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지금은 여행중 /11월 일본

한국인 게이코 - 일본 여행 5

프리 김앤리 2011. 11. 26. 23:30

 

<일본 민족학교를 다녀와서>

우리가 그녀를 만난 것은 중국 따리에서 징홍으로 가는 야간버스에서였다

10년전 내 인생 최악의 잠자리였던 중국 야간버스 보다는 훨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지저분한 먼지에 꼬리한 냄새가 진동하던 버스였다.

며칠동안이나 머리를 감지 않은 듯이 보이는 사람들, 이층으로 짜놓은 버스안의 침대에서 그래도 밤이라고 양말을 벗어

시커멓고 냄새 나는 발이 통로 밖으로 볼썽사납게 튕겨져 나와 있었다. 게다가 어떤 사람이 어떻게 자고 일어났는지 언제 빨았는지 자신없는

먼지 퍽퍽 날리는 이불까지. 도로는 포장되어 있지 않아 덜컹거려 밤새 멀미에 시달렸다.

분명 정상적인 사람들이었음에 틀림 없지만 이미 정나미가 떨어져 있는 나로서는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끔찍한 존재로 보였다.

휴게소에 잠시 멈춰도 밖으로 나갈 힘조차 없었다.

 

그런데 가만. 휴게소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시 올라타는데 좀 인간다운 여자가 보인다?

무척 깨끗했다.

어라? 저 여잔 어디서 나타난거지?

분명 여행하는 사람인데???

 

징홍 버스 터미널레서 우리 둘은 의도적으로 그 여자에게 접근(?)했다.

'의도적 접근'이라면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날런지 모르지만 배낭여행자들에게는 필수 코스다.

버스 터미널에서 시내까지 택시비 나눠내기, 숙소를 찾는 인원을 불려 가격 깍기, 3인용 도미토리가 있다면 금상첨화, 상호 정보 교환...

현실적인 계산 이외에도 배낭여행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때로는 목표요 과정이지 않는가?

상대가 '나홀로 배낭족'이라면 성공률 거의 100%다.

그 쪽도 혼자서 차비를 내거나 숙소를 찾는 거보다는 여럿이 어울리면 훨씬 더 유리하다는 계산이 물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 혼자인 경우 낯선 도시에서의 두려움까지 없앨 수 있으니 거절할 리 만무하다.

더구나 홀로 하는 여행에서 동행을 구할 때 우리 같은 커플은 가장 좋은 상대다. 

딱히 자신의 성과 달라 문제를 일으킬 일 없고 커플이 한꺼번에 나타나니 택시비, 숙소비 절감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커플이 다른 사람의  끼어듬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지만 우리처럼 먼저 달라드는 커플이라면 만사 OK다.

또 우리가 좀 선하게 생겼잖는가? ㅋㅋㅋㅋ

 

예상대로 일본인이다.

서양사람들은 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을 구별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우리끼리는 서로서로 보면 딱 안다.

저 사람이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아니면 중국사람인지.

굳이 입을 벌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입고 다니는 옷 차림, 신발이 다르고 머리 형태도 뭔가 좀 표가 나고 하여튼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게이코라고 했다.

역시나 우리의 의도적 접근을 아주 기뻐하며 받아들인다.

시내까지 택시를 타서 정확하게 나누기 삼, 2/3는 우리가 내고 1/3은 게이코가 냈다.

혼자 타면 어차피 혼자 다 내야 하는데 택시비만 봐도 게이코는 땡잡은 거다.

숙소가 많다는 도심에 도착해서 한쪽 구석에 배낭을 벗어 남편한테 지키라고 하고 우리둘은 방을 구하러 다녔다.

셋이서 같이 쓰는 도미토리를 구하거나 아니면 우리 둘이 쓰는 방 하나와 혼자 쓰는 방 하나를 구하는 게 우리 목적이었다.

하여튼 한 명 방을 구하는 것보다 둘, 둘의 방을 구하는 것 보다 셋의 방을 구하는 게 조금이라도 가격을 다운시킬 수 있으니

구석구석의 골목 골목 가격대비 괜찮은 방을 찾아다녔다. 

같이 다니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분위기로 보아 게이코도 제법 고수의 배낭여행자다.

밤차를 타고 와서 왠만하면 포기하고 방을 구할만도 한데 좀 돌아다니는 수고따위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한다.

역시 고수다. 사실 약간 짜증도 난다. 

 ' 이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우리 둘은 그저 그런 방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찐득이 처럼 붙어서 이 여자 방까지 고민해줘야 하다니...

   고작 택시비 그거 쪼매 아끼려다가 내가 이런 수고까지 해야되나...'

막급까지야 아니지만 슬 후회스러웠다.

 

3월이었지만 중국의 남쪽 지방 시상판나(징홍)는 이미 아열대 기후였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밤새 멀미로 시달린 배는 고프다 못해 아프기까지 하고 머리는 멍하니 띵해져왔다.

우선 아침 밥이라도 먹고 나서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는 남편한테 한국말로  " 좀 짜증난다. 이 여자  억수로 깐깐하다. 그냥 우리 둘이만 가면 안될까???"

게이코가 빤히 보고 있어서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나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알아차린 걸까?

밥 먹고 나서 대충 아무 방이나 구하잔다.

 "아메리칸 브랙퍼스트를 먹을래? 아까 지나다보니 아침 밥을 파는 곳도 있었는데 우리는 밥 먹고 싶은데? "

같은 동양 사람이니 혹시 밥을 먹어도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좋단다.

자기는 '비빔밥'을 먹고 싶단다.

오잉? 비빔밥?

으아해하는 우릴 보며 사실, 할머니가 한국 사람이었단다.

그래서 할머니가 만들어 주는 비빔밥이 그립다나, 어쨌대나?

오잉? 할머니? 한국 사람?

그래도 그 때까지만 해도 별 느낌이 들진 않았다.

그럴수도 있겠다, 할머니가 한국 사람일 수도 있겠다, 뭐 그런.

 

밥을 먹고 배를 좀 채우니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세명이 함께 쓰는 도미토리를 구했다.

체크인을 하려고 여권을 내는데....

헉! 그녀가 한국 여권을 내민다. 겉장이 초록색인 한 국 여 권!

 " 너 한국인이냐?"

그렇단다. 자기는 한국 사람이란다.

일본인이 아니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국 사람, 그 아래 태어난 아버지도 한국 사람, 그리고 어머니도 한국 사람.

당연히 자기도 한국인이란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자라고 일본말을 쓰고는 있지만 자기 집안은 일본으로 귀화를 하지 않아 여전히 한국 사람이란다.

그래서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단다.

 

마음이 짠해졌다.

원래 우리는 같은 숙소를 구한다 해도 오늘 하루 노는 건  따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달라졌다.  우리는 그날 하루종일 게이코랑 같이 놀았다.

아까 한국말로 투덜거린 것, 혹시 그 말을 다 알아들었을까봐  미안해서만은 아니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일본인 게이코에 대한 짠한 마음때문이었다.

늦은 저녁까지 맥주를 시켜놓고 우리는 한국과 일본, 일본 속의 한국인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는데 게이코의 침대는 마치 잔 적도 없는 듯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날 이야기 중에 일본인들이 묵고 나간 호텔에는 사람이 드나든 흔적도 없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더라는

여행자들 사이에 유명한 '깔끔한 일본인 이야기'를 잠깐 했었다.

자기도 어릴때 부터 그런 청결 교육을 정말 많이 받았는데 그게 참 싫다고 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정리하면서 자기가 받은 교육대로 어느새 하고 있더란다.

그동안은 여행 다니면서 간혹 침대를 어질러 놓고 체크아웃을 하기도 했는데

어제 저녁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꼭 그래야겠다고 생각이 들더란다.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게이코는 역시 일본인이었다.

 

징홍에서 헤어지고 아주 여러날 후에 게이코에게서 메일이 왔었다.

잘 다니고 있냐고, 보고 싶다고...

물론 영어로 쓴 메일이었다.

징홍에서도 우리와 그의 대화는 모두 영어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 여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 우리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의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역시 한국 여권의 게이코와의 대화는 참 우습게도 영어였다.

 

이번 일본 여행을 하면서 나는 내내 한국인 게이코를 떠올렸다.

그가 보고 싶어졌다.

 

<중국 징홍 버스 터미널에서.  우리는 라오스의 우돔싸이로 향했고 게이코는 라오스의 루앙남타로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