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성당들.

(이제 성당 사진을 너무 많이 찍어서 이번 편에는 안올렸다.

분명 다른 성당이지만 사진으로 그냥 보기에는 마냥 같은 사진같아보일까봐..)

지금은 공사중이어서 천으로 가려놓은 광장의 예전 직물회관, 시청사 타워,

곳곳에 있는 크고 작은 동상들, 이쁜 기념품가게...

어디든지 사람들은 북적거리고 있었다.

 

또 있다.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길(The Route of Pope John Paul Ⅱ) 이라고 하여

그가 자주 찾아 기도를 드린 곳, 그가 미사를 집전한 곳, 10여년 동안 그가 살았던 곳...등을

돌아보게 하는 코스도 안내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사람들은 이 곳을 그리 많이 찾고 있겠지?

 

사진은 구시가지 밖에서 보는 크라쿠프의 모습.

프로렌스카 문도 보이고, 그 너머로 세인트 메리 성당도 겹쳐 보인다.

 

이번 여행중 들렀던 프라하에서도 많이 보았지만

여기 크라쿠프에 여행자들을 끌어들이는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는 자그마한 연주회들이었다.

도시 곳곳에 있는 성당, 교회에서 작은 연주회들을 열어 여행자들이 부담갖지 않고 찾아가서

생각지 않았던 큰 행복함을 받게 만드는 배려.

 

프라하에서도 그랬다.

그래서인지 프라하에도 여행자들이 넘쳐났던 걸로 기억한다.

낮 동안 도시의 이곳 저곳을 둘러본 여행자들에게 밤까지 그 도시를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관광 시스템.

그저 시끌벅적한 펍이나 잘 차려진 레스토랑, 혹은 화려한 밤무대만이 아닌

조용히 낮동안의 감동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연주회, 혹은 연극...

그게 되어 있는 곳이 크라쿠프였다.

 

그리 크지 않아도 된다.

앞에 보이는 이 자그마한 성당은 한 50명 정도나 앉을 수 있을까?

여러명이 앉을 수 있는 성당의자 그대로, 미사를 드리는 제단 바로 앞에 무대를 만들어

실내협주단이 매일 밤 연주회를 연다.

입장료도 50즐로티(12유로, 2만원 정도)밖에 안된다.

매일 밤 객석은 사람들로 꽉 찬다.

 

우리도 한 군데 가기로 했다.

제 1, 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그리고 쳄발로의 젊은 연주자 6명으로 구성된 크라코프 시 오케스트라의

실내 합주단.

연주곡명도 그리 낯설지 않다.

영화 미션 주제음악, 바하의 브란덴부르그 협주곡,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제음악등.

그리 무겁지 않은 익숙한 음악을 연주한단다.

광장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만나는 오래된 성당건물에서.

 

성당 입구에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여기는 그래도 객석이 200석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일찍 가서 제일 가운데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

완전 로열석이다.

 

성당 내부의 화려한 장식과 함께

천정의 돔 안으로 음악 소리가 퍼져서 더 아름다운 소리를 내리라 기대하면서...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는 분위기 깰까봐 사진을 못 찍고

중간에는 당연히 못찍고

마치고 나서는 박수치느라고 못찍고...

ㅋㅋ

결국 이렇게 빈 자리만 있는 사진밖에 없다.

사진에는 없지만 폴란드에서 듣는 쉰들러 리스트의 주제 음악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연주자들도 다른 어떤 음악에서보다 자신들의 감정을 더 싣는듯 했다.

 

연주회를 보고 나오니 이미 저녁 9시가 넘었다.

세인트 메리 성당을 비추는 저녁 불빛과 광장에서 꽃을 파는 노점상의 노란 불빛이 잘 어울리는 밤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광장을 거닐고 있었고...

크라쿠프.... 참 좋다.

 

 

<슬프고도 잔인한 역사의 현장, 아우슈비츠를 찾아서>

 

가기 싫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크라쿠프를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본다는 아우슈비츠. 

나는 가보고 싶지 않았다.

 

몇년전 여행에서 캄보디아 프놈펜의 뚜엉슬랭 학교를 찾았을 때

크메르루즈군의 학살과 고문으로 짓이겨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내게도 고문이었다.

그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중에는 머리까지 아파왔었다.

울다가 울다가 결국엔 끝까지 다 보지 못하고 나와버렸다.

끝까지 다 보고 있을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크라쿠프를 가면서도 내심 속으로는 아우슈비츠는 찾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내 눈으로 그 끔찍한 현장을 다시 확인하고 싶진 않았다.

내 눈에 박힐, 내 머리에 박힐 그 끔찍한 기억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한테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피한다고 역사가 없어지냐?

 눈으로 보지 않는다고 잔혹한 역사가 지워지냐?'

가서 봐야한단다.

유태인 학살이니, 아우슈비츠니 우리가 잘 아는 것 처럼 말해도 실상은 아는 게 거의 없다고.

그리고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것과

지금은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르지만 현장에 직접 가서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리라고.

가서 봐야 한다고. 꼭 가서 봐야 한다고...

 

크라쿠프에서 투어로 신청하면 쉽게 갈 수 있는 아우슈비츠였지만

우리는 그냥 우리끼리 찾아가기로 했다.

우루루 다른 사람과 함께, 그리고 내내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투어로 가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길까봐...

 

이른 아침, 아우슈비츠로 가는 버스를 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들어가는 정문.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는 나치의 유명한 문구가 새겨져있다.
매일 아침 이 문을 나와 수용소 밖으로 일을 하러 가고,

저녁이면 다시 이 문으로 들어가 수용소의 잠자리로 돌아갔다는 유태인들.

돌아가는 그들의 행렬에는 매일 격렬한 노동으로 숨져간 동료들의 시체를 매고 돌아갔다는 그림이 옆에 그려져 있었다.

 

ARBEIT MACHT FREI.

유태인들은 이 글자중에 B자를 찌그러트려 만들어놓음으로써 자신들의 저항을 보여줬다고...

고작...

 

처음 내 생각과 같았다.

내내 힘들었다.

수용소 한 건물 한 건물을 들여다 보는 건 정말 힘들었다.

 

아우슈비츠를 들어오면서 머리는 빡빡 밀리고

줄무늬 수용소 옷을 입은 이 사람들의 사진.

어찌 누구하나 빠짐없이 이 사람들의 눈빛은 이리 다 서글퍼 보이는지... 

 

노동을 하러 끌려가는,

죽음의 행렬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형상을 그들의 수용소 복장으로 만들어 놓은 모습.

모두들 어깨가 축 쳐지고 목은 내밀어 끌려가고 있다.

몸뚱아리도 없는 단지 옷만으로 형상화 해놓았는데도 그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얼굴이 다 보이는 듯 하다.

 

이들의 잠자리.

이건 사람의 잠자리가 아니다.

짐승의 우리다.

 

그 때 끌려왔던 사람들에게서 벗겨놓은 안경만을 가득 모아 놓은 방.

나에겐 그들이 사용하던 안경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산더미 같은 신발.

이 안경의 주인들, 이 엄청난 신발의 주인들은

대부분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 안경의 주인들... 이 신발의 주인들 모두...

한 방에는 이들에게서 잘라놓은 머리카락만 모아 놓은 곳도 있다.

이차대전이 끝난 후 발견된 수용소에서 발견된 머리카락만도 3톤이 넘었단다.

유태인으로 부터 잘라낸 머리카락은 공장으로 보내져 카페트 만드는 재료로 쓰이기도 했단다.

인간이 얼마나 더 잔혹해 질 수 있는지.

 

한 방에는 나치에 의해 자행된 인체실험에 관한 사진도 있다.

실험에 이용된 여자들의 벌거벗은 사진들. 그리고 아이들의 사진...

보고 있기 너무 힘들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일을 할수 있는 것인지...

누가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준 것인지...

 

아우슈비츠 수용소 한 동 한 동의 주제는 거의가 죽음이었다.

죽음으로 가는 철도, 죽음으로 가는 길, 죽음의 행진, 죽음... 죽음...

  

이제는 '죽음의 벽'도 만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10동과 11동 사이의 벽.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총살의 현장.

이차대전이 끝날 무렵 , 독일군은 아우슈비츠에서 철수하면서 이 현장은 다 부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이후 폴란드는 이 곳을 다시 복구해 놓았다.

그 현장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기서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지금도 '죽음의 벽' 앞에는 사람들이 향도 밝혀놓고 꽃도 갖다 놓았다.

 

죽임의 방법도 여러가지 였다.

굶겨 죽이기도 하고, 잔혹한 노동으로 죽이기도 하고, 총살을 하기도 하고...

그리고 목매달아 죽이기도 하고..

그 때 이곳 아우슈비츠의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 나치가 마음대로 해도 되는 동물, 그 이하였다.

 

지금 저 곳을 바라보는 폴란드 고등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크라쿠프의 한 고등학교에서 단체로 왔었다.)

 

그리고  끔찍한 가스실.

햇빛도 들지 않는 이 가스실에서 죽어나간 수많은 유태인들.

그들은 왜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을까?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수 있는 가장 잔혹한 현장앞에서

인간이라도 스스로 저항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두려움'을 상상한다.

몸서리쳐진다.

 

철조망이 쳐 진 아우슈비츠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가장 많이 찾아오는 사람들은 유태인이란다.

그 다음이 폴란드인들... 그리고 그 다음이 독일인들.

 

이번에 우리는 독일의 여기저기를 제법 많이 여행했었다.

독일이 얼마나 엄청난 나라이고, 얼마나 발전한 나라이고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독일인,

독일을 보면서 감동도 많이 했었다.

 

그런데 그런 독일인들이 이런 끔찍한 일을 벌였단 말인가?

종교개혁의 출발지로서,

높고 웅장한 교회나 성당의 숫자만큼 기독교 신자도 많았을 터인데....

 

어떻게 이런 상상하기조차 힘든 광기를 부렸단 말인가?

어떤 조건하에서 인간이 이런 오만을, 이만한 광기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겹겹이 쳐진 전기 철조망들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히틀러나 괴벨스, 한스 프랑크와 같은 나치의 핵심 인물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냥 밑에서 명령을 받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이 철조망에서 보초를 서던 독일인은? 수용소에서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던 독일인은?

그 미친 의사를 보조하던 독일 간호사들은?....

그 사람들은 어쩌면 지금도 살아 있을지 모른다.

70대 후반이 되어 있을지도, 80이 넘었을지도...

그들은 혹 이곳을 찾아와볼까?

자신들의 젊은 시절  한때를 보냈을지도 모르는 이 학살의 현장을?

그렇다면 무슨 생각들을 할까?

그렇게 이성적이라는 독일인들은 '인간을 실험하고 인간을 그냥 죽여버리는 현장'에서

그 때 무슨 생각을 하며 그 명령들을 수행했을까?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몇십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타민족에게 학대받고 죽임을 당했던 유태인들이 세운 나라, 이스라엘은

왜 팔레스타인 민족을 공격하고 핍박하는 것일까?

그들에게 있어 기억해야 할 역사는 무엇일까?

 

'피하지 말고 보자'고 찾아 온 아우슈비츠.

여전히 정리되는 건 없다. 답도 없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터질듯한 머리에 더 깊은 혼돈속으로 빠져들지만

수용소를 돌아보던 중 발견한 문구, 이것 하나만 명확하게 마음속에 새겨넣는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 ,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이건 사진을 찍었는 데 왜 이렇게 흔들렸는지 모르겠다.

 찾아봐도 제대로 찍힌 게 없다.

 사진을 찍으면서 마음도 머리도 흔들렸었나 보다)

 

 

<다시 크라쿠프로 돌아와서, 유대인지구를 찾아가다>

다시 크라쿠프로 돌아왔다.

내내 불편했던 마음으로  전날 남겨두었던 크라쿠프 내의 유태인지구를 돌아보았다.

크라쿠프 시내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카지미에츠(Kazimierz).

유태인 게토지역이다.

 

폴란드가 나치에 의해 점령당하고 난 뒤

유태인들을 한쪽으로 몰아넣었던 게토지역.

유태인이란 표식을 달고 한 곳에서만 살아야 했던 몇십년도 더 넘었을 그 때의 거리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여기서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을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잔잔하면서도 슬픈 음악이 흐르고 있는 게토지구 박물관 앞에서.

 

유태인 지구에 있는 추모비 앞에서.

이차대전 동안 죽어나간 많은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석이다.

비석 위로 '유태인의 표식'인 별이 가을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

 

 

<소금광산>

크라쿠프를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르는 또 한군데.

비에리츠카(Wieliczka) 소금광산이다.

 

크라쿠프가 예전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던 이유도 바로 이 소금광산 때문이었으리라.

예전에는 소금이 금, 은과 마찬가지로 아주 귀중한 보물이었으니까

소금광산이 벌어들이는 부가 엄청났을 것이다.

돈이 모이는 곳, 일자리가 있는 곳. 거기가 바로 사람들이 사는 곳, 왕이 다스리는 곳이 되는 것은 틀림없었다.

 

아우슈비츠는 투어에 참가하지 않고 우리 둘이서 직접 찾아갔지만

소금광산은 투어에 참가하기로 했다.

어차피 소금 광산 안으로는 개인이 따로 들어갈 수 없고 가이드랑 동행해야 했다.

 

소금광산으로 들어가는 길.

사방천지가 다 소금이다.

'하얀 보석, 소금'

 

한참동안 여러 계단을 걸어내려가 소금 광산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그런데 재미가 하나도 없다.

크라쿠프 시내에서 받았던 즐거움도, 게토지구에서 느꼈던 역사의 처절함도,

아우슈비츠에서 온톤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여러가지 생각들도...

여기서는 하나도 없다.

투어로 따라와서 가이드가 여러가지 설명을 해주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감동이 하나도 없다.

 

이 소금광산에서 일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지금은 거의 폐광이 되어버린  몇 세기 전의 소금광산을

관광 상품화 해서 여기저기 소금으로 온갖 동상도 만들어 놓고,

조명시설도 만들어 반짝반짝 빛나게도 하고 거기다 음악도 깔아놓고

레스토랑도 만들어 놓고 제법 근사하고 그럴듯 하지만

마치 '박제' 해 놓은 느낌이다.

너무 꾸며놓기만 해 놓았다.

 

그나마 그냥 우리끼리만 걸어다닌다면 이것 저것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것가지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련만

가이드의 설명대로, 그 시간의 폭 만큼만 그저 듣고 있자니

'생각'이나 '느낌'이라는 우리의 감각은 활동하지 않는다.

 

그나저나 화려하기는 하다.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에 있는 소금광산에도 가 보았지만

거기보다 여기 크라쿠프의 소금광산은 그 규모면에서도 훨씬 더 크고

소금을 가지고 정말 여러가지를 많이 만들어놓았다.

 

사진은 소금광산 안에 꾸며져 있는 대성당.

어마무시하게 크다.

제단도 소금으로 만들어져 있고,  벽에 있는 여러가지 성화도 소금으로 부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최후의 만찬 ' 그림도 소금으로 만들어 놓았고 샹들리에도 소금으로 만들어 놓았다.

여기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단다. 

 

바닥도 전부 소금이다.

대리석이 아니고...

여기는 소금염전이 아니고 소금광산이라 소금 색깔이 흰색이 아니고 그린색이다.

아주 단단하다.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고...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조각상도 있다.

교황이 되시고 나서 방문한 것을 기념하여 소금 조각상으로 만들었단다.

 

교황은 이 소금 광산을 이때 말고도 아주 어릴때(10살쯤?), 고등학교(? 신학교땐가?) 쯤에도 방문했었단다.

이때의 두번은 학교에서 단체로 방문했었다고 한다.

소금광산 안에는 이 세번의 사진이 다 걸려 있다.

 

오늘의 마지막 보~너스.

교황님이 두 번째 이 광산을 방문했을 때의 단체사진.

과연 누가 교황일까요?

당연히 화살표를 받고 있는 저 사람이겠쬬?

ㅋㅋ

그런데 조금 웃기지 않습니까?

우리의 교황님이, 그렇게 인자하시던 우리의 교황님이,

모든 사람들을 다 품에 안아주실 것 같은 교황님이, 그저 모범생이었을 것만 같은 교황님이

학교 다닐때는 제법 멋도 부렸나보네요???

모자를 약간 삐딱하게 쓴 모습이 보이시나요?

우리의 교황님도 학교 다닐때는 멋을 살짝 부리셨나보지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