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지금은 여행중 /8월 터키, 그리스

용도 폐기된 신들의 정원

프리 김앤리 2011. 12. 8. 23:30

<더위와 피로에 찌든 아테네.  8월 그리스 2>

 

여행은 새로운 것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낯선 것과의 만남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다니건만....

때로는 여행이라는 것이 한참 구닥다리를 보러 가는 일이 더 많을 때도 있다.

그것도 이제는 완전히  용도가 폐기된 유적지 같은 곳 말이다. 

오밀조밀하고 화려한 건축은 관두라고도 기둥들이라도 그나마 남아있으면 그건 황송하다 .

그냥 돌무더기들만 널부러져 있는 황량한 벌판에 데려다 놓고 이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 영광의 그날들을 머리속으로 재현해 보라고 압박한다.

상상력이나 직관력이 아주 뛰어난 영화감독 같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내려오는 전설이나 역사만으로도 사람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그려내고

사람사는 이야기에 사랑을 걸쳐내고 민족을 찾아내고 전쟁과 평화, 암투와 대의의 대서사시를 만들어내지만

우리같은 범인들이야 그저 황망한 느낌만 부여잡기도 한다.

 

그리스가 그랬다.

바람난 중년 여자들처럼 모두들 배꼽 잡고 웃던 터키에서의 열이틀 끝에 들어선 아테네는

이미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것도 들뜨게 할 수 없이 몸을 축 늘어뜨려 놓았다.

게다가 여섯은 한국으로 떠나 보내고 또 둘은 먼저 아테네로 날려보내고 따로이 떨어져 셋만 남은 상태라

드디어 덩치가 줄어들어 가뿐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는 외로움을 느꼈다. 

뭘 해도 그다지 흥이 나지 않고 시들시들했다.

나는 이스탄불쯤에서 터진 입술에다  에어컨 때문에 오지게 감기까지 걸려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같이 간 선생님들은 나를 애처롭게 쳐다봤고 그들의 눈빛 땜에 괜시리  마음이 더 아려왔다.

밤늦게 도착한 아테네의 호텔이 가끔 마약쟁이들이 등장한다는 오모니아 광장이라

잔뜩 겁을 집어먹고 공항에서 바로 택시로 직행, 분명 괜찮은 호텔이었음에도 까닭모르게 스텝에게 짜증을 부렸다.

트리풀 룸이라는 게 트윈룸에다 간이 침대를 하나 더 갖다 놓아놨길래 무신놈의 트리풀이 이렇냐고 한참동안이나 투덜투덜.

자기네 호텔 트윈룸은 다 이렇다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도, 분명히 방을 바꿔 줄 것도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닌데 괜히 투덜댔다.

감기가 들어 목소리는 꽉 잠겨 있으면서도 어디라도 이 피로를 털어내고 싶어서 짜증을 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렇게 아테네의 아침은 밝았고

처음 아테네를 온 후배 둘은 아침부터 콧노래를 부르고 샤워를 한다.

온통 하얀 도시, 신들의 정원 아테네를 보러 나갈 참에 신이 났는 모양이었다.

그냥 지네들끼리 나가라고 했다. 나는 아침 내내 호텔 침대에서 뒹굴뒹굴 거릴 것이라고. 아무것도 안하고 잠만 잘 것이라고.

지난 번 아테네를 왔을 때 첫날 여권을 잃어버리는 통에 이 도시에 그다지 호감도 없었다. 아니 약간 끔찍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전 내내 이 친구들이 아테네의 신들과 놀고 있는 사이 , 나는 단 한조각의 꿈도 없이 깊은 잠을 즐겼다.

 

 

 

 

 

 

 

 

 

 

덕분에 위의 사진들 모두 내 기억속에는 없는 거다.

2009년의 어느 청명한 가을날, 내내 추웠던 발칸반도 여행 뒤에 만난  따스한 아테네의 흐릿한 기억은 있을지 몰라도

2011년 뙤약볕이 내리쬐는 미칠듯 더운 그 날의 아테네는 없다.

아무 기억도 추억도 없는 사진을 보고 있자니 그리스의 영광도 찬란한 역사도 어느 것 하나 떠오르지 않는다.  

비록 기둥만 남아있을지라도 유적의 광대함 하나만으로 가슴 벅찼던 다른 지역과 달리

추억이 없는 사진에서 처음으로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 이제는 용도 폐기된 유적'이라는 문장을 실감한다.

원래의 용도는 폐기되고 이제는 관광용으로만 남아있는 유적지의 전형을 내가 다녀온 아테네에서 만난다.

빼곡이 들어찬 사람사는 마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유적지의 빛바랜 영광을 본다.

 

결국 이날 나는 오후 무렵 나와서 플라타 지구의 가게들을 기웃거리는 것으로 만족했고

다시 만난 후배들과 문어 구이 오징어 구이에 맥주를 마시고 나서야 아테네에게 정을 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