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221 (11월6일) 고맙습니다. 보스니아 사라예보에서

프리 김앤리 2009. 11. 8. 10:49

 

<사라예보,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아리는 곳>

 

1992년 4월부터 1995년 10월까지 3년 7개월 동안 유고연방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 군대는 사라예보를 완전 포위하고

도로를 차단하고 물과 전기, 음식, 난방시설등 모든 것을 차단했다.

그리고는 매일같이 사라예보에 폭탄을 퍼부었다.

1991년 10월, 유고연방으로 부터 보스니아의 독립 선언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보스니아의 독립 선언은 보스니아 내의 무슬림 세력(보스니악)과 크로아니아계가 힘을 합쳤던 결과이다.

1992년 2월과 3월에 독립찬반투표가 이루어졌지만  보스니아 내의 또 다른 세력 세르비아계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세르비아 군대는 사라예보 시내로 폭탄은 퍼부었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발상인 인종청소라는 걸 하기 시작했다.

사라예보 내의 세르비아계의 시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보스니악과 크로아티아계에 의해 도시 밖으로 추방당하고 고통을 당했다.

내전이었다.

어제까지 이웃으로 함께 살던 이들이 보스니악(무슬림), 크로아티아계(기독교), 세르비아계 (정교회)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죽고 죽이는 일상이 진행되었다.

 

3년 반동안 외부로부터 차단된 사람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나갔고, 그리고 무차별 폭격에 생명을 잃었다.

일만 이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5만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위의 포스터가 당시의 상태를 묘사해놓은 그림이다. 

산과 산 사이에 오목하게 들어앉아 있는 사라예보를 사방으로 무장한 군대와 탱크, 총으로 겨누어진

당시의 포위되었던 이 장면의 포스터는  지금 사라예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았다!!! '라고 말하면서...

 

뉴스로만 소식을 간간히 들었던 보스니아 내전 이야기, 그 역사의 중심 사라예보.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아리는 곳이다.   

 

사라예보에서는 SA라는 호스텔에 묵었다.

호스텔월드(hostelworld) 싸이트에서 사람들이 반응이 가장 좋았던 호스텔이라 정하고 무작정 찾아간 숙소였다.

다행히 우리가 하루밤 머물 수 있는 침대는 남아있었다.

 

가족이 운영하는 호스텔이었다.

옥탑방처럼 생긴 3층 거실에는 성수기도 아닌 이 계절에 여행자들이 가득했다.

 

이것 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주인 아저씨가 자기 집에도 폭탄이 떨어졌단다.

그 때 떨어진 폭탄조각을 보여준다.

아무일 없었냐고, 가족들이 다치지는 않았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아저씨, 율리아 아줌마, 그리고 지금은 스무살이 넘은 건장한 청년 아들 아리안 까지.

자기들은 그 때 지하로 대피하고 있어서 아무일 없었단다.

그래서 계속 거기 살았냐는 질문에

아저씨의 눈빛이 흐려진다.

"이해하겠냐? 3년 7개월이란 얼마나 긴 세월이라는 걸 이해하겠냐?

 처음 얼마동안에는 지하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살다가 그냥 2층으로 올라와 버렸다.

 어제 저녁 니네가 잔 그 방에서 그냥 살았다."

자기 가족은 모두다 무사했지만, 일가 친척중에 남자라고는 아저씨와 아들 단 두명만이 이 전쟁에서 살아남았단다.

오른손으로 가슴을 한스럽게 때린다.

"사는 거나 죽는 거나 같은 거였다.

 그래서 그냥 올라와서 살았다. 마찬가지였다. 어디에서 살고 있으나...

 어떻게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겠냐?"

흐릿하게 변하는 아저씨의 얼굴과 가슴을 때리는 아저씨의 몸짓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른다.

그 때 아리안을 아주 어렸는데, 먹이는 거라고는 풀(율리아 아줌마의 표현에 의하면 정확하게 Flowers라고 했다)을 뜯어다

죽을 끓여 먹였단다. 그 말을 하는 율리아 아줌마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다.

 

고맙습니다.

살아 남아줘서 고맙습니다.

그 혹독한 세월을 살아남아 이렇게 우리를 다시 맞아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4개의 종교가 함께 어울려 살던 곳, 사라예보>

사라예보는 한 때 '유럽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던 곳이었다.

그 도시안에 기독교, 이슬람교, 정교회, 그리고 유대교까지 각각의 전당을 짓고

각자의 자기 믿음을 충실히 해가던 조화로운 곳이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심 내에 4개 종교 건물이 바로 옆에 옆에 붙어 있다.

 

이슬람 사원도 있고,

 

기독교 교회도 있고,

 

유대교 예배당도 보이고,

 

정교회 건물도 함께 있었다.

지금 사진에서 보이는 것 처럼

무슬림 여성과 비 무슬림 여성들이 함께 친구가 되어 살아가던 곳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자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슬림을 중심으로 한 보스니악과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크로아티아계 세력이 세르비아 세력들을 몰아내고

유고 연방의 맹주를 등에 업은 세르비아계 세력들이 이들과 반대편에 서서 총을 겨누었다.

세르비아 군대는 심지어 인종청소를 반대하는 세르비아 계 사람들에 대한 학살도 서슴치 않았다.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도 끝까지 하나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1993년에는 크로아티아 방위군이 사라예보의 남쪽 모스타르에 있는 오래된 다리를 보스니악들을 고립하기 위하여

폭격해버렸다는 것을 보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나의 종교가 무엇인가'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는 사람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나와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서로 배척하기 시작한 거다.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광기' 앞에서는 쓰러져버린 것이다.

 

 

<전쟁의 흔적들> 

SA 호스텔의 아저씨 말처럼 3년 7개월이란 세월 동안의 전쟁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사는 거나 죽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는, 그래서 지하방에서 올라와서

폭탄이 떨어지거나 말거나 그냥 이층에서 애 데리고 살아야 했던 세월을 짐작할 수나 있을까?

사라예보의 도시 곳곳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었다.

 

총탄 자국이 무수히 남아있는 건물.

그래도 10년도 훨씬 더 지났건만 이들의 삶터에는 여전히 그 때의 총알자국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사람들도 전쟁 동안 여기에서 그동안 그대로 살고 있었는지

아니면 멀리 떠났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예전의 보금자리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수만명이 목숨을 잃고 다친 전쟁의 끝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때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앞의 거리는 그 유명한 '저격수의 길(Sniper's Alley)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사라예보 공항에서 부터 시내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대로다.

내전 동안 세르비아계 저격수들이 대로 주변의 고층 빌딩 옥상에 자리를 잡고

지나가는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저격하였다 하여 이름붙여진 거리다.

 

이 길은 포위당시 사라예보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고

사람들의 일터와 연결된 곳이라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쩔수 없이 지나다닐 수 밖에 없었던 길이었다.

내전 동안 이 거리에서 저격수에게 살해당한 사람이 225명이나 되었고, 천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그 중에 60%는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은 정말 우리를 절망케 했다.

 

이건 뭘까?

도심의 바닥 곳곳에 칠해놓은 붉은 페인트.

마치 붉은 꽃이 피어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라예보의 장미'라고 부른다.

포위기간 동안 맞은 포탄의 흔적이다.

콘크리트 바닥이 포탄에 맞아 마치 붉은 장미 꽃잎이 흩날리는 것 처럼 퍼졌다고 해서 '사라예보의 장미'라고 부른단다.

누가 이렇게 이름을 붙였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포탄의 흔적을, 이 포탄의 맞아 숨져 갔을 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을

아름다운 붉은 장미라고 이름 붙인 건

전쟁이라는 잔인함이 남겨준 사라예보 사람들의 '슬픈 역설'이라고 추측할 뿐.

우리가 '사라예보의 장미'를 어디서 볼 수 있냐고 물으면,

그들은 "온 길거리에 사라예보의 장미가 피어있다"고 말한다.

피어있다.....

  

 한 이슬람 사원 앞에 있는 공동묘지.

그 때 죽어간 사람들이 영혼은 아직도 사라예보에 그대로 남아있다.

 

1992년- 1995년.

그리 오래된 역사도 아니다.

도대체 누구와 누가 무엇때문에 그토록 치열하게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지는 제대로 정리는 되지 않았지만

당시 뉴스를 통해 간간히 들리는 소식에 귀를 기울이기는 했었다.

지구 반대편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잔인한 인류의 역사.

지독한 독재의 시절을 지나 다시 또 다른 군사독재 5공화국, 헛다리 같은 문민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우리만이 지독하게 못난 정부를 만나 지독히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에만 잠겨 있었을 뿐,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의 역사에는 무지했던 건 사실이다.

 

그래도 어디에선가 소식은 들려오고.

그 소식들이 다 저기 있는 홀리데인 인 호텔에서 타전해주는 서방언론사의 기자들 덕분이었단다.

전쟁의 와중에 현장에서 소식을 전하는 종군기자들이 머물렀던 곳.

일각에선 순전히 서방의 입장에서만 전쟁을 해석하는 기사만 실었다든지,

홀리데이 인 호텔 사방 150m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만 보도를 했다는 비판도 있었다지만

이 거리를 찾아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는 우리같은 여행자들로서는

폭탄이 퍼붓는 현장에 머물면서 소식을 전한 그 때 그 기자들에게도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

 

3년 7개월동안의 도시 포위로 물도, 음식도 전기도 공급 받을 수 없어던 사라예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포위된 지 몇개월이 지난 1993년 1월부터 보스니아 군인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힘을 합쳐

사라예보의 인근 도시 부트미르까지 터널을 뚫었다.

800m, 넓이 1.5m의 사라예보 터널.

이 터널을 통하여 각종 음식, 약, 연료, 그리고 무기들이 사라예보로 공급되었다.

그래서 이 사라예보의 터널을 '생명의 터널(Tunnel of Life)'라고 부른다.

사라예보의 대로에 생명의 터널로 가는 표지판은 보았지만

제길헐!!!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우리는 가보지 못했다.

같은 숙소에 있던 영국인 그레이엄은 갔다와서 너무나 감동적이었다고 말했었는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스르프스카공화국?>

'총알 자국이 선명한 건물' ' 사라예보의 장미' ' 저격수의 길' ...

곳곳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전쟁의 흔적들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있는  전쟁의 흔적도 만났다.

 

사라예보 버스 터미널과  기차역에서 우리가 겪은 이야기.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에서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마자 우리는 다음 일정인 몬테네그로까지 가는 버스편을 알아봐야 했다.

막연하게 '사라예보에서 몬테네그로 방면으로 가는 찻길이 있다'라는 걸 지도상으로 확인 할 수 있을 뿐

우리도 어느 도시로 해서 보스니아를 빠져 나가야 하는 지 감이 오지 않았다.

버스 터미널 티켓 판매대에 가서 몬테네그로를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우리의 질문에

돌아오는 답변이 참 어이가 없다.

헤르체고 노비(Herceg Novi)까지 가는 버스밖에 없단다.

헤르체고 노비라니?

그건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바로 옆에 있는 도시다.

두브로브니크에서 7시간이 넘게 걸려 버스를 타고 왔는데 다시 그 아래로 다시 거꾸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분명히 지도 상에는 사라예보에서 몬테네그로의 수도 포드고리짜(Podgorica)까지 찻길이 나 있는 것 같은데.

굳이 다시 남서쪽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직선거리로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조건 안된단다.

기차역에서의 답변도 마찬가지다.

보스니아의 국경 다른 곳 어디라도 가서 몬테네그로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물어도 무조건 없단다.

다시 두브로브니크까지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물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아 그냥 숙소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숙소에 가서 론니를 자세히 읽으니 사라예보에서 포드고리짜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 표현되어 있다.

숙소의 아저씨에게 물으니

그건 메인 버스 터미널이 아니라 정도 떨어진 루카비차(Lukavica) 버스 터미널로 가야 된단다.

자기 집 아래 도로에서 트롤리버스를 타고 4-50분 정도 가야 된단다.

"아까 버스 터미널에서는 없다고 하던데?"

돌아오는 대답이 정말 어이없다.

거기는 보스니아가 아니란다.

"예?  트롤리 버스 타고 조금만  가면 된다면서요?"

"거기는 보스니아가 아니라  스르프스카 공화국(Repblic of Srpska)입니다.

 트롤리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서 내려서 300m 정도 떨어져 있어 걸어서 다리를 하나 건너야 합니다."

스르프스카 공화국?

듣도 보도 못한 나라이름이다.

뭐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거기는 보스니아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고 세르비아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세르비아 사람?

아!!!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보스니아 내전동안 세르비아계 사람들은 보스니아의 북쪽이나 동쪽으로 쫓겨나갔다.

정말 내전이었다. 서로간의 싸움.

 

그러니까 아까 버스 터미널에서도 기차역에서도

우리 터미널에서는 몬테네그로로 가는 버스는 없지만 루카비차 버스 터미널로 가서 포드고리짜로 가는 버스를

타라고 해도 되건만 없다고만 답했던 거다.

서로가 서로를 쫓아내고 죽이고 죽어야 했던 전쟁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는 아직은 이른 모양이다.

그 장면에서 문득 또 하나가 떠올랐다.

모스타르에서도 지도를 보니까 보스니아라는 나라명이 없었다.

헤르체고비나라고만 쓰여있었다.

세계 지도를 보면 '보스니아 & 헤르체고비나'라고 쓰여있는데

왜 여기는 헤르체고비나라고만 써놓았냐는 우리 질문에

현지인은 지도까지 그려가며 우리에게 말했었다.

거의 절반을 딱 잘라서 위에는 보스니아, 그리고 그 아래는 헤르체고비나라고.

당신들도 언젠가는 독립이 되기를 원하냐니까 당연하단다.

자기들은 보스니아가 아니란다.

 

아직도 복잡하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그리고 스르프스카 공화국.

대부분 무슬림인 보스니악 세력이 지금의 보스니아 지방의 중심이고,

기독교인 크로아티아계는 헤르체고비나, 그리고 세르비아계가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주민족이다.

급하게 인터넷을 찾아보니 현재 이들 세나라에서 각각의 대통령(?)을 뽑아 8개월씩 돌아가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단다.

 

지금 보이는 이 평화가, 공존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런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런지.

어느 한쪽이라도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려고 하거나, 다른 종교 다른 민족에 대한 배척을 시작한다면

다시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그토록 오랜 시련을 이겨내고 견뎌온 사람들에게

다시 고난의 시대가 오는 게 아닌지 얄팍한 내 지식으로는 두려운 마음까지 든다.

 

 

<세계 일차대전과 사라예보>

내게 있어 사라예보는 항상 조합된 두 단어의 합성으로 떠올랐다.

하나는 '사라예보의 기적' 또 하나는 '사라예보의 총성'

'사라예보의 기적'은 탁구 선수 이에리사와 정현숙(맞나?) 의 세계 제패 이야기다.

작은 탁구공 하나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위대한 한국, 위대한 언니들의 이야기로 사라예보는 늘 기적과 함께

떠오르는 도시였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를 뒤바꾸었다는  한발의 총성. '사라예보의 총성'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디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계의 한 보스니아 청년에게 암살된 사건이 일차대전의 신호탄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세계사의 일부분이다.

 

사라예보에서 역시 우리가 놓칠수 없는 역사적 장소였다.

황태자 부부가 암살된 다리 바로 앞에 있는 역사 박물관에는

그날 황태자의 사라예보 방문부터 암살까지 자세하게 사진으로 전시해놓았다.

 

두 발의 총성으로 세계의 뒤흔들어놓은 암살범 가브리오 프린치프(Gavrilo Princip).

황태자 부부는 그가 쏜 총탄에 맞아 숨졌지만

그 날, 황태자부부가 사라예보 시청 방문 전에도 다른 암살시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같이 모의하고 행동했던 다른 6명의 모습도 사진속에 담겨 있었다.

 

세계사를 바꾸어놓은 역사적인 다리.

라틴 브릿지(Latin Bridge)다.

Miljacka강이 라틴 브릿지 아래로 세차게 흐르고 있다.

 

그 옆에는 그 날의 총성을 알려주는 표지판도 붙어 있고...

세계사의 한 장면.

그 역사속에도 사라예보는 있었다.

 

 

<상처를 자꾸만 후벼파고...>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가 지금 사라예보에서 찾고 다니는 게 뭘까?

어디에서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었는지, 그 다리는 어디에 있는지...

포탄의 흔적이, 총알 자국이 선명한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저격수의 거리라는 게 사라예보의 장미라는게  도대체 어떻게 생겼다는 것인지...

아직도 서로 할퀴고 있는 건 어디 없는지...

 

어쩌면 여기 사람들은 기억하기도 싫고, 잊어버리고 살고 싶은데,

우리는 '역사' 운운하며

때로는 알량한 동정심까지 가지면서 그들의 상처를 헤집고 후벼파고 다니는게 아닌지...

 

그러고 보니, 사라예보로 오는 길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론니에서도 모스타르에서 사라예보까지 가는 길을 놓칠수 없는 비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도도히 흐르는 네레트바 강(Neretva River)과 험준한 산.

아름다운 마을에 살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 이야기는 제쳐두고

상처만 후벼 파고 다니고 있는 우리를 발견했다.

 

하루에 두번 있다는 모스타르- 사라예보 간의 기차를 탈수는 없었지만

기차길과 나란히 가는 버스길에서도 비경은 계속되었다.

버스에서 내려 몇시간 동안 봤던 모스타르에서 이미 보스니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으면서도

사라예보에 내리는 순간,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무슨 대단한 역사의식을 가진 양

현재의 이들을 무시하고 과거의 이들만 자꾸 되짚어보려 하지 않았는 하는 생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사라예보>

지구상 어디에 가서 또 이렇게 멋진 곳을 만날수 있으랴?

베트남의 호이안에 와있다는 생각도 했고, 중국의 양수오 거리에 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도 했다.

매력적이었다.

사라예보, 참 매력적인 도시였다.

 

사라예보는 바차르시야(Bascarsija) 거리로 부터 시작된다.

유럽 어느 거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지붕 낮은 기와집들과 터키의 어느 거리에서 보는 것 같은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중간 중간에 이슬람 모스크도 보이고...

 

차들은 전혀 다니지 않는 여행자의 거리가 잘 만들어져 있다.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길 가에 만들어진 소박한 카페에서 독한 터키식 커피도 마실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고 있었구나.

전쟁 이전에도 그리고 전쟁 이후에도

이렇게 아담한 집을 짓고, 소박한 거리에서

정겹게 살고 있었구나...

 

고맙다.

정말 고맙다.

살아줘서 고맙고, 이 거리에 이렇게 살고 있어줘서 너무나 고맙다.

 

이 거리를 따라 이슬람 사원도 있고, 교회도 있고,  정교회 건물도 있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존중하며 이렇게 살아왔구나...

 

누구는 말하겠지?

흐르는 저 강물은 역사를 기억한다고?

그러나 할퀴고, 물어뜯는 아픈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것 보다는

서로가 어울려 함께 살아왔던 지난 평화의 시대를  더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떠한 고난도 다 이겨내고, 아픈 상처까지도 다 감싸며

저 강물은 이 곳의 사람들과 함께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흐르고 있는 것을...

 

두브르브니크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상의 천국이라고,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대리석 바닥을 보고 감탄했었다.

 

그러나 여기 사라예보에 들어와서 마음을 바꿔먹었다.

두브로브니크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이 여기 사라예보라고.

 

화려하고, 윤기있는 두브로브니크와는 다르게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

소박한 사람들이 어울려서 사는 이 곳이 우리에게 훨씬 아름답게 다가왔다.

모든 것을 다 이겨내고 함께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곳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율리아 아줌마, 아리안, 그리고 그들의 가장 아저씨.

폭탄이 떨어지는 집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이야기가 다시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빌며

산복도로 꼭대기에 있는 우리 숙소의 창문 너머로 건너편 마을을 바라본다.

 

건너편 마을의 불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별빛같다.

그 아래에 선명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국립 역사 박물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봤던 글귀,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 다시 그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를 떠올린다.

 

다 기억할 것이다.

잊으려고 애써도, 지우려고 애써도 그들의 아픈 역사를 이들은 다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지구의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도 이들의 역사를 배울 것이다.

 

꼭 다시 한번 더 오고 싶은 곳이다.

사 라 예 보.

그때까지 아무런 일이 없기를 빌면서...

아니 영원히 아무일 없기를,

지금 건너편 마을에서 쏟아지는 저 별빛처럼 반짝 반짝 빛나주기를...

 

 

<이것도 덤. 먹거리조차 황홀했던 사라예보>

내전의 아픔도 아리했고,

살아있어줘서 고마웠고,

그 이전, 이후 여기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평화와 공존에도 감동했는데...

 

사라예보는 먹는 걸 좋아하는 우리에게

음식으로도 감동을 줬다.

첫날 저녁, 숙소에 있는 아저씨가 소개해준 현지 음식점, ZELJO.

바차르시야 거리에 있다.

 

체바피(Cevapi)라는 일종의 케밥이다.

화덕에 구운 난 안에 소고기로 버무린 난자완스같은 걸 여러개 넣어준다 .

5개, 10개, 15개 원하는 대로 넣어준다 . 잘게 썬 양파와 함께.

그리고 진한 요구르트와 함께.

보스니아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란다.

둘이서 14KM(7유로, 우리는 15개짜리 두개를 먹고 맛있어서 하나 더 먹었다. 콜라도 한 병 더 사마시고,

고소(고기), 담백(난), 달콤(요구르트)!!!

 

직접 화덕에서 난을 구워준다 .

유럽에 들어와서 빵을 워낙 많이 먹어서 이제 제법 빵맛을 안다고 자부하는데

이날 저녁 우리 둘이서 한 이야기...

"어느 나라 빵이 제일 맛있느냐 하면???

 갓 구운 빵을 주는 나라" ㅋㅋ

 

또 다른 식당.

가장 쉬운 것 부터  '오이 샐러드' 그냥 오이를 송송 썰어준다.

소금하고 올리브 오일, 식초는 우리가 알아서 쳐서 먹고.

그리고 ' 닭고기 스프'. 진하게 우려낸 닭고기 국물에 닭 가슴살 들어가고, 야채도 넣어주는 우리로 치면 닭백숙 같은...

다음은 'Sogan Dolma' 양념한 소고기를 다져넣은 양파를 맵싸한 국물에 조린 거다.

매운 것을 통 찾아볼 수 없던 유럽에서 고향 생각이 나게 하는 음식이었다.

그리고 갓 구운 빵까지.

모두 다해서 12KM(6유로).

 

또 다른 식당. 우리의 저녁.

우선 갓 구운 빵. 여기는 요리 하나에 따로이 빵이 따라나왔다.

난도 있고, 네팔에서 먹었던 구릉브레드 같은 것도... 빵만 먹어도 맛있겠더라구.

'야채 샐러드' - 토마토, 오이, 피망에 무른 치즈 듬뿍.

그리고 역시 고향 생각하게 만든 'Sarma'- 우리나라로 치면 깻잎 같은 잎사귀에 다진 고기를 넣고

역시 맵싸한 국물에 조린 것. 국물도 많은데다가 위에 액체치즈를 넣어줘서 아주 고소하다는...

그리고 스프는 '우리나라 된장콩과 햄을 넣어주는 알싸한 스프'

모두다 합해서 13KM(6.5유로)

 

며칠 더 있었으면 그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전통 음식은 다 사먹을 수 있었는데...

아깝다 .

아마 동서양이 교차되는 곳이라서 음식이 우리 입맛에 맞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인종도 다양하고 종교도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곳이라

음식이 다양하게 많았는지도 모른다 .

먹는 거 때문이라도 꼭 다시 한번 오고 싶은 사라예보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아주셔서... 이렇게 살고 있어주셔서...

이번 여행에서 이렇게 가슴 절절이 고마움을 느끼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안녕!!! 사라예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