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지금은 여행중 /11월 일본

돌아가지 못한 주검, 솟대에 실려 - 일본 여행 1

프리 김앤리 2011. 11. 22. 15:50

지난 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박4일동안 일본을 다녀왔다.

구미의 다문화가족센터 사람들과 함께 한 여행이었다.

그냥 놀다가만 오는 여행이 아닌 괜찮은 여행을 해보자고 떠난 자리였다.

앞으로 몇꼭지, 일본 여행을 포스팅한다.

 

 

<돌아오지 못한 주검, 솟대에 부는 바람. 영혼으로 실리다>

19459,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내 한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까운 항구로 모여들었다.

한국간 정기 연락선이 운항하던 시모노세키항으로 몰려와 배가 떠날 날을 기다리며 노숙을 하는 등 대혼잡을 이루었다.

이는 시모노세키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하카다, 센자키, 사세보, 마이즈루, 하코다테 등 한국과 왕래가 가능한 항구는 한인들로 대만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귀환길이 정식으로 열리기 전이었으므로 많은 한인들은 직접 소형선을 구입하든지 아니면 빌려서 귀환을 서둘렀다.

당시 일본 해안에는 미군과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가 많았으나 소형 선박은 그것을 감지할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기뢰에 의해 폭침되는 경우도 많았다.

 

고국을 향하던 동포들이 참변을 당한 것은 19459월 중순. 초특급 마쿠라자키 태풍이 강타했을 때다.

기상 관측사상 가장 큰 태풍이었다.

큰 선박도 항해를 중단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오직 고국에 돌아가려는 일념으로 이들은 출항을 강행했다.

이들이 탔던 배는 기껏해야 60t 전후의 목조선에 불과했다.

조악한 엔진을 달았기 때문에 속력도 6노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917일 태풍에 휘말리면서 순식간에 조난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인근 지역에서 태풍으로 침몰한 배는 와카마쓰에서 22, 하카다항에서 21, 모지항에서 13척 등 60여척에 달했다.

태풍이 가라앉은 다음날 인근의 와카마쓰 해안에는 태풍에  휩쓸린 80여구의 시체들이 떠밀려왔다.

그렇게 일본을 떠나고 싶어했던 이들이 끝내 대한해협을 건너지 못한 채 원혼이 되어 되돌아오고 만 것이다.

해변에 널려 있던 이들의 사체는 인근 주민들에 의해  오다야마 묘지에 겨우 수습되었다.

그나마 해안까지 떠밀려온 시신은 수습할 수 있었으나 바닷물에 실려 떠밀려간 시신을 어찌 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이후 오다야마에 묻힌 한인들의 참상은 오랫동안 잊혀지고 있다가

키타규슈(북큐슈)  재일 한인들의 시민운동에 의해 뒤늦게나마 밝혀지게 되었다.

재일 한인들의 요구로 키타큐슈 시청은 199012월 묘지 앞에 위령비를 건립하였으며,

1994812일에는 한글과 일본어로 안내판을 세워 귀환 당시의 참상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도착한 지난 금요일, 오다야마 묘지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과연 위령비가 서 있었다.

1945년 9월 17일이라는 날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가지고 간 흰 국화를 비석 앞에 바쳤다.

 

우리를 안내하신 재일동포는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셨다.

일제시대 징용으로 이곳까지 끌려온 동포 1세대들은 이제 거의 돌아가셨고 이분은 동포 2세라고 하셨다.

자신은 단지 전해들은 이야기일 뿐인데도 당시의 이야기를 하며 울컥하신다.

 

 

 

 

 

 

 

 

 

그러나 80여구나 되는 시신을 묻었다는 묘지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다.

비석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일본인들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묘지의 한쪽 구석의 평지일뿐이다.

무심한 잔디만 자랄 뿐이다.

함께 온 사람이 일그러진 얼굴로 슬프게 말한다.

"우리 구제역 났을 때 동물들 쓸어담을 때 하고 같잖아요."

얼마나 서글프고 얼마나 분노스런 이야기였는지.

조난자들을 위한 위령비가 세워지고 난 후 2006년 한국의 민간인 단체가 와서 묘지의 한쪽에 세워둔 솟대가 보인다.

소개하시는 동포분은

 "저 솟대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 바로 고국 땅이라며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한 목숨들, 죽어서나마 영혼이라도 조국으로 날아가시길 기원하는 마음"이라신다.

(솟대 사진과 묘역 사진은 슬픈 역사를 되새기느라 미처 찍지를 못했다. 다른 사람의 글에서 빌려왔다.)

 

모두들 숙연하다.

60년도 더 지난 우리의 역사다.

슬픈 한반도의 역사다.

조국을 향하는 방향으로 솟대를 세우던 날, 그들에게 바친 시 한편이 비를 맞고 있었다.

명복을 빈다.

 

폴란드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읽은 글귀를 떠올린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 역사를 되풀이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