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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3 JFK 돌아오다. 보스톤, 케네디 박물관에서

프리 김앤리 2010. 7. 12. 21:58

 

1600년대 아일랜드 주민들은 영국의 침략으로 강점된 후 생활이 처참해졌다.

기름지고 좋은 농토에는 영국의 성공회와 개신교도들이 들어와서 농사를 지었고,

카톨릭 교도인 아일랜드인들은 가장 척박한 땅으로 밀려났다.

그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고, 전문직이나 기술직에 들어가 훈련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좁은 땅에 주로 감사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았다.

 

1845년 아일랜드 전역에 걸쳐 감자가 병들어 다 썩어버렸다.

그 다음해도 감자는 병들어 흐물흐물 뭉개져 버렸다.

당시 아일랜드에는 감자 외의 다른 양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당시 800만명의 아일랜드 인구중 200만명이 굶어서 죽고, 200만명이 북미 등으로 이주를 하여 아일랜드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다.

바로 아일랜드 감자 기근 사건이었다.

 

미국으로 이주해 온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은 도시의 빈민굴에 살면서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들을 했다.

부녀자들은 하인과 같은 천한 일을 했고, 남자들은 막노동을 햇다.

그들은 무서운 전염병이나 퍼뜨리는 더러운 인간들로 취급당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무식하고 돈없는 가난뱅이들이라고 무시당했다.

 

케네디 가문의 조상들도 이들 속에 있었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여, 3대째인 조셉 케네디는 큰 부자가 되었고, 케네디 가문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되었다.

조셉 케네디의 9남매중 둘째가 존 F 케네디(JFK),

그가 바로 미국 제 35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다.

재임중 쿠바 사태, 베를린 봉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위기를 맞았으나,

핵실험금지조약의 체결과 '진보동맹' 결성 등의 업적을 남겼다.

댈러스에서 자동차로 가두행진을 벌이던 중 오스왈드에 의해 암살당했다.

재임기간은 3년에 못미치는 1037일 이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나, 가톨릭의 종교적 가르침과 미국 민주당의 정치이념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고 자랐다.

1938년 21살 때, 당시 주영국 미국대사를 지내고 있던 아버지 조셉의 비서로 일했고,

1940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다음해 해군에 입대했다가 일본 구축함의 공격을 받아 자신의 어뢰정이 솔로몬 제도에서 침몰할 때 중상을 입었다.

  

불과 29살에 매사추세츠주 하원에 당선된 케네디는 민생

에 관심을 기울이는 진보주의자로서 1947~53년 하원의원을 3번 역임했다.

그는 더 좋은 근로환경, 더 많은 공공주택, 더 높은 임금, 더 낮은 물가, 더 싼 주택임대료, 더 많은 노인복지대책을 지지했다.

외교분야에서는 처음부터 냉전정책을 지지했다.

그뒤 상원의원이 되었고, 1960년 1월 민주당으로 대통령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부유한 가문, 최고의 학벌, 한번도 낙선하지 않은 능력있고 운좋은 정치인이었다.

 

우리는 JFK를 만나러 간다.

 

보스톤 시내에서 지하철을 타고 JFK 박물관역에 내리니 JFK가 우리를 반긴다. 

 

지하철 역 앞 승강장에 2번 셔틀버스를 타라는 안내와 표지판이 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기다린다.

시에서 셔틀버스를 운영하는 것인지 무료다. 

 

 5분 쯤 버스를 타고 가니, 해안가 경치 좋은 곳에 번듯하게 서있는 케네디 박물관.

바다를 좋아했던 케네디를 생각하여, 케네디 박물관 및 도서관의 위치는 재클린 여사가 정했다고 한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죽은 후,

10년 이상 준비를 해서, 전세계 3500만명이 개인기부를 하였고,

1979년에 케네디 도서관이 건립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

인터넷도 없고, 계좌이체도 제대로 안되었을 60-70년대에 어떻게 그많은 사람들과 돈을 모았을까 궁금하다.

준비하는데 15년 이상이 걸렸다.

 

개관된 지 30년 지났다.

도서관과 박물관은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500만명 이상이 방문했고,

도서관 기록 보관소에는 840만장에 이르는 케네디 대통령의 개인기록과

상하원, 대통령 재임 당시의 기록물 등이 보관되어 있다.

 

20만장의 사진, 7천 시간 분량의 오디오 기록, 7만권의 인쇄물,

8백만 피트의 필름 등이 소장 되어있다.

 

"JACK'S BACK"

케네디 대통령선거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케네디 센터는 연방정부의 지원금, 박물관 입장료, 기념품 판매 수입, 회의시설 이용료,

수천명에 달하는 개인과 기업의 기부금과

각종 봉사활동 등을 통해 수입금을 마련한다.

안내데스크의 직원들이 친절하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으면서 한글로 된 안내 리플렛을 겸손하게 건네준다.

 

케네디의 웃는 모습 아래서 일부러 또박또박 말해주는 안내원.

12달러. 싸지는 않다.

 

입장료를 내면티켓 대신 스티커를 준다.

아마 들어가서 관람을 하다가  지친 사람들은 경치좋은 밖에서 쉬다가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케네디 도서관은 다양한 지역사회와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의 정치, 역사 및 문화, 통치과정,

그리고 공공 봉사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력을 하고있다.

매년 평균 4만명 이상이 도서관 교육 및 지역사회 프로그램에 참여한단다.

그리고 도서관 연구시설은 매년 21,00여명 이상의 연구자들이 방문하는

미국 내 대통령 도서관 중 가장 바쁜 도서관임을 자랑한다.

 

 새로 나온 케네디상 기념품 안내와 각종 행사를 지원하는 안내글이 붙어있다.

옥내외에서 피로연이나 결혼식 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시설이다.

 

케네디 박물관은 모두 21개의 크고 작은 섹터로 되어있다.

1. 전당대회

2. 1960년 선거운동

3. 선거운동 사무소

4. 케네디 닉슨 논쟁

5. 선거결과

6. 대통령 취임식

7. 백악관 복도

8. 브리핑실

9. 평화봉사단

10. 공문서

11. 쿠바 미사일 위기

12. 우주개발계획

13. 기념일 및 국가행사

14. 범부장관 집무실

15. 대통령 집무실

16. 영부인

17. 케네디 일가

18. 정신 지체

19. 1963년 11월 22일

20. 유산

21. 용기있는 사람 표창

 

케네디 박물관 내에는 중소 규모의 극장이 3개가 있는 윗층에 있는 2개의 극장에서는 

아카데미상 수상 감독인 피터 데이비스가 제작한 소개 영화가 상영된다.

케네디 대통령의 유년기, 학교재학 시절, 참전시 어뢰정 PT109에서의 모습, 상하원 시절,

1960년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는 장면등이 나온다.

100여명 이상이 관람할 수 있는 규모다.

 

소개영화는 영어가 서툰사람을 위해? 영어자막이 나온다.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고마운 배려다.

 

1960년  전당대회장을 작은 규모로 재현해 두었다.

당시의 깃발과 피켓, 구호, 각주의 표시까지...

 

케네디의 선거구호가 60년대의 지도자, 기수?

부통령 후보 존슨의 포스터도 함께 걸려 있다.

 

전당대회장을 지나면 1960년대 당시의 생활상을 볼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

 

전자제품 상점의 창문을 통해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다.

흑백TV를통해 케네디와 당시 부통령이었던 공화당 닉슨의 선거운동을 볼 수 있다.

 

케네디 후보의 선거사무실 정경

선거운동에 사용된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도, 사진, 포스터, 방문계획표 등등...

 

당시 사용되었던 선거 뱃지...

 

스티커와 선거 홍보물.

케네디 승리의 노래도 만들어 지고...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들간의 TV토론이 4차례에 걸쳐 있었다.

케네디는 TV토론에서 멋진 용모와 국정에 대한 이해도, 말솜씨로 닉슨을 이겼다는 평이다.

케네디와 닉슨이 실제로 논쟁을 벌였던 장소인 시카고 텔레비전 스튜디오를 재현한 것이다.

 

 논쟁이 뜨거웠던 만큼 타임지나 뉴스위크지도 케네디 닉슨 논쟁을 크게 다루었다. 

 

CBS뉴스에서 선거결과를 분석했던, 1960년 11월 8일 재현한 뉴스장면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끝난 대통령 선거중 하나로 드라마틱 했던 모양이다.

 

선거결과가 너무 접전이어서 케네디 자신은 물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날 밤 결과를 알지 못한채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사진은 개표결과를 지켜보는 케네디, 재클린, 로버트 케네디와 가족, 측근들...

누구 할 것 없이 표정이 심각하다.

 

색깔별로 표시된 최종선거 결과

빨강색은 공화당 닉슨이 획득한 선거인단의 주이고, 파랑색은 케네디가 획득한 주이다.

지역적으론 닉슨이 넓은 지역을 획득했지만,

케네디는 총 유효투표수 6,833만 5,642표 중

11만 8,550표차로 더 많은 선거인단을 확보하여,

닉슨을 가까스로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존 F.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인 43살에,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도로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명문집안에 하버드를 졸업했고 , 상하원을 거쳤지만...

아일랜드계로, 카톨릭신자로 비주류 백인 대통령이었다.

그의 행정부는 1,037일 동안 유지되었다.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그는

"인간 공동의 적인 억압·빈곤·질병, 그리고 전쟁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이고 힘겨운 투쟁의 부담을 함께 져나가자"고 요청했다.

 

자리에 앉아서 취임연설을 듣는 노인들은 연방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케네디대통령 재임시 그를 지지했을 법한 나이의 노인들이다.

금방이라도 박수를 칠 기세로 경청하고 있다.

 

취임당시의 기념품들...

 

미국 대통령의 국장과 국기가 걸려있는 상징적인 문을 통해서 ....

백악관을 연상시키는 기둥들이 서있는 복도가 나온다.

 

백악관 복도를 재현한 모습.

복도의 양쪽에는 백악관 시절의 사진,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보낸 선물,

대통령 일가의 개인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3월 평화봉사단을 결성하여 미국인들에게 제3세계 국가에서의 봉사활동을 통해

이들 국가의 삶의 수준을  향상시키도록 도울것을 요청했다.

당시 활동 중이던 자원봉사자들의 사진, 초기 평화봉사단의 교육자료, 자원봉사자들의 일기와 모집 광고, 필름 등이 전시되어있다.

 

세계각국의 평화봉사단들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냈던 선물들...

 

3개의 극장 앞에는 시계가 걸려있고 몇시부터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는지를 전광판에 알려준다.

물론 영화가 상영중일 때는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쿠바 미사일 위기 코너이다.

 

1962년 10월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고 하자,

케네디는 무력충돌을 불사할 각오로 해상봉쇄령을 내린다.

세계 3차 대전 발발이나 핵전쟁의 위험도 있었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1960년 케네디는 10년이내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재임기간 미국 우주개발계획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며,

미국의 최초 우주궤도 비행선 조종사였던 존 글렌대령의 우주복 등...  

(실제 인간은 1969년 닐 암스트롱이 최초로 달에 착륙했다) 

 

공문서.....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케네디 대통령시절, 핵심적인 특별한 사건, 문제 그리고 사람들을 보여준다.

 

정신지체의 문제를 케네디 대통령은 공개적인 논의의 대상으로 끌어냈다.

아마 이전에는 사회적으로 은밀하게 혹은 터부시했던 모양이다.

 

박물관엔 케네디대통령의 업적으로 평화봉사단 창설,

쿠바 미사일위기 해결,

우주개발계획의 수립,

정신지체 문제의 공론화와 해결노력 등를 내세우고 있다.

전체 전시관 중... 업적부분을 포함한 일부는 시기나 상황에 따라 코너나 주제를 바꾼다고 한다.

 

기념일 및 국가행사의 코너 중 하나...

정기적으로 바꾼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기념 행사장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대지"의 작가 펄벅과 재클린여사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법무장관 집무실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대통령의 친동생으로 35대 중반에 법무장관이 되었고,

국가의 최고 법무담당관으로서, 대통령의 최고 자문역으로도 활동했다.

또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로 독특한 역할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해군시절 탔던 PT 어뢰정의 모형, 해군시절의 사진과 훈장 등

 

케네디 대통령은 집무실에서 TV를 통해 미국 국민들과 정기적으로 대화를 나눈 최초의 미국 지도자였다.

TV에는 1963년 알라바마 대학의 통합과

민권법 입법추진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연설하는 장면까지 연대순으로 구성된 짤막한 비디오가 포함되어 있다.

또 그가 사용하던 책걸상, 지구의, 유품과 기타 물건 등이 진열, 전시되어있다.

 

두사람은 어디로 걸어가는 것일까?

너무나 진지하게...

 

케네디 대통령과 법무장관이었던 친동생 로버트 케네디.

케네디 대통령이 죽은 후, 상원에 진출한 로버트는 민권법안의 통과에 큰 기여를 하며 진보 정치계의 존경을 받았다.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유력한 후보로 부상하여, 몇몇 주의 예비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로버트 케네디의 이스라엘 지지에 분노한 팔레스타인 학생의 총격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형 케네디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복도에 많은 관람객이 있다.

케네디 박물관에 이렇게 많은 방문객이 오는 이유가 뭘까?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부르고 있는가?

 

재클린 부비에가 타임즈 헤럴드의 "탐구심 많은 사진 여기자"로서 사용했던 카메라 등

 

재클린여사의 어린시절 사진과 저술,

케네디 대통령 재임중 공식행사에서 입었던 의복이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 시절,

아스완댐을 만들면서 수몰위기에 처한 인류의 문화유산 아부심벨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한 기록물 등...

 

어두운 복도다.

시커먼 복도에 1963년 11월 22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두운 복도에 서너대의 작은 흑백TV가 설치되어 있다.

TV에선 비극적인 소식이 발표된다.

아나운서도 잠시 말을 끊는다.

울먹이는 듯 하다.

담담하게 사실을 전달한다. 

절제된 슬픔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다시 밝은 방이다.

세계 각국에 케네디라는 지명을 사용한 공원, 길 등을 나타낸다.

케네디 대통령은 말한다.

“사람은 죽는다. 나라는 흥하고 망한다. 그러나 이상은 영원하다.”

 

박물관은 로버트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의 삶과 업적을 보여주는 전시물도 있고,

인간의 달 착륙성공으로 가져온 30억년 전의 돌도 전시되어 있다.

기념우표와 그 외 컴퓨터를 이용해서

케네디 대통령의 생애와 재임기간중 사건들, 공문서, 소장품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기념우표와 기념 주화 등...

 

관람을 마치고 전시실을 나오면 벽면이 유리로 된 공간이 나온다.

보스톤 항구가 있는 탁 트인 바다가 보인다.

충분히 행사를 할 만큼 넓고 전망이 좋다.

 

창을 통해 보이는 .... 

 

작은 카페로 간단한 식사와 차, 샐러드, 햄버거 등을 판다.

 

기념품 가게.

케네디의 사진과 책, 엽서.

60년대 선거당시의 모자와 깃발 등

 

선거당시의 케네디와 존슨, 케네디의 형제들, 케네디 박물관의 사진 등으로 만든 마그네틱

 

다시 정문을 돌아서 밖으로 나와서, 폭 넓은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바다가 보인다.

역시 밖에서도 간단한 음료를 판매한다.

 

 

바다와 접한 야외공간에선 일부는 식사를 하거나, 보스톤 항구를 구경하고,

 

우리는 그늘이 많은 숲에서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먹고,

 

어떤 이들은 잘 만들어진 산책길을 걷는다.

 

우리가 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토요일이었다.

휴일이라서 도서관은 관람할 수가 없었다.

 

케네디 박물관은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듯 짜임새가 있었다.

건물을 먼저 설계하고 전시할 내용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을 지속적으로 전시할 것인지?

어떤 부분을 주제별로 바꾸어가면서 전시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건물을 설계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특징은

박물관의 전시품은 가능한 케네디 대통령의 말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사건 사건 마다, 장면 장면 마다 그 때의 육성으로, 그 때의 화면으로 설명하고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바로 옆에 살아있는 듯 하다.

방문자로 하여금 마치 1960년대 초기와 케네디 대통령 재임 당시의 백악관에 있는 듯한 경험을 제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고 작은 상영관과 모퉁이 마다, 케네디 대통령의 얼굴과 음성이 끊임없이 나온다.

어쩌면 TV를 통한 대중정치시대를 연 케네디 대통령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리고자 한 듯하다.

  

아일랜드계로서, 가톨릭으로서, 미국 정계의 비주류였던 케네디 대통령

대통령 재임기간이 3년도 되지 않는 JFK.

50년이 지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박물관을 찾는 이유는 뭘까?

그의 정책 때문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아쉬움 때문일까?

의문을 갖고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