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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0 미국 최초로 사임한 대통령, 닉슨기념관

프리 김앤리 2010. 12. 2. 02:00

조카네 가족은 LA에 있는 유니버셜 스튜디오로 갔다.

도시와 놀이공원에 별로 관심이 없는 우리는 숙제하는 마음으로,

LA 근교에 있는 닉슨대통령 기념관으로 간다.

 

리차드 닉슨.

TV토론에서 케네디대통령에게 근소한 차로 낙선했던 닉슨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최초로 사임한 대통령.

죽의 장막이라 불리우던 중국과 핑퐁외교를 한 37대 미국대통령.

우리가 닉슨에 대해  알고 있던 것들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의 44 대통령이다.

약 40명의 전직 대통령중, 대통령 도서관(기념관)은 12군데 밖에 없는데,

어쩌면 부끄럽고 치욕스럽게 사임을 한 닉슨대통령의 도서관.

우리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왜 기념관을 만들었을까?

억울하고 할말이 많아서 였을까?

아니면 자기 변명을 하기 위해서일까?

워터게이트사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지, 아니면 아무말도 안할지, 궁금했다.

 

우리나라에도 김영삼, 김대중대통령 기념관이 있지만, 우린 아직 가보지 못했다.

특히 거제도 만들어졌다는 김영삼대통령의 기념관도 몹시 가보고 싶다.

IMF사태에 대해 거제도 기념관에는 무엇이라고 씌여져 있을까?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다른나라, 다른 문화를 접하고 있는데 자꾸 우리나라가 보인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LA 시내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인 요르바 린다(Yorba Linda)에 있는 닉슨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이다.

 

다른 대통령 기념관에 비해 작을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넓은 주차장과 분수, 건물은 규모에 있어서, 다른 대통령 기념관에 비해 결코 작지 않은 느낌이다.

 

입구에 들어서니 대리석으로 장식된 미국대통령 상징이 바닥에 새겨져 있다.

대통령 기념관다운 위엄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순간뿐.

정면에 보이는 것은 기념품 판매소다.

약간의 기분이 상한다.

대부분의 미국 대통령 기념관에도 기념품 판매소가 있지만 동선의 거의 마지막, 출구 부분에 있었는데...

 

왼쪽에는 닉슨대통령과 앨비스 프레슬리가 악수하는 장면이 크게 만들어져있다.

닉슨과 엘비스 프레슬리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잘모르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생각으로 어떤 정책을 실행했고, 못했는지를 알리는

대통령 기념관 입구에 인기있는 대중스타와 함께 찍은 사진을 크게 전시하다니...

엘비스 프레슬리의 명성을 조금이나마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닉슨재단이 조금은 비겁해 보인다.

 

입구의 다른쪽에는 부시정권하의 네오콘의 수장, 딕체니 부통령의 초청 행사가 있단다.

아무리 공화당 출신 대통령 기념관이지만,

입구의 기념품점, 엘비스 프레슬리, 전쟁을 좋아하는 네오콘의 딕체니...

우리 맘을 상하게 한다.

 

기념관 입구의 전시된 타임지에 표지인물로 장식된 닉슨대통령

모두 헤아려보니 42년동안 54번에 걸쳐 타임지의 표지인물이 되었네...

거의 1년에 한번 이상 표지인물이 되다니 대단하다.

아무 생각없이 보면 닉슨이 대단한 위인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니다.

1946년, 공화당으로 캘리포니아주 하원에 당선되어 반공주의자로 이름을 날렸고, 상원을 거친 후

1953년, 40살의 젊은 나이에 아이젠하워 정부의 부통령으로 8년간 활동하고,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선 닉슨은 케네디와 겨루어 근소한 표차로 지고,

이후 캘리포니아주 주지사 선거에도 패배한 후 정계은퇴를 한다.

그리고 1968년 정계로 복귀하여 미국의 37대 대통령이 되고, 1972년 재선을 한다.

 

재임기간 중에는

69년 발표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동맹국들의 자주국방노력 강화와 미국의 부담 감축을 천명한 '닉슨독트린'으로 유명하다.

닉슨이 말하길, 

"길지 않은 기간동안 미국은 세번이나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에서 싸워야 했다.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 한국전쟁,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베트남 전쟁이다.

 2차 대전 이후 아시아처럼 미국의 국가적 자원을 소모시킨 지역은 일찍이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인 출혈은 더이상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면서

- 미국은 우방 및 동맹국들에 대한 조약상의 의무는 지킨다.

- 핵보유국의 위협에 대해서는 미국이 핵방패를 제공한다.

- 핵공격 이외의 공격에 대해서는 당사국이 그 일차적 방위책임을 져야하고, 미국은 군사 및 경제원조만 제공한다.

- 군사적 개입도를 줄인다.

 

학창시절 사회시험문제에 자주 나오던 닉슨독트린이다.

 그뒤  캄보디아에 대한 무차별 비밀 폭격, 베트남에서 미군철수와 베트남전의 사실상의 종결,

중국과의 핑퐁외교, 소련의 공식 방문,그리고 워터게이트 사건등 큰 사건들로 가득차 있었다.

자연히 타임지의 표지인물로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워낙 인기가 없었던 대통령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기념관 운영비 마련을 위해서 인지?

관람객도 적고 기념품을 사는 사람도 적지만, 엘비스 프레슬리의 기념품도 보인다.

어울리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기념품점을 지나는 홀중앙에는 금문교를 비롯한 미니어처가 보인다.

장난감 기차도 다니고..

어린이 교육용인가?

닉슨 대통령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모르겠다.

아니면 단순한 볼거리인가?

요즘 세상에 이정도가 볼거리로 될 수 있을까?

백화점만 가도 이정도는 충분히 볼 수 있는데...

더구나 가까이에 디즈니랜드가 있고,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있고, 헐리우드가 있는데...

 

약 300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중극장이다.

다른 기념관들은 소극장 체제로 여러가지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관람객은 우리 부부 두명과 서양인 두명... 고작 네명뿐이다.

주중이긴 하지만 기념관을 관람하는 사람이 20여명이 안된다.

 

줄을 서서 기다리던, 워싱턴, 케네디, 링컨, 클린턴대통령 기념관과는 너무 비교된다.

입구 주차장엔 빈공간이 많고 관람객이 거의 없다.

그래서인지 안내하는 자원봉사자의 설명도, 표정도 어둡다.

 

'대통령으로 가는 길'

본격적인 전시공간이다.

 

1950년 37살의 나이로 상원의원 후보시절의 닉슨은 한창 패기있고 젊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함께 8년간 보낸 닉슨 부통령의 홛동이 전시되어있다.

전세계를 다니면서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으로서 생활을 한듯하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후보와  닉슨 부통령후보의 선거 홍보물.

 

60살을 넘긴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대신하여, 40대 초반이던 닉슨 부통령은 전세계를 누비었던 것 같다.

 

8년간 부통령을 지낸 닉슨은 1960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고

케네디와 겨룬다.

 

'나는 닉슨을 위해 있다'는 뱃지에서 부터

' 60년대에는 닉슨이다.

  평화를 위해,

  번영을 위해,

  정의로운 모두를 위해'

 

'60년대의 기수'를 내걸었던 케네디가 이겼다.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였다.

닉슨기념관에서 나누어주는 홍보물에도 나오듯이 고작(only) 113.000표 차이였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평론가는 말하기를,

처음으로 도입된 TV 합동토론회에서 당락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닉슨은 8년간 부통령직을 수행한 중견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땀을 많이 흘렸던 반면,

운동으로 단련된 검게 탄 케네디의 얼굴은 활기가 넘쳤다고 한다.

근소한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선지...

케네디진영의 구호와 홍보물과 사진도 눈에 띈다.

 

대통령선거에서 박빙으로 패배한 닉슨은 62년 캘리포니아 주시사 선거에 출마하지만, 다시 낙선한다.

그후 변호사를 개업하면 시간이 나는대로 세계를 여행한다.

닉슨의 1965년 새해 결심

새해의 결심이 우리 눈을 끈다.

 

매일 휴식

짧은 휴가

약한 부분에 대한 학습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책쓰기

적절한 운동 등...

 

그는 휴식과 휴가, 운동을 강조한다.

몸과 마음의 휴식과 단련을 위해서 필요했을 것이다.

대통령을 꿈꾸지 않는 모든이들에게, 인생을 의미있게 살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새해의 결심이다.

 

1968년 닉슨은 마침내 대통령이 된다.

 

닉슨 기념관에서 보는 여러장의 사진중

가장 당당하고 활짝웃는 모습의 닉슨이다.

 

중국의 모택동과 주은래

소련의 후르시초프와 브레즈네프 등등의 지도자 동상이 전시되어있다.

 

닉슨독트린은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고

공산국가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개선, 긴장완화를 가져온 것이다.

닉슨은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중국을 공식방문했고,

동시에 미소 양국의 무역협정체결, 공동 우주탐사계획, 핵무기 제한협정까지 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

 

중국과 소련을 방문하고...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고...

워터게이트 사건만 없었다면 닉슨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잘 수행한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른다.

 

1970년대 백악관의 녹음시스템이다.

닉슨기념관은 1990년에 만들어졌고 닉슨대통령은 그로부터 4년뒤에 죽었다.

닉슨대통령과 재단은 어쩌면 이코너...

워터게이트사건에 대해 설명?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워터게이트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1972년, 전직 FBI 직원이자 닉슨대통령 재선위원회 간부등이 중심이 되어, 민주당 선거본부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달았다가 탄로가 난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두명이 진상을 추적한다.

음모의 배후가 정부의 고위선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닉슨측은 거짓말 까지 하면서 배후를 숨기려 한다.

불법선거 비용으로 모금한 공화당의 뇌물기금이 드러나고, 워터게이트 침입자금도 여기에서 나왔다.

범인들은 비밀그룹의 일원으로 백악관의 골치아픈 일을 불법적으로 처리하는 'PLUMBER'였다.

배관공이자 비밀정보의 누설을 막는 사람의 뜻이다.

 

닉슨은 TV연설에서 '나는 거짓말쟁이가 아니다'고 주장했지만, 며칠후 다시 그의 거짓이 드러난다.

몇달의 공방뒤에 공개된 녹음테이프에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은폐에 직접 관여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하원에서 탄핵의 절차가 진행되자, 74년 8월 닉슨은 탄핵을 막는 차원에서 사임한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대통령이 닉슨대통령을 사면함으로서, 닉슨은 모든 조사와 재판을 피할 수 있었다.

탄핵결의가 나오기 전에 사임함으로서 탄핵도 받지않았고, 재판도 받지 않았지만 죄가 없다고 인정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닉슨은 뒤늦게 기념관에서 설명한다.

미국의 분열을 막기위해 스스로 사임했다고....

 

사임후 닉슨은 은둔생활을 한다.

캘리포니아 변호사 자격을 포기하였고, 뉴욕변호사 자격은 박탈 당한다.

이후 '닉슨 회고록'을 쓰고, 1994년 사망직전에 '평화를 넘어'를 발간한다.

 

전시관을 돌아나오면 미국 국기와 나란히 닉슨의 활짝 웃는 흉상이 나온다.

 

또 다른 방향에는 백악관의 행사장인 '이스트 룸'이 만들어져 있다.

복도엔 닉슨 재임시절 중국을 방문한 사진과 글이 전시되어있다.

'중국으로 가는 평화여행'

 

화려하고 크게 만들어진 이스트룸 한쪽엔 얼마되지 않는 의자가 놓여져 있다.

한쪽 모퉁이를 차지한 수십개의 의자가 홀을 썰렁하게 한다.

 

밖으로 나오면 넓게 만들어진 풀이 있고...

 

스페인식으로 만들어진 기념관이 깨끗하게 정돈된 잔디밭과 조화를 이룬다.

 

또 다른 모퉁이엔 재임시절 타던 전용헬기까지 전시되어있고,

 

내부도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닉슨기념관 자리는 원래 닉슨가족의 귤과수원이었다고 한다.

닉슨대통령이 태어나서 자랐던 집이 그대로 있고,

 

양지바른 집과 기념관 사이, 양지바른 모퉁이에 닉슨대통령 부부가 조용히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