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지금은 여행중 /11월 일본

강제징용의 슬픈 역사, 놀라운 기록의 역사 - 일본 여행 2

프리 김앤리 2011. 11. 24. 06:00

 

이번 일본 여행은 구미의 다문화가족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센터 실무자도 있고,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가정 방문 지도사 선생님들도 있었다.

한국 가정으로 시집오는(혹은 장가오는)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살리는 한편,

우리사회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그들이 주문해 온 여행 또한 예사롭지는 않았다.

그냥 마냥 즐기기만 하는 여행이 아닌 뭔가 뜻있는 여행을 의뢰해왔다.

처음엔 미얀마 난민촌이 있는 캄보디아 국경의 어느 마을을 알려왔는데 여행을 기획하기가 쉽지 않았고

라오스를 가서 눈빛 맑은 그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까 했었는데 그건 비행기표가 여의치 않았다.

결국 일본을 선택했다.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일동포들도 만나고 일본 땅에서 산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말을 배우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이 지금 다문화가족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도 맞다는 결론에서였다.

 

제일 처음 우리의 방문지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시대 징용으로 끌려와 광부 생활을 했던 미쓰가이 타가와 탄광이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인 67만여명을 강제로 이곳으로 끌고와 석탄에 캐게 하고 시멘트 공장에서 일을 시켰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이때 사망한 조선인의 수가 1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제는 이 자리에 석탄역사박물관만 남아있어 조선인의 발자취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일본의 역사만 남아 우리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박물관의 곳곳에 그려놓은  당시 광부들의 힘든 생활이 바로 끌려온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겠거니 상상하고

당시의 숙소를 재현해 놓은 곳에서 일본인과는 다른 비참한 처우를 받았던 슬픈 역사를 상기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 곳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한국인 위령비.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지만 재일동포들이 힘을 모아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겨우 한국인 위령비를 세웠다는 사실,

그리고 위령비가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이유가

'생전에는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살았지만 죽어서만은 가장 높은 곳에 영혼을 쉬도록 한 ' 의미라는 사실.

다른 나라 땅에서 처참하게 숨져간 이들을 떠올리고 그들의 넋을 기리는 방법은 그저 추모의 예를 올리는 일 뿐이었다.  

 

석탄역사박물관은 일본인들에게는 아주 인기있는 방문지인 듯 했다.

이제는 문을 닫은 한낱 폐광에 불과한 이곳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박물관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때문이다.

 

야마모또 가꾸메라는 당시의 광부가 아주 정밀한 그림으로 당시의 생활상을 그려놓은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세한 그림 뿐만 아니라 각 그림마다 자세한 주석까지 달아놓아 '역사의 기록'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비행기가 추락하는 그 순간에도 일본인들은 기록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더니만

박물관 한 칸을 다 차지하고 있는 그의 그림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그림과 이야기에 조선인의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탄광에서 힘겹게 일하는 모습 하나하나가 다 조선인의 이야기였으며

당시 일본인으로서  가장 하층민으로 살아가야 했던 탄광노동자의 세세한 묘사였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노동의 과정뿐만 아니라 당시의 풍습, 산업사회의 변천, 사람들사이에 떠도는 격언이나 미신등도 자세하게 기술해 놓았다.

 

그의 기록이 보관되어 있는 곳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싸이트에서 그의 그림을 옮겨왔다.  

 

갱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어쩌면 항상 위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아침밥 먹을 때 밥을 말아먹는 것을 터부시하여 신참 광부가 멋 모르고 밥에 물을 말아먹으면 다른 광부들이 린치를 가했다는 그림이다.

야마모또씨는 그림옆에 깨알같이 써놓은 글에서 밥에 물을 만다는 것은 바로 매장이나 무덤을 뜻한다고 믿었다고 써놓았다.

 

오른 쪽 그림은 당시 산업사회의 변천을 말하고 있다.

철도의 발달로 석탄을 실어나르는 일을 철도가 다 맡게 되자 그동안 이일을 담당하던 뱃사공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려

광부로 일하러 들어가게 되었다며 정교한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달아놓았다.

 

 

 

 

나머지들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이 박물관이 조선 징용의 슬픈 역사를 알려주는 동시에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곳이었다.  

비로소 블로그라는 매체를 갖게된 내가 최근 몇년간의 여행기록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내 가슴속에 그리고 머리속에 기억으로는 남아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스라해지는 여행.

부지런해져야한다는 생각, 지치지 말자는 생각...

일본땅에서 뜬금없이 했던 다짐이었다.

 

그리고 아래.

집단으로 이리 오롯이 착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이 몹시 신기했던 이번 여행의 동행들.

구미 다문화가족센터의 식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