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219 (11월 4일)진주, 천국, 사랑으로 눈부신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프리 김앤리 2009. 11. 6. 15:25

두브로브니크.

시인 바이런은 '아드리아해의 진주'라 했고,

극작가 버나드쇼는 '지상의 천국'이라 했다.

 

투어야의 손준호 대장은 '열정 가득한 사랑의 도시'라 전했고,

작가 권삼윤씨는 '두브로브니크는 그 날도 눈부셨다'며 우리를 그 곳으로 가게 만들었다.

 

'진주'이어야 했고, '천국'이어야 했으며

'사랑'가득한 두브로브니크는 우리가 가는 그 날에도 눈부셔야 했다.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

크로아티아의 스프릿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은 내내 푸른 아드리아 해가 펼쳐지고 있었다.

차만 타면,아니 머리에 물체가 닿이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잠 들수 있는 나같은 잠보조차 4시간이 넘는 해안 길을 따라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절경에 한잠도 이룰수 없었다면 이해가 될까?

 

6000Km나 된다는 크로아티아의 해안선은 구비구비 돌아가고 있었다.

한 모퉁이를 돌면 소담한 한 마을이,

또 한 구비를 돌아가면 해안가의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그 날은 파도조차 일렁이지 않았다.

오로지 눈부신 태양과 바다뿐.

 

어느 한 곳 머무르고 싶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굳이 두브로브니크를 가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기 이 해안가의 어떤 집에 마냥 머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심심하면서도 행복한 무료한(?) 한낮을 꿈꾼다.

 

 

<눈에 익은 두브로브니크...> 

성벽으로 둘러싸인 두브로브니크 올드타운. 

권삼윤씨의 책 '두브로브니크는 그 날도 눈부셨다'는 책의 앞 표지 사진과 같은 장면.

이 장면을 찾기 위해 올드타운도 더 지나고 두브로브니크 윗 마을을 한참동안 걸어다녔다.

처음 와 본 곳인데도 어찌나 열심히 그 책을 봤던 지 마치 이미 잘 알고 있는 한 순간인 것 같다.

사진을 찍고 있으면서도 언젠가 우리가 이 곳에 이렇게 서 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벽 위에서 바라본 로브리예나체 요새.

 

마음속으로 강요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브로니크는 눈부셔야만 한다고.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시점에서도 눈부셔야 하고,

우리가 있지 않아도 항상 눈부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곳은 항상 진주여야 하고, 천국이어야 한다고...

어느 새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해 먼저 가 본이들의 느낌으로  단정을 내리고

그곳에 가서는 단정지은 이미지를 애써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건 아닌데...

너무 스스로에게 강요한 느낌이다.

있는 그대로 보자.

보는 그대로 느끼자.

다른 사람의 느낌을 마치 내것인 것 처럼 따라하지는 말자.

'그 곳에 햇살이 눈부시지 않아도 좋고, 그 곳이 보석같이 느껴지지 않아도 괜찮다'

짐짓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다른 사람의 느낌을 눌러보지만...

어느 새 우리 입에서도 찬사가 터져 나온다.

"정말 아름답다!!!" 

 

 

 

<Old Town의 성벽을 따라> 

두브로브니크가 우리의 감동을 훨씬 더 업그레이드 시킨 건 문화재를 사랑하는 유럽 지성인들의 행동이었다.

1991년 6월, 크로아티아는 구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했고, 곧바로 세르비아계가 이끄는 신유고 연방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했다. 당시 신유고 해군의 격렬한 포화가 퍼부어져 두브로브니크가 불바다가 되자

프랑스의 학술원장이었던 장 도르메송이 '유럽 문명의 상징이 불타고 있는데 팔짱만 끼고 있을 것인가'라며,

유럽의 지식인들을 이끌고 아드리아 해안에 범선을 띄워 신유고 해군 앞에서 보트시위를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국가와 민족의 차원을 떠나 전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어느 지식인의 너무나 감동적인 일화였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에 대한 감동과는 별도로

왜 이 지성인들이 인간의 생명에 대한 파괴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을까는 여전히 의구심이 인다.

문화재의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나

부숴지고 나면 지금처럼 다시 복원이 가능한 문화재 보존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자 했던 사람들이

한번 목숨을 잃고나면 영원히 되살릴수 없는 사람들의 목숨이 그 문화재 안에서 숨져가야 했던 사실 앞에서는

어떤 행동을 했었는지...

물론 보트시위가 단순히 문화재 보호차원만이 아닌

전쟁반대의 상징성도 당연히 가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올드 타운의 필레 게이트(Pile Gate)를 들어서자마자 성벽으로 올라갔다.

두브로브니크를 온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다.

목숨을 걸고 온 몸으로 지키고자 했던 유럽 지성인들의 두브로브니크 사랑을 배우기 위해...

그것이 문화재의 사랑만이 아닌 인간의 생명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굳게 믿으며...

붉은 지붕과 대리석 바닥이 세월과 햇살에 반짝 거린다.

 

총 2Km에 달하는 성벽을 따라 걸으며...

 

로브리예나체 요새가 건너편으로 보인다.

유고 내전 당시 불탔거나 파괴된 부분은 거의 완벽하게 다 보수되었는데

새로이 보수된 부분과 원래의 것으로 남아있는 돌의 색깔이 약간씩 다르다.

오히려 그게 더 멋있게 보이기까지...

 

두브로브니크는 1991년 유고 내전 이전에도 지난 1667년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 건물들이 많이 파괴됐었다.

파괴와 보수, 다시 파괴와 보수가 이어지면서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성벽을 따라 돌다 보면 구시가지의 빼곡한 지붕들이 다 내려다 보인다.

건너편의 메마른 산들까지.

두브로브니크는 동쪽에 산을 이고 서쪽 해안에 있는 도시라서

아침에 해만 뜨고 나면 하루종일 햇살을 받고 있었다.

날씨만 흐리지 않다면 하루종인 눈부신 곳일 수 밖에 없다.

 

사진을 찍느라고 어지간한 태양아래서도 선글라스를 끼기 싫어하는 남편이지만

오늘은 짙은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오른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성벽위를 계속 걸어간다.

 

이렇게 튼튼한 성벽이니 바다로부터의 침입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바다 끝에 있는 튼튼한 암석 위에 지어진 성벽.

 

어느 한 곳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티켓 판매소에서 성벽을 따라 걷는데는 45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우리는 2시간 정도이상이  걸렸다.

가다 서고, 가다 서고 하느라...

여행도 제법 길어진데다가 워낙 아름다운 곳을 많이 봐서

왠만하면 감동을 잘 하지 않던 남편도

두브로브니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성 밖으로는 요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가까이서 보면 지붕 색깔도 마냥 붉은 것만은 아니다.

 

어떤 것은 완전 붉은 색, 또 어떤 것은 약간 흐릿한 붉은 색..

다른 어떤 지붕은 세월이 묻어나는 검붉은 색.

 

점점 날이 어두워 지기 시작한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도 어디선가 점차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안경을 다시 바꿔 썼다.  

 

잠시 어두웠던 우리의 눈 앞은 다시 환해 지고...

우리의 성벽 순례는 계속 된다.

 

지금도 이 사람들은 유고 내전 당시의 불바다가 되었던 이 타운을 기억하고 있다.

자신들의 보금자리가 불타는 모습을...

그리고 다시 이렇게 말끔하게 제 모습을 되찾았다.

모두들 피해 달아났던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서..

두시간도 넘는 시간...한 바퀴를 빙 돌아 제일 처음 우리가 시작했던 곳까지 돌아왔다.

고작 첫날인데...

성벽을 한바퀴 돌고 나니 마치 두브로브니크를 다 본 것 같다.

하루종일 햇살 가득한 두브로브니크 마을을...

 

 

<대리석의 영광, 골목 골목>

다음 날, 다시 올드타운으로 나갔다.

어제 너무 많이 걸어다닌 것 같아 피곤하다고, 오늘은 쬐금만 걷자니까

남편은 그런다.

"언제 또 이렇게 하루종일 대리석 깔린 골목을 걸어다닐 수 있겠냐"고.

 

도시 전체가 빛날 수 밖에 없는 이유중의 하나가

해가 떠서 서쪽 해안으로 해가 질 때까지 하루종일 햇살이 비치는 것 이외에도

바로 이 '대리석 벽과 대리석 바닥'이 빛나기 때문일 것이다.

돌의 마술'을 부린 두브로브니크의 대리석 골목을 하루종일 걸어다녔다.

 

필레게이트부터 쭉 뻗어있는 메인 스트리트, 프라차(Placa).

한치의 빈틈없이 대리석이 깔려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다녔으면

길바닥이 맨들맨들하고 광택이 난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두브로브니크의 인구는 5만명도 채 안된다는데

관광객의 숫자가 현지인보다 더 많은 것 같다.

성수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것 간은데,

여전히 이 거리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한 무리의 관광객들과 기념품을 파는 아가씨(?)

북유럽에는 발틱해안의 나라들에서는 진작부터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

여기는 아직 맹추위가 찾아오지는 않은 것 같다.

따뜻한 날씨와 도시 전체가 주는 밝은 분위기에 관광객들도 한층 더 환한 것 같다.

 

오후에는 비도 내렸다.

비 내리는 골목도 물빛이 어른거리면서 반짝 반짝...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 구시가지 골목 순례는 늦은 시간까지 계속 이어졌다.

 

 

<구시가지 내 이곳 저곳> 

오노프리오 샘(Onofrio Fountain)

1438년 오노프리오 드 라 카바(Onofrio De La Cava)라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2Km 떨어진 우물에서 물길을 끌어와 이 곳의 사람들에게 식수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물이 솟아나는 구멍 하나하나마다 정교한 조각작품으로 되어 있는데

17세기의 큰 지진으로 크게 파괴되었지만 아직도 일부의 조각 입으로는 물이 퐁퐁 솟아나

이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단다.

 

플라차 거리에 있는 유럽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약국 건물.

1391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는데 일반 대중들에게 약을 판매하기로는 유럽 최초란다.

 

플라차 거리의 동쪽 끝, 루짜광장(Luza Squre).

시계탑도 보이고, 오른 쪽으로는 교회((St Blasie's Church)도 보인다.

시계탑 바로 옆으로는 작은 오노프리오 샘도 있고.. 그 옆은 박물관도 하나 있고...

 

독일 브레멘에서도 보았고, 라트비아의 리가에서도 보았던 올란도 동상도 바로 옆에 서 있고...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하나하나의 건물이나 조각품들이 그다지 중요하게 다가 오지는 않는다.

...

그저 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이 거리에 비쳐지는 햇살을 받고,

비가 내리면 물빛의 아른거리는 바닥을 쳐다보고...

그리고 간간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나누는 것이 더 소중했다.

 

남편은 크로아티아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쩌면 해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단다.

해상 무역의 중심지 였던 베네치아 공국의 배가 아드리아 해안의 입구인 이곳을 지나가지 않을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어디선가 이 곳에 해적의 활약상이 대단했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 것 같다고...

그러면 이 사람들은 해적들의 후예인가?

ㅋㅋ

이 지역이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적도 있기는 하지만

철옹성 같은 높은 성벽을 바다쪽으로 지어 다른 어느 곳 보다 덜 오랫동안 지배를 받았을 것이라는 이야기 까지...

 

건물 한 귀퉁이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해적이야기, 베네치아 공국이야기를 한참동안 주고 받았다.

그러나 짧은 지식으로 정리가 다 안되

이것 역시 이번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정리해야 할 숙제중의 하나로 남겨야 했다.

 

루짜 광장에 있는 또 하나의 건물.

유고내전 당시의 두보르브니크의 참상을 담아낸 사진과 그 때 죽어간 사람들의 사진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당시의 사진을 슬라이드로 틀어놓았다.

불타고 있는 있는 두브로브니크.

화염에 휩싸인 이 곳. 부숴지고 폐허가 되고.

그러나 생각보다 완전히 다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이 도시에 대한 파괴가 그나마 그렇게 끝난 것이

민족과 나라를 초월한 20세기 유럽 지성인들의 행동이 파괴자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생각에

새삼 '행동하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들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켠으로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본

또 다른 건물 폭격 장면이 떠오른다.

세르비아군의 크로아티아 공격, 두브로브니크 파괴.

나토군의 세르비아 공격, 베오그라드 파괴...

죄없이 집안에서 자신의 가족들이 죽어가야 했다고 슬픈 눈으로 말하던 베오그라드의 사람들과

여기 이 기념관에 걸려있는 유고 내전당시 죽어간 젊은이들의 사진이 같이 겹쳐진다.

 

이 곳에 사는 이런 할머니.

이들의 삶이 전보다 더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비를 피하고 있는 고양이까지???

 

파괴된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 있어서

이곳이 진짜 눈부시게 다가와 주기를 바랄뿐이다.

 

 

<두브로브니크 외곽을 돌면서>

도착한 날에는 성벽을 돌아보고, 다음날은 하루종일 성안의 올드타운에서 놀고

다음 다음 날은 두브로브니크 외곽을 돌아보기로 했다.

마르코폴로의 고향이라는 코르출라 섬에도 가보고 싶었는데

여름 성수기가 아니라서 일주일에 배는 두번밖에 안 뜬단다.

"뭐, 마르코폴로보다 우리가 여행한 곳이나 거리가, 훨씬 더 많고 길것'이라는 건방진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요일이 안맞아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을 위안했다.

이제는 밖에서 두브로브니크를 바라보자.

눈이 부시지 않아도 된다. 비가 내려도 상관없다.  

꼭 햇살이 비쳐야만 눈이 부시는 건 아니다.

대리석 바닥이 반짝 반짝 빛나는 것과 같이 눈으로 확인되는 눈부심은 이제 없어도 된다.

하늘과 바다, 자연과 어우러진 도시 경관의 아름다움으로 눈부시게 다가올 필요는, 이제 없다.

 

인간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들, 인류의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실천을 이미 여기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죽고 죽이는 전쟁의 소용돌이를 다 딛고 일어선 이 도시의 사람들의 밝은 얼굴에서

진정한 눈부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한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진주'였고

이 도시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행복함을 전해주는 '천국', 두브로브니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까닭이다.

 

두브로브니크 항구.

커다란 호화 유람선 한척이 항구에 정박해있다.

저 배를 타고 온 사람들도 이 곳을 방문하고 나면 우리처럼 행복함을 느끼겠지?

 

성벽이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올랐다. 

 

오늘은 구름도 많이 끼었고, 파도도 거세다.

그래도 괜찮다. 이제 우리에게는...

 

비도 흩뿌린다.

성벽 밖에 놓인 이 대포가 이제는 전혀 필요가 없는 단지 하나의 장식물이길 빌면서...

 

거의 해가 넘어가려는 듯, 오후 4시 40분.

동쪽 하늘을 맑아온다. 

서쪽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었는데도...

  

아드리아 해의 서쪽 바다에 해가 진다.

수평선에는 구름이 가득 끼었는데

해가 넘어가는 꼭 그 부분만 구름이 없다.

절묘한 해넘이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두브르브니크는 마지막까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구나...

 

 

 <이건 덤! 3박4일동안 두브로브니크에서의 우리 생활>

크로아티아는 서유럽도 아닌데 물가는 거의 서유럽수준이었다.

자그레브에서도, 플리트비체, 스프릿 모두... 동유럽에서 느끼던 물가에 대한 행복함을 잠시 빼앗아 간 나라였다.

그래도 두브로브니크에 들어가서는 한 사흘 푹 쉬면서 돌아다니자고 애초부터 마음먹고 들어왔었다.

물가가 비싸도 너무 쫄지 말고, 바다가 보이는 베란다가 있는 집에서 한 사흘 머물자고...

 

두브로브니크의 우리집(?)이다.

개인 민박집.

버스터미널에 내려서 만난 수많은 삐끼(?) 아줌마 중 한명의 집이다.

오른 쪽이 주인이 사는 집이고, 우리는 왼쪽으로 베란다가 보이는 저 곳에 있었다.

라오스의 방비엥 이후로 베란다가 있는 집은 처음이라고 둘이서 키득거렸다.

라오스의 방비엥은 둘이서 11달러(일만3천원 정도)였는데

이 곳은 둘이서 하루 저녁에 20유로(3만 2천원 정도)다.

그래도 서유럽이나 다른 곳에 비하면 둘이서 더블룸으로 20유로라면 굉장히 잘 구한 방이다.

(유럽의 물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이해할거다)

베란다까지 있는데...

주인하고 따로 떨어져 있는 독립건물에 부엌까지 있고...

 

우리 베란다에서.

멀리 아드리아해도 보이고... 경치 또한 죽여줬다.

 

산등성이에 집이 있어서 아래길로 내려올 때는 골목으로 나와있는 귤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오르내리면서 하루도 안빼고 저 귤을 따 먹었다.

주인이 따 먹으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골목 밖으로 삐져 나온 나무가지에 매달린 과일은 지나가는 행인들을 위한 주인의 선물일 것이고

마음대로 해석하면서.

지금 이 글을 쓰는데도 침이 막 돈다.

얼마나 맛있던지...

 

주인집 마당에 있는 벤치에서 아침마다 인터넷도 하고.

주인 할머니 "녜다'가  타주는 터키식 커피도 마시고, 또 과일로 담은 독한 과실주도 아침부터 마시고.

-건강에 아주 좋은 과실주란다. 아침에 마시면 더 효과적이라고 말씀하셨다. ㅋㅋ

 

밤에도 저 뜰에서 같이 묵었던 일본애들이랑 놀고.

같이 사진 찍은 유이치는 혼자서 8개월째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친구였다.

일본 나고야에 사는 친군데, 일본에서 부산으로 배를 타고 와서 서울, 인천으로 해서 중국으로 배를 타고 넘어가

육로로 해서 유럽까지 왔단다.

우리도 8개월이 넘었으니 서로 빵상빵상이다.

같이 묵었던 다쿠야상은 저 사진 찍을때는 방에 있었는 모양.

그 애도 정말 착하게, 그리고 멋지게 생겼었다.

잘생긴 일본 총각들이랑 놀기도 하고...

 

우리 집 골목아래 계단 끝에 있는 빵가게.

'크로아티아 빵' 정말 맛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나라에서 먹어보던 빵보다...가장 최고.

우리 얼굴보다 훨씬 더 큰 빵이 1유로도 안하고...

 

잘 갖춰진 부엌이 있어서 도착한 첫날 바로 쌀도 사고, 야채도 사고, 고기도 사고..

이건 3박 4일 중, 어느 날 저녁.

이날은 정말 오랜만에 생선구이를 해 먹은 날이다.

슈퍼에 가니까 돔을 팔아서 손바닥만한 거 두마리를 사서 후라이팬에 구워 먹었다.

후라이팬 바닥이 시원찮아 돔 껍데기가 홀라당 벗겨져 버렸지만 그것 까지 빡빡 긁어서 머리까지 아삭아삭 다 발라먹었다.

그리고 주인 집의 채소밭에서 싱싱한 상추도 뜯어와서 토마토와 오이 넣고 길가 귤나무에서 따온 귤을 식초 대용으로 써서

맛있는 올리브오일 소스도 만들고.. 싸구려 크로아티아산 와인까지...

두브로브티크의 끼니때마다의 식사시간은 우리를 즐겁게 만들었다.

고추도 사서 된장국도 끓여먹고, 햄 샐러드도 만들어먹고, 계란 오믈렛, 참치 비빔밥...

 

저녁이면 이 동네 사람처럼 슈퍼를 가서 한가득 음식재료를 사와서

우리 집처럼...

 

강인한 사람들로 눈부셨던 두브로브니크에서

우리의 며칠도 반짝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