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지금은 여행중 /못다한 여행이야기

네팔이야기

프리 김앤리 2010. 2. 20. 14:38

 

 *** 2009년 3월 8일부터 올해 2월 4일까지 우리는 세계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중국 베이징에서 시작해 라오스, 네팔, 인도, 이란을 지나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과  아이슬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도 여행했다.

       그리고 이집트를 지나 요르단, 시리아도  거쳐서  터키를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5월 하순경, 한국에 잠시 들어와서 3주정도 머물렀던 걸 제외하면 꼬박 311일간의 여정이다.

       그동안 우리 블로그의 글은 순전히 가족들에게 보내는 안부 차원이라서  매일 매일 어느나라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고 있는지

       또 우리는 건강하게 잘 있노라고 걱정하지 말라는 차원의 글을 적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다시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 여행중에 다 적지 못했던 여행이야기를 조금씩 정리하려고 한다.

       한 나라, 어느 한 곳의 소개만이 아니라 여행 전체에서 우리가 느꼈던 것들,

       이 나라 저 나라, 이 곳 저 곳을 넘나들며  가졌던 우리의 생각을 '못다한 여행이야기' 코너로 만들어서 쓰고자 한다. ****

 

 

 

여행을 다녀와 술 한잔 하는 자리에서 후배가 내게 책 한권을 건낸다.

"선배님! 이제 우리 여행이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메진피스에 일하는 사람들이 펴낸 「희망을 여행하라」라는 책이었다.

 

... 

한 포터의 죽음

시암 바아두르(Shyam Bahadur), 네팔의 포터였던 27살의 그는 1997년 10월 25일 사망했다.

그가 포터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그는 안나푸르나 트레킹 코스 가운데서도

해발 5,416미터에 이르는 토룽 라(Thorung-La) 지역까지 짐을 나르곤 했다.

1997년 10월 24일 아침, 그의 일행은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몸 상태가 나빠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통을 호소했을 때, 그를 고용한 여행자들은 그에게 혼자 산을 내려가라고 했다. 만약의

응급 사태에 대비할 돈 같은 건 주지 않았다.

산을 내려오던 시암은 구토를 시작했고,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그것은 심각한 고산증의 신호였다.

얼마 지나 시암은 공사 중인 롯지에 다다랐다. 당시 롯지를 짓고 있던 주인은 그가 심하게 몸을 떨고 있었으며

거의 탈진 상태였다고 증언했다. 다음 날 아침, 시암은 마침내 길가에 쓰러지고 말았다. 해질녁이 되어

한 미국인 등반객이 시암을 발견하고 그를 흔들어 깨웠지만 그는 이미 혼자 일어설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를 발견한 지역 주민들과 포터들의 도움으로 이튿날 아침, 마침내 히말라야 구조센터에 도착했지만

시암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의 시신은 3일간 길가에 눕혀져 있었고, 수많은 등박객들이 애도하며

그의 곁을 지나갔다.

...

"보통 네팔 포터들이 버는 돈은 250루피~300루피(약 4~5천원)에요. 그는 어차피 가야 할 길, 조금 더

 고생하더라도 하루에 100루피씩을 더 받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350루피를 받는다고 해도

 고스란히 그의 주머니로 들어가진 못하죠. 그 돈으로 밥값과 숙소비까지 해결해야 하니까요.

 게다가 그룹에 속한 포터라면 포터들의 리더나 가이드가 그 돈 중 수수료로 50루피 정도를 떼고 나면 남는 건

 고작 200루피예요. 열흘간 산을 오르고 내려가는 길, 주머니에 남은 돈이 10달러도 안되는 경우가 허다하죠."

히말라야 롯지의 식사는 한 끼 100에서 300루피를 오간다. 현지 음식인 '달밧'으로 하루를 채운다 해도 그 돈 중

상당 부분은 흩어지기 마련, 돈을 아끼기 위해 하루 식사를 두 끼로 줄이고, 여행자들이 식사를 끝마치고 난

식당 바다이나 창고에서 자거나, 캠핑을 하는 지역에서는 동굴 같은 곳에서 자기도 한다고 했다.

그들이 그토록 가파른 선택을 하는 것은 차가운 현실 때문이었다. 여름과 겨울의 비수기를 빼면 봄과 가을,

단 두 계절에만 일할 수 있는 직업.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지금 그 짐을 나르지 않으면 당장 그 짐을 나르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10만명이 넘는다는 현실과의 경쟁이었다. 그 속에서 포터들에게 남는 선택은 최대한의

짐을 지는 것, 최소한의 돈을 쓰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싸고 편한 여행을 위해 그들의 등에 얹은 짐은

간혹 그들의 생명을 빼앗는 무게가 되기도 한다.

...

...

 

숨막힐듯한 아름다운, 눈물나도록 그리운 우리들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산을 걷는 내내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포터들의 이야기가

여행을 돌아와 제일 처음 잡은 책에서 선명한 활자로 찍혀 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그들의 등에 우리의 배낭을 짊어지운 채 걸어갔던  안나푸르나 길.

그 길을 같이 걸어간 우리들의 포터와 또 다른 여행자들의 짐을 지고 가던 수많은 포터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우리는 작년 4월 9일부터 16일까지 7박8일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했었다.

우리 일행은 한국에서 온 선배와 후배 두명까지 합해서 모두 4명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한국에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던 한 변호사님이 그러셨다. 

부인과 두사람이 산을 오르면서 두 사람의 포터를 고용하려고 했는데,

포터가 두 사람은 필요없다고 자기 혼자서 두 사람의 짐을 다 지고 가도 문제없다고 해서 '그러자'고 떠났는데

혼자서 두 사람의 짐을 메고 산을 오르는 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

결국엔 포터의 등에서 짐을 덜어 변호사님이 메고 올랐는데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

또 도보여행가 김남희가 쓴 히말라야 여행기에서

등산화를 신지 않고 나타난 포터에게 등산화를 신고와야 당신을 포터로 고용할 수 있다며 버티었다는 이야기도

읽은 터였다.

 

우리는 4명이니까 몇명의 포터를 고용하면 될까?

지금도 마찬가지 심정이지만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히말라야가 주는 공포감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짐을 지고 산을 오른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텔에서는 2명의 포터면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세사람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반드시 등산화를 신고 와야 한다고 당부까지 하면서 말이다.

한국에서 일을 한 적이 있어서 약간의 한국어도 할 수 있다는 '쿠말'을 포함해서

모두 세사람이 우리에게 왔다.

 

포터 한 사람에게 우리가 지불했던 돈은 하루에 일인당 10달러. 8일동안 1인당 80달러씩 모두 240불을 지불했다.

그때 환율로 따진다면 하루에 일인당 800루피로 계산된 것이다.

...

그러나 우리의 짐을 지고 간 그 사람들 한명 한명이 얼마를 받았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호텔에서 소개를 해줬으니 얼마의 돈은 커미션 명목으로 호텔로 들어갔을테고

'갑시다' ' 좋아' '천천히' 등, 문장이 아니라 한국 단어 몇 개를 구사하던 쿠말이 자기는 포터가 아니라

가이드라며 몇번씩이나 강조를 했으니 나머지 두사람보다 더 챙겼을 것이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여행자 네 사람과 짐을 지고 가는 포터 세 사람.

그렇게 우리의 히말라야 등반은 시작되었다.

작은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산을 오르는 우리와 달리 포터들의 등 뒤에는 무거운 우리의 배낭이 얹혀져 있었다.

다행이 이들 모두 튼튼하게 보이는 등산화를 신고 나타나 마음이 놓였었다.

 

우리의 작은 쌕에는 갑자기 비가 오면 얼른 꺼내 입을 수 있는 비옷, 그리고 추우면 빨리 덮을 수 있는 잠바 하나

정도만 들어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그들 몫이었다.

게다가 한국에서 온 두 사람이 우리 둘을 위해 얼마나 많은 한국 음식을 챙겨왔던지

'슈퍼울트라킹왕짱 보급대'라는 별명을 붙여 줄 정도였다.

김치, 통조림, 찌게, 쵸콜렛... 슈퍼울트라킹왕짱 보급품을 걱정없이 배낭에 집어 넣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돈을 지불하고 고용했던 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구 구겨넣은 우리 배낭을 살짝 들어보니 그 무게가 어마어마한 것 같았다.

그러나 애써 외면했다.

아니 처음엔

'히말라야'라는 곳에 난생처음 다가서는 우리의 두려움이 더 커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저들을 걱정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가 더 걱정이었으니...

 

제일 앞에 가는 포터는 우리 팀은 아니고 다른 여행자의 포터다.

쿠말은 우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와 보조를 맞추어 가서 아마 이 사진에는 없는 것 같다.

 

앞서 가는 쿠말.

히말라야의 전통노래라는 '레썸삐리리'를 흥얼거리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잘 걸어올랐다.

그가 힘들거라는 생각보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무릎에, 우리의 관절에 더 신경이 갔었다.

혹시 심장소리가 빨라지지는 않는지, 머리가 아파오지는 않는지 어디서부터 그놈의 고산증이라는 게 나타나는 건지,

무사히 이 트레킹을 마칠수 있을지...

첫날 우리의 관심사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었다.

 

정말 돌계단이 많았다.

한걸음 한걸음 오르는 데 숨이 찼다.

어디선가 대나무를 툭 잘라와 만들어 준 나무 지팡이에 의존하면서

가능하면 우리의 무릎에 무리를 덜 가게 해야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들의 가방은 두 개다.

그런 거였다.

왜 그들이라고 그들의 짐이 없을까?

자신들도 이 산에서 꼬박 7박8일을 보내야 하는데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올라가면 자신들도 덧입어야 하는 두터운 옷이 필요한 거였는데...

우리의 무거운 배낭과 가장 최소화시켰겠지만 자신들의 안전을 위한 여분의 옷을 넣은 작은 배낭까지

두 개씩 엎쳐 메고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비가 철철 내린다.

산을 오른지 몇 시간도 안되어 억수같은 비가 쏟아진다.

비가 새지 않는 고어텍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작은 쌕에 넣어두었던 비옷까지 얼른 겹쳐 입고 잠시 비를 피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비닐같은 것만 하나 뒤집어 쓴다.

누구는 그냥 멀뚱이 비를 바라다보고만 서있다.

 

보다 못한 선배는 자신의 배낭에 꿍쳐두었던 방수 점퍼를 하나 꺼내놓았다.

입으시라고.

반소매만 입고 달달 떨고 있는 좀 나이가 어려보이는 포터가 불쌍해서 내놓았는데 쿠말이 덜렁 입어버린다.

단 세사람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 나름의 상하체계가 있는 모양이다.

자신은 포터가 아니라 가이드라고 몇번이나 강조했던 쿠말의 위상을 본다.

우리가 내 놓은 배낭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을 달랑 먼저 들던 쿠말이었다.

우리가 할 말은 없다.

이것 또한 그들의 방식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이후... 우리 넷은 내내 그들이 눈에 밟혔다.

누가 더 무거운 것을 들고 가는지...  그들은 이 저녁에 어디서 자는 것인지,

때때마다 먹는 아침 점심 저녁에 이들은 무엇을 먹는 것인지.

잠시 잠시 휴식때마다 우리가 짜이를 한잔 먹는 사이 그들은 무엇을 마시고 있는 것인지...

 

나이가 어려 보이는 저 사람은 늘 무거운 것만 드는 것 같아 보였다.

하루 저녁을 자고 나서 다음날 아침부터는 산행을 시작하기전에

어린 친구가 지고 갈 가방안에서 무겁게 보이는 건 쿠말이 져야할 배낭으로 살짝 옮겨 놓는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우리가 짜이를 한 잔 마시면서 매번 이들에게도 한 잔 사줘야 하는 것인지.

한두번은 사주기는 했지만 매번 그럴수는 없지 않느냐며 생각도 해보고,

그들이 골라주는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고 휴식을 취하니 서로간의 모종의 약속으로

포터들에게 짜이 한 잔 정도는 그저 주고 있을 것이라는 까닭없는 짐작으로 위안도 해보고.

우리는 게스트하우스의 부엌까지 빌려가면서 한국음식으로 밥을 해먹으면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수도 없었지만 물어본다고 매번 해결해 줄수 있는 건 아니지 않겠냐며 외면해 버렸다.

분명히 무엇인가는 먹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우리처럼 고된 산행에 지쳐 이것저것 막 먹어치우는 형태는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한번씩 우리의 식사에 초대를 했지만 다른 이들은 싹 빼버리고 쿠말만이 우리의 식탁에 동참했다.

 

우리가 자고 있는 산장의 다른 방에 자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자기들끼리 자는 다른 방이 있을꺼라고 미루어 짐작을 할 뿐이었다.

 

2,500미터가 넘는 도반까지 올랐던 날은 그야말로 안나푸르나 길이 대 만원이었다.

수십명이 한 팀인 'Big Group'가 산을 오르고 있어 전날부터 그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

시간상으로나 우리의 체력적으로나 충분이 더 오를 수 있었는데도

빅 그룹이 다음 지점의 산장을 먼저 점해버려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도반산장에 짐을 풀었다.

다른 소그룹들도 마찬가지였다.

몇 안되는 도반에 있는 산장들의 침대는 꽉 차버렸다.

산장뿐만 아니라 주변의 캠핑장까지 빈틈없이 여행자들로 꽉 들어찼다.

여행자들은 갑갑하던 등산화도 벗어버리고 간편한 복장으로 그림도 그리고 담소도 나누고...

히말라야 산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여러 팀들의 포터들이 함께 모여 그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아주 늦은 시각까지 카드게임도 즐기고...

 

이미 2,500미터를 넘어서 후배는 약간의 두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산증을 예방한다는 레몬티를 몇잔이나 마시고

맛있는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진작에 일찍 골아떨어졌다.

우리와 함께 올랐던 포터아저씨들도 마찬가지로 달콤한 잠에 빠져들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새벽에 잠시 잠을 깨서 밖으로 나갔을 때 마당의 풍경은 나를 오그라들게 만들었다.

두터운 티에 털 잠바에 오리털 침낭까지 덮고 자면서도 오들오들 떨었던 내 잠자리였는데

그들은 그냥 밖에서 담요 한장씩 깔고 자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은 산장에 손님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부엌 안에 있던 긴 의자까지도

사람들이 침대로 쓰고 있었다는 거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무거운 짐을 이고 가야 하는 사람들인데...

원래는 이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들인데...

 

이미 이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오늘 밤은 마당에서 별을 바라보며  히말라야의 찬 바람을 맞으면서 그냥 자야 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들은 어제 저녁  자기네들끼리 한데 모여 돈까지 걸어가며 한판 카드놀이를 한거였던가?

아니면 지금까지 이들은 늘 이렇게 잠자리를 만들어온 거였던가?

우리가 몰랐단 말인지...

 

바로 아래 촘롱 산장에서 만났던 나이 제법 지긋한 여행자가 떠올랐다.

처음에 우리는 그가 나이어린 아들? 아니면 손자를  데리고 산행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서양인 할아버지에 동양인 아이라 어디 입양을 했거나 아니면 무슨 다른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함께 밥을 먹고 있었고 짐도 거의 비슷하게 나눠지고 있었고

다른 방이기는 했지만 각자가 다 산장의 옆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명은 여행자였고, 한명은 포터형식으로 고용된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히말라야를 함께 오르는 동반자로서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힘든 산행을 함께 하는...

 

사실 히말라야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다 포터를 고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무리의 서양 여행자들은 각자가 자기의 짐을 메고, 가이드 한명하고만 같이 산을 오르는 경우도 보았다.

산에 대한 설명도 듣고 길을 안내받을 수 있는 가이드 한 사람만 대동하고.

 

사진의 젊은 여자 여행자는 서너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한명하고 같이 산을 오르고 있었는데

자기의 배낭은 자기가 메고 대신 포터는 아이를 업고 올라가는 경우였다.

조금 가다가는 아이를 내려서 같이 걸려갈때는 자기의 별 크지 않은 가방을 포터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두들 또 양식있는 여행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름답고 웅장한 안나푸르나를 겸손하게 오르지 않는 무리들도 많이 있었다.

산 위에서 무슨 잔치를 벌이는 것인지 얼마나 많은 짐들을 지고 올라가게 만들던지.

얼마나 화려하게 먹고, 얼마나 요란하게 생활하는 것인지...

수십Kg은 더 되 보이는 짐을 지고 가는 포터들의 힘겨운 발걸음도 보였다.

10달러의 알량한 돈을 지불한 댓가로 충분히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배낭 하나 안에도 다 집어 넣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을 가지고 올라가느라

그들의 대바구니 속에는 여행자들의 무언가 짐으로 꽉 차있었다.

 

그들의 다리는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는 듯 혈관들이 다리 밖으로 터져나오는 안쓰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돌투성이의 험한 산길을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의 슬리퍼를 신은

그들의 등에 얹혀진 짐은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히말라야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안락하고 호사스런 시간들을 주겠지만

그들에게는 거친 숨소리와 힘겨운 악몽을 꿈꾸게 하고

어쩌면 목숨을 앗아가는 무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자위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래도 4명 짐을 세사람에게 나누지 않았냐?

우리 짐을 메고 가는 저 아저씨는 그냥 달랑 크지 않은 저 배낭 하나만 지어주시면 되는 거잖아.

 

도대체 산위에서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길래 저렇게 드럼통까지 들고 올라가게 하는 것인지.

저 팀들보다는 우리는 덜 비양심적이지 않냐?

 

히말라야의 포터들을 봐야 하는 불편한 마음을

'그래도 우리는~~'이라는  생각으로 눌렀는지도 모른다.

우리 넷은

점점 고산증 증세가 오는 것 같은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은 숨기지 않고 이야기 하면서도

아저씨들에 대한 불편한 마음은 각자의 마음속에 숨겨놓은 채 애써 표현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산 위에서 며칠을 같이 보내면서 우리는 점점 함께 산을 오른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

그 알량한 10달러의 돈으로 그들을 고용한 것이 아니라.

 

산에 대해서 잘 모르고, 더구나 히말라야라는 산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르는

산 아래 평지에 사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들이

산을 잘 알고 산에서는 누구보다 더 강한 이들을 만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여행.

 

해맑은 미소를 산행 내내 우리에게 보내주었던 우리의 아저씨.

지금은 우리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짐을 메고 가지만

안나푸르나 정상까지 셀파를 했던 분이시란다.

산에서의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어느 새 우리는 이 아저씨에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불편했다.

이 분이 메고 가는 우리의 짐이.

이 분의 잠자리가... 식사가...

 

"다음에 다시 히말라야를 온다면 포터를 쓰지 말자. 미안해서 안되겠다."

"정말 그럴 자신 있어?"

"그래도 너무 미안하잖아."

"우리가 이 사람들은 안 써주면 이 사람들 돈 벌이가 없을텐데?"

"우리가 이 사람들을 써 주는게 어쩌면 더 도움이 되는 건지도 모르잖아."

"그것도 또 그렇네..."

"그래도... 미안한 건..."

 

다른 팀들의 포터들이 메고 가는 어마무시한 무게와 질릴듯한 크기의 짐들을 보면서

우리 팀 아저씨들이 메고 가는 배낭이 그래도 작고 조금은 덜 무거울 것이라는 생각과

그래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번갈아 떠오르면서

우리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지고 간 사탕이나 초콜렛을 나누어 먹는 것 하고

진심으로 이들을 존중해 주는 것 밖에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그들에게 겉으로 어떻게 표현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저 얼굴이 부딪히면 표정으로라도.

 

물론 우리의 표정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점점 고도가 높아지면서 우리 스스로도 힘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 몸 안의 움직임에 더 민감해졌다.

머리는 관자놀이 부근부터 욱신거리기 시작하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심장 뛰는 소리에, 그 속도에 스스로가 놀라고 두려워지기 시작하는 거였다.

 

길은 얼어붙어 있는데 눈까지 내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오르는 마지막 지점이었다.

작은 가방조차 메고 가기 힘들어 쌕쌕거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들을

다독여 준 사람들은 바로 든든한 저들이었다.

여기서는 이렇게 힘들지만 저 위에 올라가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고,

세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노라고

힘내서 천천히 올라가자고 부드러운 말로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도 잊지 못하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우리의 기억속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무사히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올랐다가 무사히 내려가면서

처음의 무심함과,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를 벗어나 우리는 어느 듯 친구가 되어 있었다.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이 무엇인지 몰랐다.

겨우 우리가 한 것은  산 아래로 내려와서 맥주를 대접해 드린 것,

그리고 각자 각자에게 따로이 직접 자그나마 팁을 전해드리는 것 밖에 없었다.

예전에 남미 안데스 산맥의 잉카트레일때 처럼 가이드에게 여러명의 팁을 한꺼번에 주는 것이 아니라

이거라도 정확하게 받으십사 하고 직접 전달해 주는 일 밖에...

 

 

*** 다시 히말라야 여행을 꿈꾸며***

히말라야 트레킹.

정말 다시 하고 싶은 여행이다.

나이가 들면 정말 더 이상 할 수 없는 여행,

몇년 내에 꼭 한번 다시 도전하고 싶은 여행이다.

다시 한번 가더라도 나는 나의 짐을 다 메고 산을 오를 자신은 없다.

아무리 미안하다고 하더라도 분명 또 다시 포터라는 이름으로 또 누군가를 고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아마 고용(?)이라는 단어를 쓰지는 못할 것 같다.

함께 산을 오른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도움을 요청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고맙게도 「희망을 여행하라」는 책에서는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서 히말라야의 포터들을 돕는 여러가지 방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트레킹 상품을 선택하기 전에

'포터들에게 정당한 임금이 지급되고 있는지, 포터에게 보험은 들어주었는지,

품삯으로 지급한 것을 누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전달되는지, 추운 날씨와 고도를 견딜수 있는 장비와 숙소를 제공해주는지'

정확하게 체크하라고 일러주고 있었다.

그리고 포터들에게 고산병이나 저체온증 등 고산에서 겪을 수 있는 질병이 찾아올 경우,

 적합한 응급조치를 취하고 후송이 요구되면 반드시 의사소통이 가능한 동행과 함께

안전한 방법으로 병원까지 내려가 치료를 받도록  도와야 한다고 적어놓고 있다.

또 하산 후에는 할 수 있다면 침낭이나 방수복등 등산용품을 기부할 수 있다면 더더욱 좋다고.

 

그리고 이 책은 포터들의 문제 뿐만 아니라

히말라야라는 대자연을 보호하기 위해 여행자들이 할 수 있는 간단한 실천방법도 적어 놓고 있었다.  

 - 난방에 의지하지 않도록 따뜻한 옷 준비하기

 - 썩지 않는 쓰레기를 담아 올 쓰레기 봉투 준비하기

 - 나무를 떼서 만들어야 하는 따뜻한 물 샤워는 피하기

 - 페트병 사용 억제하기. 자신의 물병을 들고다니기

 - 땅이 파헤쳐지니 길이 아닌 길로 가지말고 등산로 이용하기

 ....

 

이미 우리 몸으로 느낀 것들이었다.

안나푸르나 길에서는 일정정도 높이 이상으로 올라가면 더이상 페트병에 담긴 생수를 판매하지 않는다.

생수통에서 각자가 가지고 온 물병에 물을 담아주면서 판매한다.

우리는 그것을 몰라 4명이서 바로 앞 산장에서 사서 다 먹어버린 1.5리터짜리 페트병 하나만 가지고 있었다.

결국 쿠말이 어디가서 다 찌그러진 페트병을 하나 더 구해와서 두개를 마지막날까지 들고 다니면서

물을 사먹어야 했다.

내려올때 그 페트병은 거의 다 찌그러져 꼴이 말이 아니었다.

히말라야를 갈 때 물병은 정말 반드시 준비할 것.

환경을 보호하는 아주 간단한 실천.

 

우리가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산장? 롯지?)는 난방이 되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다른 곳도 거의 비슷한 것 같았다.

산골에서 난방을 하려면 결국 나무를 떼야 하니

여행자들이 가능하면 난방이 되어 있는 집을 피해야 한다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

스스로 산을 지키자며...

 

산위에서 깨끗하게 씻으면 얼마나 깨끗해진다고...

샤워는 무신...

 

산행중에 만난 '네팔의 어린이들 교육을 위한 기부함'

화려한 월드컵 잔치를 위해 축구공을 깁는 아이들, 학교를 가지 않고 돌을 깨는 아이들..

모두 네팔의 어린이들 이야기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작은 실천은 여기 함에 작은 돈을 기부하는 일이었다.  

 

나는 다시 히말라야를 꿈꾼다.

이 예쁜 아이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마을에 다시 들어갈 꿈을 꾼다.

 

아름다운, 그리움만 있는 꿈이 아니라

이제는 부끄럽지 않아야 할, 히말라야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