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여행 하루하루

T232 (11월17일) 잃어버린 여권이 준 선물,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프리 김앤리 2009. 11. 20. 00:42

 

크레타.

인류 문명의 발상지.


크레타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세계사 시간이었다.

기억은 제대로 나지 않지만 그리 예쁘지는(?) 않은 여선생님이 우리 세계사 선생님이었다.

세계사 수업, 첫 시간. 그는 인류 문명을 이야기하면서 먼 나라 그리스에 있는 크레타 섬을 언급했다.

미노아 문명, 오리엔트 문명... 헬리니즘... 크레타... 메소포타미아...

그 때의 흥분을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그 날 이후,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인가 있었던 세계사 수업시간이 다가올 때면 어김없이 매번 그렇게나 들뜰 수가 없었다.

수업시간에는 정말 단 한순간도 한 눈을 팔았던 적도 없던 것 같다.

그리 예쁘지는 않은 선생님이었지만 내게는 가장 달콤한 세상 이야기를 해주는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별로 강제적이지 않은 예습을 요구했었는데,

그 예습이란 게 노트 반쪽을 접어서 한쪽 반에 미리 교과서를 읽고 학습내용을 스스로 정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루 수업 분량만큼만 미리 해두면 되는 것이었는데 나의 세계사 노트 예습 분량은

매번 몇 시간을 더 넘어서는 예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트의 나머지 반쪽에는 당일 선생님 필기 내용을

적는 형식이었는데, 선생님이 적어주시는 것보다 내 예습부분은 항상 훨씬 더 넘쳐 있었다.

학기 초에 선생님께서 말해준 학습 방식으로 처음 몇 번 이후에는 선생님이 검사도 하지 않아서

학기가 끝나가면서 다른 애들은 거의 노트 반쪽이 비어가고 있었는데, 나의 예습 노트 부분은 항상 가득차 있었다.

선생님의 주문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아주 만족한 공부였으니까...


고백컨대 그 때 이후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교 수업시간을 그렇게 고대하며 기다렸던 적은 없었다.

그냥 의무감으로, 공부를 잘 해야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최면을 걸며 학교라는 생활공간을 마쳤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 때때로 ‘스스로 흥이 나서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나의 중학교 2학년, 세계사 수업시간을 떠올리곤 한다.

행복했던 그 순간을...


크레타. 그래서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곳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선생님이 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게나 들뜬 마음으로 매번 수업시간을 기다렸던 어린 날의 내 모습이 그립기도 하고...

 

아테네 항구, 피레우스.

크레타 섬으로 가기위한 밤배를 탔다.

저녁 8시 40분에 배를 타면 크레타 이라클리온 항구에는 아침 6시가 되기 전에 도착한다. 

 

해도 뜨지 않은 첫새벽에 크레타의 최대 도시 이라클리온(Iraklion)에 도착해서 바로 버스를 타고 한시간 반 만에

레팀노(Rethimno)로 왔다. 이라클리온은 레팀노에서 이틀간 머문 뒤에 다시 오기로 하고.

레팀노의 유스호스텔.

세계 어디를 가나  싼 숙소를 제공해주는 유스호스텔이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예약도 안하고 갔다.

사실 별로 걱정도 안했다. 성수기가 아니니까.

역시다. 방이 철철 넘친다.

8명이 자는 도미토리를 우리 둘이서 다 차지했다.

일인당 10유로,

한여름 북적거렸을 호스텔이 조용하기만 하다.

겨울(?) 이라서 다른 숙소들은 거의 문을 닫았다는데,

날씨가 추울까봐 약간 걱정을 했었는데, 왠걸 쨍쨍하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바다로 나선다.

마치 우리나라 제주도 같다.

바닷물 빛깔까지도.

 

항구도 조그맣고.

날씨가 좋아선지 가을이 되면서 얼마전부터는 유럽의 거리 식당에서는 사람들을 볼 수 없었는데

여기는 아직도 거리로 나와있는 식당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방파제 모양도 우리랑 비슷하고...

거기서 낚시 하고 있는 사람도 우리랑 똑같고...

한참을 보고 있었는데 콩알 만한 새끼 고기 한마리 잡지 못하는 상황까지 우리네랑 꼭 같다. 

 

여기도 낚시하는 사람은 보이는데...

한때 낚시에 푹 빠져 있었던 남편은 그런다.

이렇게 맑은 물에 무슨 고기가 있겠냐, 고기가 바보냐? 낚시줄도 다 보이는 이런 곳에서 어느 바보같은 고기가

먹이를 낚아채겠냐... 그리고 해가 뜰녁이나 해가 질 녁에 고기가 잡히지 이런 대낮에 무슨...

 

꼭 고기를 잡고자 하는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

마치 우리처럼.

오랜만에 한가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지는 우리처럼.

 

매일 매일 전쟁처럼 짐을 싸고,  기차시간 버스시간을 맞춰가며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돌아다녀야만 했던

지난 몇달간의 시간을 뒤로 하고 참 오랜만에 시간이 철철 넘친다.

 

잘 꾸며놓은 레팀노의 해변 거리.

야자수가 있다는 것만 다를 뿐. 부산의 광안리 바닷가랑 꼭 닮았다.

 

크레타 섬도 한때는 터키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곳곳에 이슬람 모스크가 남아있다.

크레타, 하면 문명의 발상지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마치 다 깨어져 있는 돌조각, 고대 사람들의 흔적만 있는 텅 비어 있는 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여기도 사람들이 살아온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었다.

새로운 발견.

아니, 놀라운 발견이라고 하는 게 더 옳을 지 모른다.

 

레팀노의 상징이라고 하는 '베네치아 성채'도 마찬가지다.

크레타 섬은 중세의 거대 공국 '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도 받았다.

이 성채도 당시의 베네치아 사람들이 건설한 것이다.

 

한 여름에는 사람들이 이 곳을 많이 찾았을까?

지금은 아무도 찾아주는 이도 없다.

저 넓은 성채안에 숨을 쉬는 사람이라고는 단 우리 두 사람.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 풀 나무들만 우리를 벗한다.

 

차가 한대 보이기는 한데...

저기에서 내린 사람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다.

 

몇 백년전에는 이 곳에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겠지.

레팀노 주변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 크레타 문명 시대의 유물, 로마시대의 청동상들도 발견되었다는데...

오랜 세월동안 이 섬은 묵묵히 한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중학교 시절... 배운 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였겠지?

나를 그렇게 들뜨게 만들었던 건, 한국의 부산, 서면이라는 조그만 동네이야기에서 벗어나

아주 오래전 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기나긴 역사에 놀랐던 것이고,

조그만 동네가 아니라 세상은 넓고도 넓다는 사실에 흥분했던 것이겠지.

 

들뜬 마음으로 섬, 이곳 저곳을 살피고 다니니 배가 고프다.

오랜만에 바닷가로 나오니 바다 짠내음이 우리를 자극한다.

 

해산물이라고는 몇번 먹어본 적이 없다. 여행을 나와서...

한국에서의 우리집 밥상에는 늘 바다에서 나온 것들 천지였는데...

생선, 게, 오징어, 문어, 바지락, 홍합, 조개,미더덕..... 미역,파래,  다시마 , 김....

육류를 먹는 날은 많이 없어도 바다에서 나온 녀석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식탁위에 올랐었는데...

 

해변 옆의 식당가를 지나는데 그릴 위에서 굽히고 있는 문어 냄새가 우리를 미치게 한다.

 

여권을 잃어버리고 나니... 진짜 간이 커졌나 보다.

1유로에도 벌벌 떨며 감자를 삶는다, 계란을 삶는다, 아니면 이것 저것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매일 매일 소풍나온 것 처럼 점심을 떼우고  아침 저녁으로도 슈퍼를 찾아서 직접 해먹고 다녔었는데...

(그런데도 남편은 심심하면 나보고 그런다.

 "여행 나오니까 좋제? 밥도 안해도 되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재료도 별로 없는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끊임없이 남편의 건강을 챙기려는 부인의 속앓이(?)는 보이지 않으십니까?

 남들은 근사한 식당에서 폼잡고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공원의 나무그늘을 찾아 감자를, 계란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이게 즐거운 소풍'이라며 위안하는 내가 기특하지 않으십니까?

 좁디 좁은 호스텔의 부엌, 이렇다 할 양념도 없는 상황에서 뭔가를 항상 만들어 내는 이 대단한 집중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ㅋㅋ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서 망정이지, 누가 시켰다면 이런 짓을 왜 할까? ㅋㅋ)

 

문어 굽는 냄새에 그간의 쫀쫀함을 벗고 식당에 앉았다.

문어 그릴과 오징어 튀김, 그리고 치즈와 올리브가 듬뿍 들어있는 그리스식 샐러드.

ㅋㅋ

우아하니 식당에 앉아서 시켜먹는 음식, 역시 맛있다.

그런데 다 먹고 나니, 그래도 좀 아깝다. 비싸서...

토마토와 오이, 올리브, 치즈만 사면 저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샐러드를 더 맛있게 내가 만들수 있는데...

또 어쩔수 없는 쫀쫀한 여행자로 돌아간다.

내일은 호스텔에서 내가 직접 만들어 먹어야지!!!

 

레팀노에서 이틀을 자고 다시 이라클리온으로 돌아왔다.

 

이라클리온은 크레타 섬의 중심도시다.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리스에서 생산되는 올리브 전체 수확량의 절반이 바로 이 크레타 섬에서 재배되는 것이란다.

 

그리고 이라클리온에는 그 유명한 크노소스 궁전이 있다.

 

이라클리온 항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항구 끝에 붙어 있는 베네치아 요새(Venetian Fortress)다.

베네치아 공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이라클리온에서 유명한 모로시니 분수(Morosini Fountain).

베네치아 인들이 17세기에 만든 것이란다.

가운데 물이 나오는 사자는 14세기의 것이라네?

 

 엘 그레코 공원, 엘 그레코 조각상.

 

크레타 섬에 와서 알게 된 사실, 두가지.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크레타 섬 출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스페인에서 우리를 감동시켰던 화가  엘 그레코도 이 도시 출신이라는 것.

(엘 그레코는 원래 본명은 아니고 스페인어로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4년전 스페인 여행 곳곳에서 만났던 그레코의 독특한 그림을 생각나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이 화가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 자신을 많이 닮아 있었다. 

대부분이 길쭉한 얼굴...

 

드디어 크노소스 궁전을 찾았다.

아끼고 아껴 둔 것을 꺼내보는 느낌.

어린 날, 나를 휘어잡았던 세계사로 돌아가는 시간.

아니 어린 나를 만날 수 있는 시간.

(남편은 괜히 키득거리며 웃는다. 그만 회상에 잠기라고...

 역사의 내용은, 수업한 내용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그냥 그 때의 감정만 가지고 있다면서...

 사실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완벽한 행복'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내가 부러울 것이란 생각으로 입을 다문다.

 부러워서 그러죠?) 

 

나무등걸로 만들어진 크노소스의 입구를 지난다.

소박하다.

 

입구에는 크노소스를 발굴한 영국의 고고학자 아더 에반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1900년에 발굴했다.

 

크노소스 궁전은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이 한번 들어가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미궁을 건설해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가뒀다는 이야기가 있다.

미노타우로스는 미노스왕의 아내인 파지파가 낳은 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지닌 괴물이다.

파지파가 이런 괴물을 낳게 된 배경에는 올림포스 12신 중의 하나인 포세이돈의 저주가 있었기 때문이라는데...

포세이돈은 미노스 왕에서 황소 한마리를 보내어 이것을 죽여 자신에게 바치면 더 큰 영광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미노스 왕이 황소를 죽이지 않아 포세이돈이 분노했단다.

결국 포세이돈은 미노스 왕의 아내와 황소가 서로 사랑하게 만들어 왕비의 몸에서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다고...

그래서 미노스 왕은 그 괴물을 가두는 크노소스 궁전을 지었다고...

 

3,900년 전에 지어졌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다.

진짜 구석구석 미로같은 것도 보이고...

 

크노소스의 발굴을 계기로 크레타 섬에 존재했던 고도의 문명 유적이 차례로 발견되었는데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크레타 문명(미노아 문명)이다.

조사에 의하면 크레타 섬에 최초로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7000-6000년경이란다.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문명이 발생했다고 판단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곰이 동굴에서 단군할아버지를 만들기 위해 마늘을 먹고 있었던 시절

여기에서는 벌써 문명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다.

곰 할매가 마늘을 먹고 있던 시절...ㅋㅋ

 

왕좌의 방.

돌로 만든 의자도 보이고 가운데는 난로로 쓰였다는 돌난로도 있다.

벽에는 사자 몸에 독수리 머리를 한 신화속의 동물도 그려져 있다.

 

백합 왕자의 벽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입체감이 있는 부조벽화다.

물론 발굴하면서 다시 색채를 입혔겠지만 자연의 붉은 색감이 눈에 띈다.

 

식량창고의 항아리들.

사람 키 만한 항아리, 

당시의 문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얼마나 풍요로웠는지가 이 큰 항아리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곡식이 났으면 항아리가 저렇게 커야 했을까...

 

자료를 공부하지 않고 갔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크노소스 궁전의 기둥들과 집 짓는 기술.

기둥들이 아래보다는 위로 갈 수록 더 굵어진다.

그리고 단순히 돌로만 궁전을 지은 것이 아니라 중간 중간에 나무를 넣어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거란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하다.

발굴을 하면서 너무 현대적인 감각으로 만들어놓았다.

너무나 반듯한 외벽. 심지어 페인트칠까지...

 

이게 크노소스 궁전 건축의 가장 위대한 점이라는데.

전체 4층 건물로 아주 복잡한 구조다.

놀라운 것은 4층 꼭대기부터 제일 아래층까지 빛이 들어오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곰할배가 마늘 먹고 있던 시절에 이런 정도의 실력이???

계속 우리를 감탄시키는 사실이었다.

 

흔적들... 고대의 흔적들...

 

벽화들도 많이 눈에 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벽화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있을리는 만무하다.

아주 조그만 부분 부분이 남아있어 그걸 붙이고 나머지는 그림을 그려 복원해 놓았다.

사진으로는 잘 구분이 안되지만 그림의 90%이상은 현대에 와서 그려놓은 그림이다.

 

복원해 놓은 다른 건물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남아있는 아주 조그만 흔적에서도 우리는 크레타문명을 만날 수 있다.

 

크레타 섬... 크노소스 궁전...

그리고 '여행증명서'.

 

이런 깜찍한(?) 사진은 언제 찍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크노소스 궁전 여기저기를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행복해하고 있는 동안

남편이 연출한 사진인가보다.

사진 오른쪽을 보면 아테네의 그리스 대사관에서 임시로 만들어준 여행증명서가 보인다.

이것 덕분에 여기를 왔다면서 아마 고마워하며 찍었는가 보지???

 

여행증명서라는 걸 처음 보았다.

여권을 잃어버리고 대사관을 찾아가면서 여행증명서를 끊어야 한다길래 무슨  증명서 종이 한장을 주는줄 알았다.

그런데 여행증명서라는 것도 제법 그럴싸하다.

여권처럼 사진도 붙이고.... 모양은 여권하고 똑같다.

ㅋㅋ 고맙다.

아테네의 고수 소매치기...

 

 

사실 크레타 섬을 찾아오면서 우리가 상상한 건 허허벌판에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무지한 선입견이었는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생각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상상이지만...

 

7000년전, 6000년전...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주 먼 옛날, 그곳에 사람이 살았고, 거기서 인류의 문명이 탄생했다고 하는

기본적인 지식만으로는, 처음 그 이후 지금까지의 아주 오랜 세월은 훌쩍 뛰어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치 그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처럼 생각했었나 보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곳에는 신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인류문명의 발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신석기 문명도 있고, 비잔틴 문명도 있고, 로마시대, 베네치아 시대, 오스만투르쿠의 지배시대... 그리고 지금의 그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도 일차대전이 있어서 일차대전 기념비까지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를 항상 7000년전의 고대만 생각하고 있었을까?

나를 들뜨게 했던 어린 시절의 세계사 수업으로만 한정하고 있었을까?

 

'무지한 선입견'이 낳는 또 다른 무식을 깨닫게 하는 크레타였다. 적어도 내게는...

 

이라클리온 항구를 뒤로 하고 그렇게 우리는 크레타를 떠났다.

환상의 섬, 산토리니를 향해...

 

잃어버린 여권을 대신할 새로운 여권을 언제 다시 받을지는 아직 모른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확인되는 사실이 없다.

 

덕분에 넉넉하게 얻은 시간...

우리는 짙푸른 에게해를 건너 또 다른 섬, 산토리니로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