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지금은 여행중 /11월 중국 상해

무채색의 도시에서 정신이 아득해지다. 중국 서당

프리 김앤리 2012. 1. 3. 22:13

<11월 중국 여행, 상하이 6>

무심결에 내려선 그곳은 그냥 무채색의 도시였다.

버스가 항주를 출발하면서부터 버스 안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졸기 시작했고

지금 우리들이 과연 어느쪽으로 실려가는 지 알수도 없는 상태였다.

보통 여행을 떠나면 맛보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몸의 끄트머리란 끄트머리는 다 짜릿해져 오는 전율 따위는 이번 여행에서는 이미 기대하지도 않았다. 

몇번째를 오는 도시라서 우선 그랬다.

더구나 같은 직장 동료들끼리의 여행이란 전율따위의 긴장보다는 어느 정도 느슨한 것이 더 어울리는 모양새이어서도 그랬다.

하여튼 버스를 타자 마자  잠시의 부산거림이 있었고 우리는 마치 약을 먹은 듯이 잠에 취해 있었고

목적지에 다 왔다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나 밖으로 내려섰다.

 

안개였을까?

그 뿌옇던 것은 과연 안개였을까?

아니면 덜 깨어난 나의 몸이 주는 몽롱한 분위기였을까?

미션 임파서블 3를 찍은 곳이라는 선입견이 주는,

뭔가 정신없이 빠른 장면을 상상하던 내 앞에 펼쳐진 '서당'이라는 곳은

그냥 무채색의 안개낀 도시였다.

우리는 앞선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무작정 걸었고, 

마치 지하철의 출입구와 같은 삑삑거리는 기계앞에 몸을 갖다대 계산된 머릿수를 채우며 서당 마을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내 머리속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새로운 도시에 대한 설레임은 없을지언정 그나마 달라진 공기에라도 반응해야 하는데

나는 안개인지 혹은 매연인지 희뿌연 공기에 감염된 사람마냥 축축 늘어져만 갔다.

 

배를 타라고 했고 조그만 배에 올라탔다.

구명조끼를 입으라고 해서 걸치고 꼭꼭 여몄다.

과연 이 물이 구명조끼를 입어야 할 만큼 깊을 것인가? 내가 빠져죽을 만큼 위험할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꼭 그만큼 내 머리속은 하애져 갔다.

배는 천천히 흘렀고 나는 그냥 앞만 보고 있었다.

양옆으로 집들이 지나가고 때로는 그들의 속이 보였다.

한결같이 집 밖으로 너저분한 빨래들이 널려 있었고 물에 잠겨있는 담벼락에는 푸른 이끼가 끼어있었다.

비를 맞아 색이 바랜 나무집들이 지나갔고 흰 페인트로 칠해놓은 담벼락은 희지도 검지도 않은 우중충한 회색이었다.

호수라고 해야할까? 샛강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수로라고 표현해야 하나?

결코 맑지 않은 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이웃집 아낙들이 만나는 마을공동체라고 해야 하나?

뱃길 따라 양쪽으로 드문드문 레스토랑들이 보이고 숙박업체가 보인다.

어느 시간이 되면 저 곳에 사람들이 가득 몰려들고 북적거릴 것인가?

그래서 미션 임파서블에서 보던 그 복잡한 중국의 뒷골목,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만날수나 있을까?

나는 왜 이 뿌연 세상에서 복잡한 그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 위해 이렇듯 애쓰고 있는 것일까?

주변으로 펼쳐지는 세상에서는 내가 원하는 장면은 도대체 상상할 수가 없고 나는 왜 문득 료마전이 생각나는 것일까?

돌아가신 어머니를 꼭 닮은 여인네와 사카모토 료마가 만나는 어느 항구의 한 장면. 나는 문득 료마를 떠올리고 그 여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배는 여전히 앞을 나아가고 있었다.

천천히나마 주변의 집들이 뒤로 내빼지 않는다면 도무지 앞으로 나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그냥 멈춰 있는 듯 했다. 

내리라고 했다.

내렸다.

푸른 이끼가 가득 끼어있는 돌담들이 보였다.

그리고 좁은 골목. 총총들이 나무 집들이 있었고 좁은 골목 양쪽으로는 조그만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꼭 무언가를 사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나는 그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잇었다.

사진을 잘 찍는 동료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여기저기서 카메라 셧터를 눌러대고 있었지만 나는  느릿느릿이었다.

좁은 골목 사이 땅위를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먹으로 그려진 동양화의 한 귀퉁이에 내가 서있는 느낌이었다.

분명 몸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나는 한 자리에 가만 서 있는 듯한 정지된 세상이었다.

 

알록달록한 옷을 파는 가게를 만났다. 이 동네와 어울리지 않게 색깔을 가지고 있는 가게였다.

짚시풍의 옷을 팔고 있었고 치마도 윗도리도 색깔과 모양 모두가 칠락팔락거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딱 '미친년 치맛자락'같은 옷이었다.

문득 무채색의 세상에 고고하게 팔락이고 있는 색깔의 향연을 보자 마음이 움직였다.

미친년 치맛자락같은 알록달록한 치마를 하나 샀다. 두명의 동료도 꼭 그런 바지를 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누군가의 안내로 어느 나무공예품이 전시되어 있는 구가옥에 들어갔고

단추를 전시해놓은 또 어느집엘 들어갔다. 

조개를 깍고 다듬어 구멍이 네개나 있는 콩알만한 단추제조과정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다지 큰 감동도, 그걸 사고 싶은 어떠한 욕구도 없이 전문가라는 사람이 만드는 단추만 가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우리들은 다시 시키는 대로 버스를 탔고 그렇게 상하이의 마지막 밤이 오고 있었다.